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02
“아니다. 나는 그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곳에 사신다고요?”
모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제는 피식 웃더니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바람이 모완을 감쌌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곳은 구름으로 휩싸인 산봉우리의 꼭대기였다. 그곳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다.
모완은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저희 낙하문에 은거하는 높은 수준의 괴물⋯⋯ 아니, 고수시군요.”
이모완은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 눈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드러났다. 갑작스레 끌려왔으니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제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저, 저는 스승님의 명으로 약초를 따러 나왔습니다. 나온 지 꽤 됐으니 스승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완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스승이 곧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은근 알림으로써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저런 표정의 모완을 본 적이 없었던 한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완은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부리나케 달아났다.
단숨에 산 아래에 이른 후에야 숨을 크게 몰아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사매가 그랬지. 수준 높은 괴물들은 취향이 괴이하고 개중에는 여자의 몸을 이용해 수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도 있다고. 끔찍해! 저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나를 단숨에 저 위까지 데려갔어. 내가 재빠르게 대응했기에 망정이지. 흥!”
자신의 영민한 대응을 떠올리며 흡족해하던 모완은 다시 한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 사람… 수준 높은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젊어 보여. 그리고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걸까?”
혼자서 중얼거리던 모완은 이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연단방으로 향했다.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은 한제는 그녀가 멀리 떠난 뒤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동시에 아련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이곳은 내 영혼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곳인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가? 내 기억 속에 이런 광경은 분명 없었는데⋯⋯.”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두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눈을 뜬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만 더 보고 한 마디만 더 나눈 다음에 곧장 떠나는 거야. 가서 향에 불을 붙여야지.”
그렇게 하루, 이틀⋯⋯ 눈 깜짝할 사이 나흘이 지났다.
허나 모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제는 줄곧 산꼭대기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모완이 운천종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지난 나흘 동안 한제는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닷새째 되던 날 오후, 다급하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제는 모완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이른 모완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경계심 어린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심스레 한제에게 다가왔다.
한제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런 모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나 모완으로서는 그런 눈빛도 의아했기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서, 선배님⋯⋯ 혹시 이 아이도 구해주실 수 있습니까?”
모완은 입술을 깨물더니 품에서 손바닥만 한 짐승 한 마리를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새끼 고양이 같은 그 짐승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눈을 떠보려고 용을 쓰는 듯했지만 그럴 힘은 없어 보였다.
한제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작은 고양이를 가볍게 쓰다듬자 하얀 빛이 번득였고 이내 생기를 되찾은 녀석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고맙다는 듯 한제를 바라보았다.
모완은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탄성을 내지르고는 고양이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한제에 대한 경계심은 전보다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모완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얼른 물러났다. 아직 한제에 대한 경계를 버리지 못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산 아래로 내려온 모완은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반면 다시 떠나가는 모완을 눈으로 배웅하던 한제는 더욱 깊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돌연 구름과 바람이 몰아치더니 천둥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하늘에서는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났다. 회오리는 비할 데 없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을 발산했다.
엄청난 위압감은 계속해 확산되면서 인의 환계를 뒤덮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곳의 모든 허상의 생령들은 회오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한제! 얼른 향에 불을 붙여라!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냐!”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2대 주작은 한제의 혼이 인의 환계에 갇혀 버릴까 우려돼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에 시험의 규칙을 위반해가면서까지 직접 나선 것이다.
“그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혼의 불을 퍼뜨려 이곳의 모든 것들을 불살라 없애기만 하면 향에 자연스레 불이 붙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싫습니다.”
고개를 쳐든 한제는 화염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회오리를 올려다보았다.
“이 허상의 세계로 주입한 영혼을 통해 불바다를 일으켜 일반인으로서의 생각을 철저히 없애려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불살라진 혼에는 불멸의 화염의 씨앗이 심어질 테니 이는 주작의 네 번째 각성을 도울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일반인으로서의 감정과 기억을 없앨 마음은 없습니다!”
이곳은 그의 혼이 녹아든 곳이었다. 때문에 그보다 수준이 높은 2대 주작이라 해도 제아무리 이곳이 1대 주작의 법보로 만들어진 곳이라 해도 한제가 아니면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그저 허상일 뿐, 진실이 아니다! 나 역시 같은 경험을 했다. 이곳을 태워 향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시험에 통과하는데 어찌 이리 몽매하게 군단 말이냐!”
그 말을 끝으로 하늘에 나타난 회오리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2대 주작의 목소리 역시 흩어졌다. 한데 회오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한제의 목소리가 회오리 안까지 울렸다.
“이 이한제는 평생 집념을 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문정기 수준이었을 당시에는 천벌도 제 고집을 꺾지 못했지요. 이 세상을 불태우는 방법 중에는 불멸의 화염의 씨앗을 이용하는 것 외에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만약 하늘이 그 법칙을 고수하려 한다면 저는 하늘에 저항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집념으로 업의 불을 내겠습니다!”
