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21
선택의 그날
“네놈이 어떻게 도망가는지 내 똑똑히 지켜보마!”
장존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외쳤다.
손바닥과 한제 사이의 거리는 7척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위압감에 심신이 잔뜩 짓눌려 원신이 체내에서 빠져나올 조짐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 순간, 한제는 맹렬하게 들어 올린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뒤 고신의 힘을 발휘해 그 위에 팔뚝 보호대를 소환했다. 고신의 뼈로 제련된 고신의 법기였다.
콰쾅!
“큭!”
한제는 연거푸 일곱 차례나 피를 토해냈다.
이 수련성 역시 더 이상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지표면에 대량의 균열이 일어나더니 쪼개지기 시작했다.
한제는 튕겨져 나가 수련성 중심에 떨어지더니 그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태고 성신의 우주로 나온 그의 육신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원신도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고신의 육신을 가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숨을 거두고도 남았을 터였다.
“아직도 살아 있는 모양이군!”
한제를 쫓아 우주로 나온 장존은 다시 한 번 전방을 후려쳤다. 이에 또다시 소환된 손바닥이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면서 빠르게 한제에게 돌진했다.
한제는 빠드득 이를 갈더니 왼손으로 오른손에 착용한 팔뚝 보호대를 누르며 낮게 외쳤다.
“8성급 고신의 구명술, 오래된 비호!”
한제 체내의 고신의 힘이 곧장 오른팔로 몰려들었다. 동시에 우주에 한 줄기 고신의 기운이 나타났다. 미간에서 여덟 개의 반점이 회전하는 고신으로 멀리서 보면 한제 앞에 수련성만 한 고신이 나타난 듯한 모습이었다.
허상으로 나타난 고신에게서는 오래된 기운이 짙게 풍겼다. 몸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면 수많은 전투를 치러온 모양이었다.
고신은 장존과 손바닥을 등진 채 두 팔로 한제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몸으로 한제를 보호하려는 듯.
고신의 품에서 한제는 온기를 느꼈다.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의 품과 같은 온기처럼, 그 품에서는 온 세상이 무너지고 찢겨나가도 안전할 것만 같았다.
장존의 손바닥이 고신의 등을 강타했다.
꽈르릉!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고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이 바위를 내리친 달걀처럼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일이…!”
갑작스러운 광경에 경악한 듯 두 눈이 휘둥그레진 장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금 신통력을 발휘하려 했다. 그리고 그때, 고신이 움직였다. 오래된 비호는 어린 고신에게 주어지는 보호용 신통술로 그 효력은 방어에만 그치지 않는다.
거대한 고신은 뒤로 돌며 곧장 주먹을 날렸다.
쾅!
고신의 주먹은 거대한 운석처럼 장존의 몸에 떨어졌다.
“크헉!”
장존은 창백해진 얼굴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고신의 주먹 한 방에 지금껏 억눌러왔던 부상이 또다시 악화됐다.
그제야 고신의 육신이 흩어지더니 팔뚝 보호대로 다시 응집해 한제의 오른팔 안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한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화작족 성지를 떠나기 전 거둔 붉은 검이 번득이며 장존에게 돌진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한제로서는 실망스럽게도 붉은 검은 튕겨져 나왔다. 어느새 장존이 법보를 꺼내 막아낸 것이다.
사실 한제 역시 버티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터였다.
‘지금은 달아나야 한다.’
결정을 내린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하려 했다. 한데 그때, 장존의 허약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한제, 내 사람이 되어라. 그리 한다면 나는 네 아내를 살려줄 수 있다! 혼만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을 약속하마!”
그 순간,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우뚝 멈추었다.
“뭐라고…?”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멍하니 제자리에 선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크게 흔들렸다.
‘만약 내가 사마묵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여동생이 아닌 모완을 되살릴 기회와 맞닥뜨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상상만 해왔던 그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이 아니다. 1200년 전, 난 이미 네 이름을 들은 바 있다. 평생 수련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 오직 아내의 부활을 위해서라는 것도!”
장존의 허약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거대한 망치처럼 한제의 심신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 충격은 거대한 파도처럼 한제의 머릿속을 휩쓸었고 오직 다섯 글자만이 육신 너머 영혼으로 달려들었다.
아내의 부활!
“수많은 이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누구도 너를 돕지 못했다. 그러니 내 말도 믿기 힘들겠지. 더구나 내가 중상을 입은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중상을 입지 않았다 해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허나 나의 스승님은 원고 선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셨던 분이다. 당시 매우 유명하셨지! 내가 스승님께 부탁드려보마. 영계에 떠도는 혼을 취해 장생 낙인으로 삼는 분이니 네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까지도 되살려주실 수 있을 게다!”
한제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심지어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순간 몸이 바르르 떨리며 피가 왈칵 넘어오기까지 했다.
“네가 내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기만 한다면 나 역시 약속을 지키겠다!”
장존의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그 안에는 깃든 마력은 한제의 심신을 장악했다.
한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전에 없이 강력한 갈등이 비쳤다. 남몽도존의 제안과도 1대 주작의 제안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존의 제안은 그의 마음속 역린을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그 목소리는 한제의 도심에 그대로 떨어져 마치 정중로월처럼 그의 혼을 그대로 건져 올리려 했다.
