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07
“헛!”
한제는 경악했으나 도망칠 틈도 없었다.
한데 무궁무진한 자력은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와 그의 체내로 몰려들더니 천역주로 스며들었다.
한제의 체내 가슴팍에 자리한 천역주가 허상의 모습을 드러내더니 회오리가 되어 끊임없이 그 자력을 빨아들였다. 동시에 천역주는 빠르게 빛을 번득였고 그때마다 더 많은 자력을 흡수했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제는 체내에서 쾅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자력을 빨아들이던 천역주가 동시에 한 줄기 힘을 그의 혼백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러자 그의 영혼에서는 수많은 화면이 번득이며 떠올랐다.
각 화면에는 똑같은 물건이 비쳤다. 바로 거대한 나침반이었다.
타락의 땅이라는 이름
우주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나침반 위에는 역시나 거대한 바늘이 하나 달려 있었다. 바늘은 움직이면서 어스름한 빛을 번득였는데 이 빛은 회전하는 바늘을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나침반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구슬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천역주였다.
한제가 이 화면을 보고 있는 이때, 태고 성신 타락의 땅 대제성 밖에서는 무궁무진한 빛이 번득이다가 허상의 거대한 나침반이 되었다. 나침반 안의 대제성은 꼭 바늘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나침반의 바늘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한데 나침반의 정중앙에는 흐릿한 구슬이 번득였고 그 안에 한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바로 한제였다.
대제성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다가 돌연 멈춰 섰다. 대제성 나침반에서 가리킨 곳은 서남쪽이었다. 그리고 대제성에서 한 줄기 어스름한 빛이 번득이더니 서남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 빛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타락의 땅을 떠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달려 나갔다. 도중에 충돌한 모든 것은 수련자든 수련성이든 순식간에 소멸됐다.
그 어스름한 빛은 눈 깜짝할 사이 서남쪽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봉계의 진이 있는 곳이었다.
봉계의 진을 지키던 수천 명의 수련자들은 어스름한 빛이 나타난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하나둘 무너져 내렸다.
허나 어스름한 빛은 멈추지 않고 곧장 봉계의 진과 충돌했다.
꽈르릉!
공간이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봉계의 진에서는 법보의 영혼이 모두 나타났다. 어스름한 빛은 그제야 흩어져 사라졌는데 그것이 봉계의 진에 녹아든 것인지 진을 뚫고 나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제야 대제성을 둘러싼 허상의 나침반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대제성도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편, 지의 환계에서는 천역주가 자력을 지닌 안개를 모두 흡수한 뒤 무궁무진한 자력을 맹렬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까지 빨아들였던 모든 것을 도로 토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천역주는 한제의 체내에 있었기에 그의 몸에서 자력을 지닌 대량의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 안개는 가장 먼저 주작에게 달려들었다.
안개에 휩쓸린 순간 주작은 몸을 바르르 떨었고 모든 실체의 화염이 순식간에 허상의 화염으로 바뀌었다. 한데 허상의 화염은 자력에 휩쓸리면서 매우 기이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형태가 없는 허상의 화염은 모든 감정을 화염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허나 이 화염은 적을 공격할 수는 있지만 수련자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허상의 화염은 멸세(滅世)의 화염으로 수련자의 체내로부터 뽑아낼 수 없다. 그렇기에 실체의 화염을 전환해 얻은 허상의 화염은 수련자가 죽을 때까지 그 양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허상의 화염은 자력을 품은 안개에 휩쓸리면서 1대 주작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변화가 발생했다. 허상의 화염이 생성되는 순간 자력을 한 줄기 흡수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한제가 만들어낸 허상의 화염 속 자력은 천역주에서 방출된 것인 만큼 그 수명도 영원할 터였다.
이 자력은 허상의 화염의 위력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한제는 자력을 통해 세상이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허상의 화염을 흡수할 수 있는 자가 됐다. 비록 지금 한제가 가진 허상의 화염은 많지 않지만 앞으로 끊임없는 흡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양을 가지게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자력을 지닌 안개는 한제의 체내로부터 확산되다가 눈 깜짝할 사이 지의 환계를 가득 채웠다. 그러더니 환계 밖으로까지 퍼져 대제성에 세워진 두 번째 향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무궁무진한 안개는 곧 대제성의 상공을 뒤덮고 퍼지더니 다시 대제성 바깥으로 돌아갔다.
언뜻 보기에는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안개는 분명 달라진 상태였다. 본래 이 안개는 그저 포악할 뿐이었으나, 지금은 일종의 생기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대제성의 모든 수련자는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아래, 반쯤 탄 상태에서 멈춰 안개를 피어 올리던 두 번째 향에서 쩌적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미세한 균열이 하나 생겨나더니 이내 거대한 향을 가득 뒤덮었다.
콰쾅!
무언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향은 중간쯤에서 뚝 잘렸고 타버린 부분은 기우뚱 기울어지다가 시합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적막이 흘렀다.
거북이 등껍질 위의 첫 번째 향은 불이 꺼져 있었고 두 번째 향은 부러졌다.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마지막 향뿐이었다.
한편, 운락 대사의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부러진 두 번째 향이 심신을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눈에 어린 두려움은 더욱 짙어졌다.
‘저자여서는 안 돼. 절대 저자여서는 안 돼!’
