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25
잠시 후, 한제의 눈빛이 결의로 번득였다. 그는 위험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삶을 살아온 자였다. 이번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의 삶에서 다시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구나 위험한 곳일수록 얻게 될 행운과 보상도 더 큰 법이었다.
한제는 한층 신중한 얼굴로 곧 안개 깊은 곳을 향해 돌진했다.
‘어쨌든 나는 고신이니 다른 자들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터!’
한제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반대로 표정은 점점 신중해졌다. 평생 숱한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게 해준 신중함이었다.
단 한 번, 이 신중함을 뒤로 미뤄두고 다소 경솔하게 행동했던 것은 3대 주작일 것으로 보이는 자와의 싸움뿐이었다. 그건 그저 1대 주작과 대화를 하던 도중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천운자의 혼을 이용해 예측까지 한 뒤에야 정말 그곳에서 장존이 폐관수련을 하고 있다면 아직 중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면 옥패를 가지고 계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 결과 거의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허나 화작족 성지에서 도망쳐 나온 뒤 한제는 자신이 만났던 자가 정말 장존인지 의문을 갖게 됐다. 동시에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운 의혹이 떠올랐다.
‘내가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 걸까?’
안개에 뒤덮인 지금 그의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힘이 안개에 휩쓸린 뒤로 완전히 제거된 것만 같았다.
장존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으로 고개를 홱 돌려 뒤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를 응시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한 그의 눈은 안개 너머 잠잠한 태고 성신에 닿아 있었다.
한참 뒤 시선을 거둔 한제의 눈에는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 평생 느껴본 적이 거의 없는 감정이었다. 어째서인지 태고 성신에 이른 뒤 자신이 해온 모든 일들이 마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된 탓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나 그의 눈에서는 곧 두려움이 사라졌다. 대신 눈빛은 싸늘하게 변했다.
‘분명한 건, 저 오래된 무덤에 들어가고자 하는 결정은 누군가의 조종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안개 깊은 곳에 가까워질수록 몸부림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의 미간에는 하나같이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37, 45, 71⋯⋯.’
시야에는 저 멀리 한 줄기 균열이 들어왔다.
균열 속 세상에는 안개가 없었지만 곳곳이 왜곡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제는 그 안에 떠 있는 암석 조각들과 그 위에 놓인 흉측한 머리들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무덤!’
한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곧장 균열로 들어가려 했다. 한데 그때, 돌연 사방에서 안개가 몰려들었고 한제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다.
그의 뒤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안개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다가왔다. 중년 문인으로 보이는 그는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웠고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는지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의 몸은 아홉 개의 기이한 조각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조각상들의 표정은 분노, 기쁨, 슬픔 등 아홉 가지 각기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또한 조각상들이 여인처럼 아름다운 문인의 곁을 맴도는 동안 옅은 노란색 기운을 발산했는데 그 기운 덕분에 문인은 강력한 힘을 품은 안개 속에서도 무사했다.
문인의 미간에도 숫자 낙인은 없었다. 그는 한제를 본 순간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한제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대를 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상대가 이 기이한 안개 속에서도 여기까지 산책하듯 걸어왔기 때문이다.
잠시 문인을 살피던 한제는 이내 몸을 돌려 균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도우,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문인의 입에서는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태고 성신. 무궁무진한 우주 속에는 거대한 궁전 하나가 표류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누구도 찾을 수가 없었다.
촛불이 몇 개 켜져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빛이 턱없이 부족해 궁전 안은 약간 어두웠다.
궁전 바닥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우물의 수면은 거울처럼 맑고 매끈했다.
검은 도포로 몸을 완전히 감싼 사람이 우물 옆에 묵묵히 서서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면에는 세 개의 촛불과 백발의 인영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그 인영은 다름 아닌 한제였다.
한데 한제의 인영은 봉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세 덩어리의 촛불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한제가 짙은 안개에 뒤덮인 순간, 우물 수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힘에 방해를 받은 듯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한제의 모습은 왜곡되다가 결국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오래된 무덤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내 계획이 어그러지다니, 아쉽구나. 정중로월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는데…”
검은 도포로 온몸을 감싼 사람이 거친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러더니 그는 오른손을 들어 비쩍 마른 손가락 끝에 달린 구부러진 손톱을 수면 위로 뻗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닿으려던 순간, 수면에서 돌연 한 줄기 짙은 남색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노인의 손가락과 충돌했다.
충돌로 인한 소리는 없었다. 허나 고리 형태의 파문이 확산돼 한 줄기 충격으로 퍼져 나가면서 노인의 검은 도포가 나부꼈다.