‘모완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을 때, 한 줄기 희망이라도 갈구해왔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그토록 바랐던 희망이 나타났다. 한 가닥에 불과한 희망이지만 묵직한 추처럼 심신을 압박했고 한제는 삶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뿐만 아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사묵자나 청수, 심지어 청림을 능가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네가 동의하기만 한다면 나는 네게 임상자라는 도호를 하사할 생각이다! 평생 아내의 부활을 원하지 않았느냐? 나의 스승님이라면 능히 해내실 수 있다. 믿지 못하겠다면 먼저 네 아내의 부활부터 부탁드리겠다. 그녀가 부활한 후에 결정을 내려도 좋다!”
한제의 눈에는 초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자의 제안에 응해! 모완이 살아난! 이한제, 넌 평생 그녀만을 위해 수련해오지 않았느냐! 1500년의 이별을 마무리하고 그녀를 만날 수 있어! 게다가 이평까지 만날 수 있다.
장존의 노예가 되어 그의 명을 따르기만 하면 되잖아! 두 번째 사묵자가 되란 말이다! 네 자유가 모완과 이평의 목숨보다 중한가?
그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내와 사도환을 청수 사형을… 계내의 모두를 버리고 그들을 나의 적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언젠가 장존이 내게 사도환을 죽이라 한다면? 청수 사형을 멸하라 한다면? 계내를 파괴하라 한다면? 주일 선배를 주은혜를 대두(大頭)를 비롯한 모두를 죽이라 한다면? 2대 주작님을 시해하라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한제의 얼굴에 비참한 미소가 어렸다. 왈칵 솟은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 고통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모완은 그의 전부이자 역린이다. 그 누구라도 그녀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또한 한제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허나 세상에는 그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그로서는 끊어낼 수 없는 은혜도 있었다.
“앞으로 연혼종은 네게 맡긴다⋯⋯.”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연혼종의 보물인 혼번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전수해주며 이 한 마디와 함께 허허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은 둔천이 떠올랐다.
천역주를 돌려받을 기회조차 버리고 수백 년을 함께해온 사도환은 자신에게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형이자 벗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제도 없었을 터였다. 한제는 그런 사도환에게 진정 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말했다.
“이 이한제는 평생 하늘에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습니다. 오직 사도환만을 공경할 것입니다!”
주일은 치정에 눈이 먼 채 1천 년이 넘는 삶을 살아왔다. 허나 한제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자 좋은 선배였다. 만약 자신이 장존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청상을 따르는 주일과도 반드시 싸우게 될 터였다.
“나 주일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청상과 함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겉모습은 냉랭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청수는 한제를 백범의 계승자로 인정한 후로는 자신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었다.
“누구도 나의 사제를 해하지 못한다.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려 한다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리라!”
청수는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는 슬픔과 분노로 인해 광기에 쌓여 있다. 허나 이는 계외에서 꾸민 모략으로 발생한 것이다.
한데 자신이 그렇게 아꼈던 사제가 자신을 미치게 한 존재인 장존의 개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청수는 더욱 큰 고통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5대 주작은 삶의 끝에 다다른 상태에서도 한제를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작성종까지 넘겨주었다. 그 자애로운 눈빛은 영원히 한제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사성종을 부흥시킬 수 없을 것 같다면 정말로 이 하늘이 우리 사성종을 소멸시키려 한다면⋯⋯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버텨낼 필요는 없다.”
자신이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사성종의 미래 앞에서도 한제의 안위를 걱정하던 모습, 5대 주작이 보인 성황으로서의 의연함은 존경스러움 그 자체였다. 한데 자신이 장존의 사람이 된다면 죽음 앞에서도 주작성종과 자신을 걱정했던 5대 주작의 실망과 분노는 얼마나 클 것인가!
알고 지낸 지는 고작 며칠에 불과했으나 2대 주작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애정이 떠올랐다.
소중한 용의 피를 넘겨주었고 시험 도중 위험이 닥칠 때마다 찾아와 도움을 주려 했으며, 천의 환계에서는 심지어 1대 주작을 향해 호통까지 쳤다. 오로지 한제를 위해서.
그는 한제에게 염룡을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거북이 등껍질 형태인 고혼금을 알려주었으며, 분계고산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이는 1대 주작의 명을 어긴 처사이니 그는 아마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될 터였다.
“네 주작이 네 번째로 각성했으니 넌 이제 주작의 낙인을 주작족 사람 중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 그러니 난 네가 7대 주작을 선택할 때⋯⋯ 그러니까⋯⋯ 훌륭한 자를 골랐으면 한다. 충동적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장존의 노예가 되기로 결심할 경우 잘라낼 뿐만 아니라 적으로 돌려야 할 인연들이…
사묵자의 기억에서 본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분명 사묵자의 기억인데 마치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사묵자는 여동생을 부활시키기 위해 파천종을 버렸고 계내를 버렸으며, 사형과 사제들을 전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버린 사람이다. 장존의 노예가 되어 그를 위해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가 당시의 스승이라 해도 장존의 명이라면 사묵자는 눈물을 머금고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으리라.
만약 사묵자의 기억을 들여다보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한제의 고민은 더욱 커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남몽도존의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더라면 1대 주작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더라면 한제는 2천 년이 넘는 삶에서 마주한 가장 큰 선택 앞에서 더욱 크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허나 사묵자의 기억을 되새긴 한제는 스스로에게 물은 바 있다. 만약 내게도 언젠가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허나 그런 날이 이토록 빨리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축복이자 재앙과도 같은 날이었다.
다행이라면 사묵자의 기억은 한제에게 길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는 과연 정말 장존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