대제성. 2대 주작은 한제에게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향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사묵자는 인의 환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은 흡족했다.
“선배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군요. 세 번째 소제의 시험에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은⋯⋯.”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2대 주작이 고개를 홱 돌리며 또다시 사묵자의 뺨을 후려쳤다.
“크헉!”
사묵자는 피를 토해내며 수십만 척이나 뒤로 밀려났다.
“사고라니, 무슨 소리냐! 세 번째 소제는 집념을 통해 일으킨 불을 향에 붙이려 하고 있다. 네까짓 녀석이 그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지!”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한 덕에 어느 정도 분노가 해소된 2대 주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업이라… 감히 업의 불을 내려 한단 말이지? 1대 주작께서는 말씀하셨다. 불멸의 화염으로 허상의 화염을 손에 넣는 것은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허나 업의 화염을 일으키기란 어렵다. 오직 1대 주작만이 선존의 보호로 성공했을 뿐이야.’
인의 환계. 한제가 하늘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회오리는 형태 없는 힘에 찢겨나가듯 쾅 하고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하늘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제를 제외하면 인의 환계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산봉우리 꼭대기에 선 한제는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 뒤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업의 화염을 일으키려면 한 줄기 집념으로 불을 일으켜 자신의 영혼을 태우는 위험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를 통해 영혼이 완벽하게 불살라져 파괴되려는 순간 업의 화염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생기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주작을 네 번째로 각성시키고 허상의 화염을 손에 넣을 수 있으나, 역사상 그 경지에 이른 주작족은 매우 드물었다.
허상의 화염은 질투의 화염, 분노의 화염, 광기의 화염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화염의 뿌리였다.
허상의 화염의 경지에 이른 자는 감정을 통해 허상의 화염을 끌어낼 수 있고 이는 곧 신통술과 같은 수단이 됐다.
허상의 화염의 경지에 이른 자는 비록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조차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다. 이들과의 싸움에서는 분노나 기쁨은 물론 아주 작은 감정의 파동이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허상의 화염의 경지에 이른 자는 그런 작은 감정의 파동을 이용해 강력한 신통술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공할 신통술이었다. 그 어떤 생령이라면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몽도존조차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이런 감정 역시 허상의 화염을 일으킬 수 있다.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봉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허상의 화염을 일으킬 수 있는 수련자를 만만히 여길 수 없게 마련이다.
특히 허상의 화염의 경지에 이른 수련자의 강력함은 여러 명을 상대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이들은 능히 천군만마도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업의 화염이 일어나다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은 천둥번개의 수련자가 공의 문을 열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늘의 통제를 받는 천둥번개로 하늘을 파괴하기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화염의 본원 역시 오행 중 하나지만 허상의 화염의 경지에 이르고 나면 오행에서 탈피할 수 있다. 만약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의 화염을 형성할 수 있다면 공의 문을 태워 세 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다.
한제의 두 눈은 차분했다. 허상의 화염을 얻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그는 인의 환계를 태우고 싶지 않았기에 더 어려운 길일지라도 기꺼이 택했을 터였다.
지금 한제는 삶과 죽음 사이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선택을 포기하고 이곳을 떠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2대 주작님이 내게 그렇게 잘해주셨는데 내 어찌 쉽게 포기하겠는가!’
한제는 굳건한 눈을 번득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의 환계를 불태우고 싶지 않은 만큼 2대 주작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제가 숨을 깊게 내쉬고 두 눈을 천천히 감은 순간, 온몸에서 남색 화염이 일었다. 화염은 체내에서만 활활 타올랐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화염이지만 혼백이 불살라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한제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혼백이 불살라지는 것을 집념이 자신을 완벽하게 파괴하려는 것을 참아낼 뿐이었다.
‘난 한 줄기 집념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세상 무엇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고개를 번쩍 쳐든 한제가 두 눈을 뜬 순간, 화염이 온몸을 휘감고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화염을 보지는 못했다.
인의 환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모완이 산꼭대기에 방문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다.
모완을 볼 때마다 한제는 큰 고통을 느꼈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한제의 차분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에 익숙해진 모완은 종종 올라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몇 마디를 나누기도 했다.
세심한 모완은 한제가 조금씩 허약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겉모습 역시 늙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한제가 지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업의 화염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것은 한 줄기 집념이고 그런 집념이 깊어질수록 화염은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는 법이다.
모완을 볼 때마다 한제의 집념은 한층 더 깊어졌고 화염 역시 강해졌으며, 자연히 고통도 배가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제의 혼백을 태우는 화염이 짙어진 반면 눈빛은 흐려졌고 몸은 허약해졌으며, 얼굴 또한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혼백을 불사르는 동안 한제에게만 2천 년의 시간이 몰아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