“네가 그자의 몸에 남겨둔 정중로월이야 무시할 수 있다. 허나 만약 네가 그자를 죽인다면⋯⋯.”
수면을 뒤덮은 남색 빛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움직일 것이다.”
검은 도포의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넌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허나 네 부상을 더 악화시킬 수는 있지.”
남색 빛 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검은 도포의 노인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한 게 있을 텐데? 당시 넌 나의 공격을 원했고 그래서 난 이미 그 뜻에 따라 주었다. 네 아내의 몸을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것이냐? 설마 네가 태고 오존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노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색 빛 안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곤한 기색을 품은 채 다시 울려 퍼졌다.
“그 이전에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짧은 적막이 흐른 후, 다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한 번만⋯⋯.”
그 목소리에 검은 도포의 노인은 몸을 돌리더니 대전 안 깊은 곳으로 향했다.
우물 속의 남색 빛도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 ★ ★
한제는 자신을 부르는 아름다운 목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곧장 균열 안으로 향했다.
균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주변의 안개가 왜곡됐고 곧 한제는 한 조각의 기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중년 문인이 흠칫 놀랄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한제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누구인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미간에 숫자도 새겨지지 않은 채 이곳까지 직접 걸어온 그 문인은 한제가 보기에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 자와는 가능한 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도와주면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더라도 한제는 망설임 없이 떠났을 터였다.
지금의 그는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고 또렷했다. 그리고 이런 맑은 정신은 그의 위기감을 더욱 부추겼다.
태고 성신에 들어온 후의 행보를 떠올릴수록 한제는 과거의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모종의 힘이 체내로 스며들어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조종해왔던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써늘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한편 기이한 청년이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던 중년 문인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는 지금 오래된 무덤의 균열로부터 1천 척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모든 수준과 법보를 발휘한다 해도 더 이상 나아가기란 불가능했다.
사방의 안개가 폭주하듯 거칠게 피어오르는 와중에 중년 문인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아하니 본체의 몸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한 모양이군. 저 녀석의 미간에도 오래된 무덤의 표식은 없었어. 그러니 아마도 내 상상 이상의 존재일 터. 탁삼을 제외하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일곱째의 분신에 죽임을 당한 또 다른 고신밖에 없을 텐데⋯⋯.’
눈을 번득이던 중년 문인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그를 에워싼 아홉 개의 조각상이 한층 밝게 번득이면서 그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셋째, 넷째
잠시 후, 안개 속의 밝은 빛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는 허리에 이르렀고 백의로 감싸인 몸은 약간 투명해 그 안을 흐르는 아홉 갈래의 빛이 들여다보였다.
여인이 나타난 순간, 안개는 콰쾅 소리와 함께 그녀의 체내로 몰려들었다. 이어서 여인의 미간에는 옅은 낙인이 하나 나타났다.
한숨을 폭 내쉰 여인은 가볍게 한 걸음 내딛어 오래된 무덤의 균열로 향했다.
그녀가 균열 안으로 진입하자 안개 속의 빛은 흩어져 사라졌고 그 안에서 나타난 중년 문인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까 그 녀석은 고신의 몸을 가졌더군. 한데 정중로월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태고 성신에서 그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 어쩌면 아까 그와 나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첫째 누이와 여덟째는 실종된 지 여러 해. 둘째 누이는 이미 합작할 사람을 찾았고 여우같은 넷째는 탁삼을 노리고 있지. 다섯째는 몸을 빼앗아 남몽도존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빨리 합작할 사람을 찾지 못하면 난 혼자 남게 될 텐데⋯⋯.’
중년 문인은 고민에 빠진 채 안개를 헤치며 빠져나가던 중, 그는 돌연 눈을 번득이더니 우뚝 멈춰 서서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꿈틀거리는 안개 속에서 낮은 포효가 어렴풋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거친 기운이 확산됐고 이내 광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가 요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알아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이 망할 것, 제발 좀 닥치란 말이라!”
뒤이어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매혹적인 소리였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렇게 날뛸수록 더 마음에 드는 걸? 너랑 함께하는 게 그 쓸모없는 선존과 함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
순간 거의 수련성만큼이나 거대한 몸뚱이 하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 거대한 몸뚱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탁삼이었다.
이때 탁삼의 두 눈은 광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어 더욱 포악해 보였다. 끊임없이 포효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곧 중년 문인의 앞쪽을 스쳐 갔다.
“고고하신 셋째 아니야? 왜? 그 수준으로는 오래된 무덤에 들어갈 수 없는가 보지?”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탁삼의 미간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