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29
스무 개가 넘는 암석 조각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빠르게 안개 속을 질주했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오래된 무덤에 대한 신비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이곳을 자세히 관찰해왔다.
‘너무도 기이한 곳이다. 모든 것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겠어.’
안개 바다에는 끝이 없어 그 깊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암석 조각들이 질주하는 사이 한제는 그 안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자신들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 들어온 수련자는 적지 않아. 허나 뿔뿔이 흩어졌지. 어쩌면 다른 곳으로 보내진 이들도 이런 식으로 이동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시간이 흘렀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 왔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한데 어느 순간, 한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여전히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지만 약간 왜곡되어 있었다. 그러나 뭔가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암석 조각들이 안개를 뚫고 들어갔다.
순간 광경이 완전히 바뀌었고 수련자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은 봉인되어 아주 오랫동안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곳 같았다. 길이가 수백만 척에 달할 정도로 넓었고 온통 붉은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붉었고 심지어 짙은 피비린내까지 풍겼다.
가장자리는 왜곡된 공간의 균열로 이루어져 있어 완전히 밀폐된 거대한 우리와 같았다.
한제를 태운 암석 조각은 그중 하나의 균열을 통해 진입했다.
공간의 중앙에는 키가 수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고신이 있었다. 험악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은 고신의 미간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무릎은 새카만 뼈가 다 들여다보였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 무릎이 부서지면서 억지로 꿇어앉은 모양이었다.
고신의 굽은 등에는 길이가 1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암석 조각이 얹혀 있었다. 이 암석 조각 또한 전체적으로 붉었는데 짙은 피 안개로 둘러싸여 있어 그 안쪽은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다만 뭔가를 봉인하고 있는 듯 번득이는 강력한 금제들만은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고신의 오른편에서도 키가 4천여 척에 달하는 고마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수리에 하나의 뿔이 달린 고마 역시 표정이 험악했고 왼쪽 눈에는 광기와 분노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뽑힌 것처럼 텅 빈 오른쪽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고신의 반대쪽에는 키가 3천 척 정도 되는 고요가 있었는데 역시 무릎을 꿇은 채였다. 고요는 왼쪽 눈이 뽑혀 있었는데 남은 오른쪽 눈에는 짙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고요와 고마는 고신이 등에 짊어진 암석 조각을 향해 절을 하듯 꿇어앉은 상태였다.
심신이 진동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정작 수련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대지에 피처럼 흐르는 개울 근처의 빽빽한 인영이었다. 고개를 쳐든 그들은 붉은 두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좀 전에 마주친 것과 같은 흉수들이었으나 수만 마리에 달해 봉인된 이곳의 대지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었다.
“키야아앗!”
“캬오오오!”
짧은 적막이 흐른 뒤, 흉수들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수만 마리의 흉수가 동시에 내지르는 소리는 강력한 파도처럼 수련자들을 휩쓸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지 않은 수련자들은 그 위력에 휩쓸리면서 피를 토해냈고 급기야 두 명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또한 그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수백 마리의 흉수기 달려들어 두 수련자를 눈 깜짝할 사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뒤이어 흉수들은 남은 수련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제 흉수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파악한 수련자들은 두려움보다는 탐욕을 느끼며 흉수들에게 맞섰다.
‘저 녀석들을 전부 집어삼키면 완벽히 회복할 수 있겠어!’
한제 역시 눈을 번득이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의 앞으로는 벌써 열 명이 넘는 수련자들이 튀어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저자가 모든 이득을 가로채려 한다면 그때는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저자를 죽이겠어!’
특히 성격이 거친 몇몇 수련자는 서로 눈빛을 통해 암묵적으로 연합한 상태였다.
“백발 도우, 자네는 열 마리만 죽이게. 그 이상을 넘본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세!”
주판을 쥔 비대한 몸집의 수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마리라도 더 죽이려 했다가는 너 또한 죽을 것이다! 누구도 너를 돕지 않을 게야!”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던, 비쩍 마른 검은 도포의 수련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거대한 물고기의 허상을 소환한 보라색 도포의 사내와 얼굴에 혹이 가득한 녹색 도포의 노파, 술동이를 든 중년 사내 역시 주판을 쥔 사내와 나란히 달리며 살기를 뿜어냈다. 자신들이 연합했음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한제가 행동에 나설 수 없게 하려는 심산인 듯했다.
아마도 한제가 혼자서 모든 흉수를 차지해버린 일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나머지 수련자들의 눈에도 대부분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한제를 적대시하는 수련자들을 본 봉멸족 소녀는 순간 기쁜 듯 웃었으나 한제의 강력함을 떠올리자 기쁨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한편, 한제는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낸 수련자들을 보면서도 싸늘한 눈빛으로 코웃음을 쳤다. 왼쪽 눈에서 허상의 화염이 이글거리는가 싶더니 그는 갑자기 속도를 내 앞서 출발한 수련자들을 앞질러버렸다.
“방만하기가 이를 데가 없군!”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예상치 못한 한제의 행동에 수련자들은 격노해 강력한 살기를 발산했다. 심지어 신통술로 한제를 공격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한데 그때, 수만 마리 흉수들과 수련자들 사이에 선 한제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콰르릉!
