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16
“별일 없을 거야. 난이한테는 별일 없을 거야, 절대로⋯⋯.”
잠시 후, 완전히 불타버린 마을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덜덜 떨면서 멍하니 마을을 바라보던 소년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난이야! 난이야!”
마을에 들어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짙은 피비린내도 느껴졌다. 붉게 물든 바닥에는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이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어 소년의 마음을 꿰뚫었다. 끔찍한 절망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시체들은 모두 낯익은 이들이었다.
집들도 절반 이상이 타버린 상태였다. 온전하게 남은 것은 꽃가마뿐이었다. 새카맣게 타버린 다른 집들과 꽃가마의 찬란한 색상이 대비되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소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공황에 빠진 채 그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꽃가마 옆의 불타버린 집으로 들어갔다.
시체가 한 구 쓰러져 있었다. 범수였다. 그 곁에는 여인의 시체가 있었는데 범수의 누나인 홍아였다.
이 모든 상황은 소년을 점차 무너뜨렸다. 끊임없이 경련하며 더 안으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여동생을 볼 수 있었다.
거의 다 타버린 방에는 대들보가 몇 개 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하얀 천이 매여 있었다.
그리고 처연한 모습의 누이는 그 천에 목을 매단 상태였다. 옷차림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칠규에는 피가 흥건했다. 채 감기지 않은 동생의 눈은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소년은 동생의 시체를 바라보다 피를 왈칵 토해냈다.
“난이야!”
소년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어둠에 잠긴 마을에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울지 마라, 난이야. 이 오라비, 네게 주려고 보라색 난까지 꺾어왔단 말이다. 그러지 울지 마라. 난이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디 갔느냐고 묻는 것도 벌써 수백 번째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그분들은 아주 먼 곳으로 가셨다고.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난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난이가 시집가는 것도 보실 거라고⋯⋯. 울지 마라, 난이야.”
그의 목소리는 점점 절규에 가까워졌다.
“범수가 싫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돼. 난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홍아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야. 내 꿈은 선인이 되는 거야. 난이야, 기다려라. 선인이 돼서 돌아와 너와 범수가 장수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네 혼인을 위해 이 오라비가 많은 것을 준비했다. 우리 난이를 아무것도 없이 시집에 덜렁 보낼 수는 없지 않으냐.”
소년의 텅 빈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며칠 뒤, 소년은 마을의 모든 시체를 묻었다. 하지만 동생의 시체만은 따로 산 위에 묻어두었다. 아주 높은 데다가 사방에 보라색 난이 피어 있어 그윽한 향이 가득했다. 또한 여기서는 산 너머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볼 수 있었다.
동생은 사내들에게 욕보이고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얀 비단 천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년은 그 비단 천을 품에 넣었다. 동생의 혼이 그 천에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그는 마을을 돌아보며 하얀 천을 꺼냈다. 은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얼른 일어나⋯⋯저길 좀 봐. 보라색 난초야!”
“오라버니,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가셨어? 보고 싶어⋯⋯.”
“오라버니⋯⋯.”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흘러나왔다. 피는 흐르고 흘러 손에 들린 흰 천에 떨어져 꽃 모양으로 퍼져나갔다.
“마방⋯⋯.”
소년의 눈에는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살기와 원한이 배어 있었다.
“오라버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 ★ ★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년이 지났다. 파천종에 들어간 소년의 자질은 비록 최고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뛰어나 특출한 인재로 꼽혔다.
비 내리던 어느 날 밤, 1400명이 넘는 마방이 몰살을 당했다. 그들의 말도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특히 그중 일고여덟 명의 노인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보름을 시달린 후에야 죽음을 맞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죽어서도 평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혼백마저 뽑혀 제련되면서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묵은 여전히 바늘로 가슴을 찔리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동자는 이미 몇 년 전 병으로 죽은 상황이었다. 특히 수혼술을 통해 그자가 별다른 고통 없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마묵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또 백 년이 흘렀을 때 사마묵은 원영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그는 같은 세대 제자들 중 최강자였을 뿐만 아니라 파천종 종주의 눈에 들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다시 파천종을 나온 사마묵은 신통술을 발휘해 여동생을 죽인 주동자의 환생을 찾아 살육했다. 그의 원한이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한제는 말없이 사묵자의 기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수만 년이 흘러 사묵자가 칠채계에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칠채정에 박힌 채 장존에게 끌려간 기억도 보았다.
