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03
“포기해라! 그 고통은 견뎌낼 수 없어! 난 그 고통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조상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어 얼마나 힘들고 끔찍한지 알고 있다!”
하늘에 다시 나타난 회오리에서 2대 주작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조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한제는 이성이 흐려진 상태로도 이를 더 악물었다. 격렬한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고 평생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극심한 고통이 몰아쳤다.
“넌 아직 집념을 화염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니 지금 네가 느끼는 고통은 시작일 뿐이야! 만약 업의 화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엄청난 역경을 마주하게 될 터! 그 역경은 조상님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견뎌내셨다고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포기해라! 집념을 업의 화염으로 만들어 타오르게 하면 네 혼백은 파멸한다!”
2대 주작의 초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소녀가 바로 네 마음속의 집념이구나! 이 인의 환계에 있는 모든 것은 환각일 뿐이다. 어찌 허상의 기억을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키려 하느냔 말이다! 어찌 이리 무지몽매하게 구느냐!”
2대 주작의 목소리는 엄한 꾸짖음과도 같았다.
허나 한제는 답하지 않았다. 이미 정신은 흐릿해져 있었고 고통은 하나하나의 기억이 되어 영혼 깊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완과의 첫 만남, 수마해, 천운종, 모완의 죽음⋯⋯ 그리고 피천관에 누워 잠든 그녀의 시신.
모든 기억 역시 한제의 혼백에서 타올랐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다. 계속해서 버티다가는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이 세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면 네가 나를 증오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대신 이 세상을 파괴해주마!”
2대 주작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하늘의 회오리에서는 한 줄기 불바다가 튀어나왔다. 하늘과 땅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기세의 불바다는 순식간에 사방을 휩쓸고 온 하늘을 뒤덮었다. 머지않아 대지까지 불태워질 것만 같았다.
그때, 모완이 산꼭대기에 나타났다. 거친 숨을 내쉬며 막 산꼭대기에 오른 그녀는 하늘을 뒤덮은 화염을 보지 못했지만 불바다는 거대한 아가리처럼 벌어진 채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 흐리멍덩했던 한제의 두 눈이 맑아졌다. 이어서 그는 매우 짙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곧장 몸을 날렸고 하늘의 화염이 덮치기 직전에 한 팔로 모완을 끌어안으며 보호했다. 거칠게 달려들던 불바다가 휩쓴 것은 모완이 아니라 한제의 등이었다.
멍한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긴 모완을 끌어안으며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포효하듯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이한제!”
2대 주작은 잔뜩 화가 난 듯 외쳤지만 하늘에서 강림하던 불바다는 이내 멈추었다.
“저는 평생 오직 그녀만을 위해 수련해왔습니다! 아무리 헛된 것이라 한들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 모완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한제가 하늘을 향해 외친 순간, 혼백 안의 화염이 다시 폭발하면서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해졌다. 심지어 그 안에는 한 줄기 검은 화염도 깃들어 있었다.
나타나자마자 하늘과 땅의 기색을 변하게 한 검은 화염은 한제의 혼백을 불사르던 남색 화염을 단숨에 제압했다.
“업의 화염!”
2대 주작은 찬 숨을 헉 들이마셨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집념으로 업의 화염을 피우다니. 1대 조상님 외에는 그 누구도 너를 막을 수 없겠구나. 그래, 결국 그런 선택을 하겠다면⋯⋯.”
2대 주작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불바다도 흩어졌으며, 회오리도 결국 무너져 내렸다.
검은 화염이 한제의 온몸을 뒤덮고 점차 남색 화염을 점유해나가 어느새 8할을 차지했다.
“크으윽!”
혼백에서부터 전해지는 끔찍한 고통에 한제는 바르르 떨었다. 고통은 이전보다 수백 배는 더 컸고 그의 혼백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파멸되어갔으며, 육신 역시 빠르게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완을 끌어안은 팔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모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너와 함께한 지난 며칠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허상이라 한들 네가 다치게 둘 수는 없었어.”
한제의 조용한 목소리는 커다란 충격이 되어 모완의 심신을 진동시켰다.
“당신은⋯⋯ 누구죠?”
모완이 멍하니 한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 ★
그 옛날, 모완은 한 마리 나비처럼 한제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무리 움켜쥐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제의 품에서 미련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천천히 늙어가다가 결국 노파가 되어갔다. 그리고 한제는 평생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완은 손을 들어 한제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결국 들어 올리지 못하고 툭 떨어져 버렸다.