가벼운 손짓에 온 세상이 콰쾅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뒤이어 달려들던 흉수들의 체내에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흉수들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짧은 손짓 한 번에 1천 마리에 달하는 흉수가 불타 사라지더니 하나하나 화염공이 되어 죽어갔다. 이어서 하얀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올라 한제에게 흡수됐다.
끝이 아니었다. 흉수를 소멸시킨 허상의 화염이 이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더 많은 흉수들을 불태웠고 이에 더욱 커진 화염은 곧 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콰쾅! 쾅!
요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어느새 수만 마리의 흉수 중 절반이 불타올라 화염공이 됐고 불바다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줄기줄기 하얀 기운이 한제에게로 흘러들어갔다.
한제는 그 무궁무진한 생기를 원신으로 흡수했고 그의 부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갔다.
머지않아 모든 흉수가 불길에 휩싸였고 더 많은 생기를 흡수하던 한제의 몸은 어느 순간 완전히 회복됐다.
콰르릉!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흉수가 소멸했다. 동시에 널리 퍼져 있던 허상의 화염이 사방에서 몰려들더니 한제의 왼쪽 눈으로 돌아왔다.
“그래, 열 마리 이상 죽이면 나를 어쩌겠다고 했지?”
한제는 수련자들을 향해 천천히 돌아서더니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왼쪽 눈에서는 아홉 빛깔의 허상의 화염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허… 허상의 화염…”
“이럴 수가! 수만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전설 속의 수련자라니!”
“손짓만으로 수만 마리의 흉수를⋯⋯.”
소문으로만 들었던 허상의 화염의 수련자를 직접 목격한 그들은 심신에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한제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특히 한제에게 살기를 숨기지 않았던 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내내 덤덤했던 백의의 여인마저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적막 속에 수련자들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적의 등장
한제의 냉랭한 눈에는 뒷걸음질 치는 수련자들의 체내에서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의 변화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저들 모두를 불태워 죽이거나 최소한 큰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오래된 무덤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저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할 생각일 뿐이었다. 게다가 저들 중 몇몇은 수준을 예측할 수조차 없었는데 자신이 너무 압박한다면 그들이 서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건 한제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흉수를 열 마리 넘게 죽인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제는 몸집이 비대한 수련자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수련자는 몸을 덜덜 떨었는데 심지어 볼살까지 파르르 떨렸다.
‘허상의 화염의 수련자를 몰라보고 위협했다니! 이런 멍청한!’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말끔히 불살라질 것이다.
한제는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무언의 압박에 몸집이 비대한 수련자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심지어 체내에서 한 덩어리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만 한 비늘 하나를 꺼내 공손히 한제에게 바쳤다.
“제가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것은 이곳의 암석 조각에서 찾아낸 것인데 사과의 뜻으로 드리겠습니다.”
한제는 가만히 허공을 움켜쥐어 그 비늘을 거두더니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또한 내게 살기를 내뿜었지?”
이번에 한제의 시선을 받게 된 자는 흑의의 수련자였는데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곧장 포권을 하더니 검은 비검 하나를 소환했다. 주위를 맴도는 한 줄기 마기로 둘러싸인 비검이었다.
“내… 내가 경솔했네. 부디 괘념치 말아 주시게.”
검은 옷의 수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며 비검을 한제에게 건넸다.
비검을 받아 든 한제는 말없이 상대를 한참이나 살폈다. 상대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분명 감정의 파동이 느껴졌지만 명확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미간에는 마치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는 듯했는데 그가 감은 눈을 뜨는 순간 그 무언가가 폭발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제는 이내 거대한 물고기 허상을 뒤에 둔 보라색 도포의 사내에게로 옮겨갔다. 상대는 이미 자기 차례임을 예상하고 있던 듯 얼른 쓴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하더니 말없이 조롱박 모양의 보물을 꺼내 공손히 바쳤다. 암석 조각 위에서 얻은 보물이었다.
‘섣불리 경거망동했으니 이곳에서 얻은 첫 번째 보물로 값을 치러야지.’
그는 씁쓸함을 삼키며 자신의 어리석었던 행동을 후회했다.
이번에 한제의 번득이는 눈빛이 향한 곳은 녹색 도포의 노파였다. 이곳에서 가장 기이한 신통술을 발휘하는 그녀에게서 한제는 여태까지 아무런 실마리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노파의 체내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감정을 아주 깊은 곳에 숨겨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노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사스러운 눈빛을 번득이며 망설였다. 그러자 한제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녀의 코앞에 이르렀다.
“헛!”
표정이 급변한 노파는 다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주위를 왜곡시켰다.
한제는 그 왜곡으로 파고들며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꽈르릉!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짧은 순간에 한제와 노파의 원력이 허공에서 수십 차례 충돌하면서 점점 격렬해졌다. 동시에 충돌로 인해 원력의 폭풍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었다.
“큭!”
사람들이 재빨리 물러나던 그때 노파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더니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후퇴했다.
그 순간, 한제가 두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세월을 담은 이 손짓에 따라 한제의 심신에서는 풍의 선계의 황량한 돌문이 나타났고 이 봉인된 공간은 황량하고 오래된 기운으로 가득 채워졌다. 동시에 그 기운은 노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