“나 사마묵은 파천종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그래도 계내의 사람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계외의 개로 살고 싶지는 않다! 어찌 한낱 목숨을 위해,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죽음을 맞겠다!”
“난 너를 살려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 여동생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비록 그녀를 되살릴 수는 없지만 네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할 수는 있지. 혹시 아느냐? 네가 언젠가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면 죽은 이를 살릴 수 있게 될지⋯⋯. 허나 지금 죽어버린다면 모든 기회는 사라진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마묵의 심신으로 전해졌다.
사마묵의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나와 함께 가자. 이제부터 넌 계내의 사마묵이 아니라 이 장존의 사람, 사묵자다!”
한편, 천황로에서는 사묵자의 흐려진 눈이 눈물로 얼룩졌다. 미간의 반짝이는 빛은 점점 확산되다가 곧 그의 정수리까지 뒤덮었다.
이별
천황로 위에 가부좌를 튼 한제는 수만 명의 수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떴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천황로가 돌연 진동하다가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묵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제는 사묵자의 기억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저 몇몇 생각만을 남겨두었을 뿐이었다. 상대를 제련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렸다.
사묵자에게는 아직 많은 법보와 신통술이 있을 테니 어쩌면 제련은 애초에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계속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묵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허공에 떠 있다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여인의 모습이 흩어져 그의 소매 안쪽으로 사라졌다.
강력한 수련자답게 사묵자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한제를 향한 그의 눈빛은 상당히 복잡했다.
“방금 난이가 했던 말⋯⋯ 정말 난이가 했던 거냐? 아니면 네 도술로 인한 거냐?”
“나도 모른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사마묵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여동생이 아닌 모완을 되살릴 기회와 맞닥뜨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한제는 감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답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묵자가 떠났다. 그는 운락과 함께 대제성을 떠나 먼 곳으로 사라졌다.
전투도 그렇게 끝났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2대 주작 역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제의 명성이 타락의 땅 전역에 알려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목격한 것들만으로도 수만 명의 수련자는 한제를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와 대등하게 맞선 강자로 인식했다.
낙생회 장로 선발이 다시 이어졌으나 한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 ★ ★
타락의 땅.
화작족이 유금표와 허이국이 있는 황량한 수련성을 자세히 탐색했다. 그들에게는 대제성에서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화작족은 결국 이 수련성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유금표와 수호령 허이국을 찾아냈다.
끈질기고 힘겨운 전투 끝에 그들에게 사로잡힌 유금표는 비밀리에 타락의 땅 밖으로 보내져 기다리고 있던 화작족 선조와 만나게 됐다.
유금표는 덤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에게서는 일대종사의 풍모와 오랜 시간 권력의 정점에 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위엄이 짙게 느껴졌다.
★ ★ ★
태고 성신. 화작족이 유금표를 붙들어 오는 동안 화작족 선조는 타락의 땅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부족원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화염이 일어난 손을 들어 유금표를 향해 휘둘렀다.
유금표는 전혀 당황한 기색조차 없이 그저 냉랭한 얼굴로 화작족 선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덤덤하고 침착한 눈빛에 화작족 선조의 심신이 진동했다.
‘이 기세와 이 위압감… 주작이 틀림없다!’
그의 손이 그대로 떨어지자 그 안에 깃든 화염의 힘이 유금표의 체내를 휩쓸었다.
“중상을 입고 폐관수련을 하는 틈을 타 기습하다니, 비열한 화작족 답군. 그 점은 선조라 해도 다르지 않구나! 큭큭큭.”
유금표가 냉소했다.
화작족 선조는 눈을 번득였지만 의혹은 사라진 후였다. 상대의 체내에 화염의 힘이 많지 않다는 점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화작족 선조는 유금표의 말에 대답 없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유금표의 손에 상처가 생겨나더니 대량의 피가 흘러나와 공으로 응집되어 화작족 선조의 손으로 끌려갔다.
화작족 선조는 그 피의 공을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더니 화색이 도는 얼굴로 꿀꺽 삼켜버렸다.
뱃속으로 들어간 유금표의 피는 강력한 화염의 힘이 되어 화작족 선조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동시에 그의 뒤쪽으로 화염을 내뿜는 불새의 허상이 나타났다.
날개를 쫙 펼친 녀석의 앞에는 몸집이 약간 작은 주작도 있었으나 그 모습은 흐릿했고 중상을 입은 탓인지 기력도 약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