감긴 눈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마지막 눈물은 대지에 떨어져 한 송이 꽃을 피워냈지만 그 꽃이 다음 해에도 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어느덧 1천 년이 흘렀다. 1천 년은 수련자에게 아득히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한 사람을 잊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허나 한제의 기억은 흐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의 모든 기억을 똑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제는 그때처럼 모완을 끌어안고 있었다. 비록 허상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한제는 꼭 온 세상을 끌어안은 듯한 기분이었다. 허나 이제 그에게는 힘도 육신도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손은 검은 화염에 불살라져 점점 흩어지다가 결국 투명해지더니 모완의 몸을 통과해 사라졌다.
얼굴 또한 중년 사내에서 순식간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으로 변했다가 투명해졌다. 마치 천 년 전 모완을 잃었을 때와 같았다. 그 역할이 바뀌었을 뿐.
유일하게 한 가지, 몸이 흩어져 사라지고 검은 화염에 완전히 뒤덮인 와중에도 유일하게 한제의 눈에 담긴 부드러운 빛만큼은 그대로였다. 그 눈빛은 점차 멀어져갔다.
모완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한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모완은 소리쳤다. 마음 깊은 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통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업의 화염은 타오르면서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한제의 도심과 기억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
‘업의 화염은 나의 집념을 일으킨 결과다. 난 그 집념으로 일평생 오직 그녀를 위해 수련해왔다. 하늘은 모든 집념을 제거하려 하지만 나의 집념은 이미 업의 화염이 됐다. 하늘이라 해도 그것만을 거둘 수 없어! 만약 이 업의 화염이 단순히 몸을 불사르고 나를 파멸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나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이 화염은 내 평생 가져온 집념이며, 나의 도다!’
한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몰인정한 하늘의 도를 수련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난 집념으로 도를 수련했고 집념으로 업의 윤회를 형성했다. 그러니 내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무엇이 원통하겠는가?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지옥이라 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그 무렵, 업의 화염은 한제를 완전히 파멸시키려 했다. 한데 그 순간, 하늘을 뒤흔들 듯 요란한 주작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캬오오오!”
뒤이어 검은 화염에서 한 마리 주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거대한 주작의 온몸은 남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주작의 울음소리는 온 세상에 퍼져 나가더니 급기야는 인의 환계를 뚫고 대제성을 진동시켰다.
주작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 복숭아를 한 입 깨물던 묘음도존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고 첫 번째 향을 응시했다.
남몽도존의 눈빛 또한 충격이 담긴 기이한 빛으로 번득였다.
‘주작명(朱雀鳴)! 허나 보통의 주작이 아니다. 이건⋯⋯?’
분명 보통 주작의 소리는 아니었다. 하늘이 아니라 저 깊은 지옥에서 울린 듯 거친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운락의 예측에 따르면 저 망할 녀석은 이번 관문에서 죽게 되어 있었는데!’
사묵자 역시 바짝 졸아든 눈으로 첫 번째 향을 노려보았다.
곁에서는 운락의 갸름한 얼굴에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오른쪽 소매에 감춰진 채 빠르게 결인을 그려대던 손도 우뚝 멈추었다. 다섯 손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에 잘려진 것처럼.
2대 주작은 경악한 듯하더니 이내 흐뭇한 표정으로 길게 웃었다. 주작의 울음소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는 단숨에 인의 환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했다.
‘녀석, 결국 업의 화염으로 주작을 형성했군! 이번 난관을 통과하면 구전업겁(九轉業劫)이 일어날 것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
오로지 태황상인만이 여전히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는 듯 도마뱀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 곁에 가만히 선 이천매는 첫 번째 향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의 눈에서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물이 흘러내렸다.
충격적인 변화
그 무렵, 인의 환계에서는 힘껏 날아오른 검은 주작이 날개를 쫙 펼쳤다. 검은 화염으로 둘러싸인 녀석에게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열기가 훅 끼쳐왔지만 인의 환계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모든 열기는 주작의 몸에 응집될 뿐이었다.
주작의 울음소리는 갈수록 격렬해져 이제 심신을 뒤흔들 정도였다.
이 주작은 한제의 혼백으로 형성된 존재였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업의 화염은 곧 업의 윤회를 태울 것이다. 내 주작의 네 번째 각성을 도와라!”
“캬오오오!”
검은 주작이 길게 울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 순간, 몸에서는 검은 화염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횃불에서 주작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집념의 화염으로⋯⋯.”
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주작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화염은 불바다가 되어 사방을 강하게 휩쓸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하늘은 검은 화염으로 완전히 뒤덮였지만 그 아래 인의 환계에서는 어떤 생령도 그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늘을 뒤덮은 불바다는 갈수록 짙어지다가 거대한 파도처럼 하늘을 휩쓸었다.
“향에 불을 붙여라!”
한제의 외침은 주작의 소리가 되어 하늘 끄트머리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하늘을 뒤덮었던 불바다는 바짝 수축해 주작이 된 한제에게 달려들더니 하늘을 꿰뚫을 듯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이 화염 속 검은 주작의 위로 한제가 다시 응집됐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위로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