곁에서는 사묵자가 입안이 바짝 마른 상태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2대 주작조차 놀라게 할 정도로 예측을 벗어난 모습을 보인 한제에게 깊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 수련자인 내가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한 자를 두려워하다니!’
허나 사묵자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묘음도존은 부러진 두 번째 향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는 손을 휘둘러 또다시 복숭아를 소환해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탐욕으로 번득였다.
‘천역주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주지.’
그 무렵, 남몽도존은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곁에서는 이천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2대 주작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 뭘 어떻게 한 거지? 방금 전의 변고는 분명 녀석과 관련 있을 텐데⋯⋯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뭐, 어쨌든 훌륭하군. 첫 번째 향의 불은 꺼졌고 두 번째 향은 부러졌다. 시험을 계속 진행해도 될지, 과연 어떤 성적을 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사방의 수련자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터뜨렸다.
“두 번째 향이 부러졌어!”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이기에… 첫 번째 향의 불이 꺼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향을 아예 부러뜨린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야!”
“어쩌면 셋째 소제가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
웅성거림 속에서 그들의 시선은 첫 번째 향에 오른손을 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한제에게로 향했다.
한편, 체내로 들어왔던 안개가 모두 방출됐을 때, 한제의 가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천역주는 점차 흐려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의 환계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주작의 몸에서 허상의 화염이 묵묵히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제는 한참 뒤에야 주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작은 곧장 그의 왼쪽 눈으로 녹아들었다. 동시에 한제의 체내에서는 진한 허상의 화염이 발산됐다. 형태도 색도 없는 화염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멸세의 기운을 풍겼다.
탁한 숨을 깊게 뱉어낸 뒤 고개를 든 한제는 먼 곳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결국 떠나는 대신 1천만 리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지의 환계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불바다가 넘실거리던 와중에도 타오르지 않은 민둥산이 있는 곳이었다.
그 위에는 한 사내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한제가 보여준 모습들에 상당히 놀란 상태였으나, 수련이 깊은 자답게 어느새 충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제는 그와 수십 척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주작을 네 번째로 각성시켰다면 며칠 동안은 허상의 화염을 자양시켜야 한다. 유념하거라.”
사내의 목소리에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가 공손히 포권을 했다.
“선배님이 4대 주작이십니까?”
“그렇다.”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한동안 감회에 젖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5대 주작님은 제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4대 주작의 곁에서 약동(藥童)으로 지내던 나날을 잊지 못하셨지요.”
4대 주작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한제는 손을 들어 저물공간에서 석상을 하나 소환했다. 선대 주작성황의 시신으로 만든 석상이었다.
“선대 성황께서는 평생 주작성종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주작이라는 지위에 그분보다 더 잘 어울리는 분은 없을 겁니다!”
한제는 석상을 바라보며 그와 함께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선대 성황께서 주작성종을 위해 힘들어하고 계셨을 때는 선배님도 2대 주작님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백호성황은 전사했고 현무성황은 배반 후 도망쳤으며, 청룡성황은 갇혀 있던 터라 수만 년간 선대 주작성황 홀로 버티셨지요. 그분은 죽을 때까지도 주작성종을 그리고 자신의 스승을 잊지 못하셨습니다.”
한제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제 선배님을 뵙게 됐으니 그분의 시신을 두고 가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분은 이곳에 남기를 원하실 테니까요. 자신의 스승이 있는 이곳이 어쩌면 그분에게는 집과 같이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한제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성황의 시체 아래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세 번 찧었다.
“선대 주작성황님, 당신을 스승님 곁으로 모셔왔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에 보답할 길은 없으나, 당시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몸을 일으킨 한제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4대 주작에게 포권을 했다.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몸을 돌려서는 하늘로 걸어 나갔다.
2대 주작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4대 주작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당시에 떠나지 않았더라면 선대 주작성황은 주작을 네 번째로 각성시켰을 것이고 그런 최후를 맞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편, 4대 주작은 제자의 시신을 바라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깊은 슬픔에 잠긴 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제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노운아⋯⋯ 이 스승이⋯⋯ 참으로 미안하구나.”
4대 주작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성종에서의 일들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다만… 돌아갈 수는 없었어. 내가 태고 성신에 이르렀을 때 변고가 일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자의 봉인이 내게 심어졌단다.”
4대 주작은 깊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순간 폭삭 늙어버린 듯한 그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제자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지난 세월, 몇 번이고 그 봉인을 파괴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대 주작 역시 그 봉인을 풀어주지는 못하셨지. 그래서 나는 이곳… 지의 환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간다면 봉인이 폭발해 나는 심신에 상처를 입고 광인(狂人)이 될 것이다. 제자야, 나는 돌아가지 않았던 게 아니라,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제자의 시체에 떨어졌다. 깊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이 봉인은 내게만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2대 주작님의 몸에도 찍혀 있다. 그분은 애써 그것을 억눌러 지의 환계 밖으로는 나갈 수 있었지만 타락의 땅은 벗어날 수가 없어. 타락의 땅⋯⋯ 이곳은 우리 주작족이 타락하는 곳이다. 미치광이로 타락하거나, 위신이 타락하게 되지.”
4대 주작은 변명하듯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늘을 향해 걸어 나가던 한제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대제성의 첫 번째 향 아래에 선 채 눈을 감고 있던 한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래된 무덤이 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