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30
노파의 표정이 급변했다. 한제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치 못했다. 더구나 지금 저 신통술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 결인을 그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입에서 분홍색 안개를 뿜어냈다.
그 순간, 기이한 향이 풍겼다. 한제는 눈앞이 이지러지면서 환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노파의 모습은 흐릿해졌고 그녀의 뒤로 여러 허상이 떠올랐다. 모두 한제에게 익숙한 이들의 허상이었다.
한편, 주위의 수련자들 또한 눈빛이 멍하게 변해갔다. 이 순간 그들의 눈에는 녹색 도포의 노파가 매우 친숙한 사람으로 한제는 그런 친숙한 사람을 죽이려는 자로 보였다. 당연히 그들은 분노했다.
‘태고 성신 3대 기족(奇族) 중 하나인 봉환족(封幻族) 출신이로군.’
봉멸족 소녀가 놀란 눈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사방의 수련자들이 홀린 듯한 모습으로 분노를 드러낸 그때, 한제가 앞으로 뻗었던 손가락과 분홍색 안개가 충돌했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격렬하게 울려 퍼지더니 분홍색 안개는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고 한제의 손가락은 노파의 미간에 닿았다.
“크악!”
노파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튕겨나가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동시에 체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감정도 격하게 폭발해 허상의 화염으로 활활 타올랐다. 또한 미간의 낙인은 그대로 소멸하더니 대신 보일 듯 말 듯한 그림자 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허상의 화염 속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수련자들의 눈에 드러났던 멍한 빛이 사라지더니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변했다가 이내 경악했다.
“봉환술(封幻術)!”
“저 노파가 3대 기족 중 하나인 봉환족 사람이란 말인가!”
한제는 말없이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의 공격은 노파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의 기이한 신통술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답을 얻은 지금 한제는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노파의 몸에서 피어올랐던 허상의 화염 또한 빠르게 흩어져 그녀의 체내에서 하나의 불씨로 응축됐다. 그녀의 몸에 심어진 일종의 금제였다.
타오르던 허상의 화염에서 벗어난 노파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오래된 무덤에서 얻은 법보를 꺼내 바쳤다.
한제에게 살기를 드러냈던 나머지 수련자들도 각자의 법보를 꺼내 건네면서 용서를 구했다. 봉멸족 소녀 역시 잔뜩 겁을 먹은 채 법보를 바쳤다.
오직 한 사람, 백의의 여인만이 미소를 띤 채 한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훌쩍 날렸다. 그녀가 올라타 있던 암석 조각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봉인된 이곳에도 보물은 있을 터. 난 떠나겠네. 언젠가 이 무덤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여인은 암석 조각과 함께 점점 멀어져가다가 여러 균열 중 하나를 통해 사라졌다.
한제는 말없이 그녀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수련자들은 무릎을 꿇은 고신과 고요, 고마를 바라보았다. 특히 고신이 짊어진 1만 척 길이의 암석 조각이 짙게 드리운 붉은 안개로 둘러싸인 것을 보면서 그 안에 굉장히 강력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한데 말없이 고신을 바라보던 한제가 갑자기 급변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하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콰쾅!
갑자기 울려 퍼진 요란한 소리에 다른 수련자들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가장자리의 여러 균열 중 하나를 통해 아홉 개의 거대한 암석 조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있군! 모두 이곳에서 얻은 법보를 내놓고 비켜서라!”
음산한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이 공간의 균열까지 찢어버릴 듯 위압감을 내뿜으며 아홉 개의 암석 조각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각 암석 조각 위에는 한 명씩, 총 아홉 명의 수련자가 서 있었다.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그중 일곱은 노인이었고 나머지 둘은 40대 정도였다. 아홉 명 모두 하나같이 음침하고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고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기도 했다.
아홉 개의 암석 조각은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고 심지어 수많은 혼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혼백들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날카롭게 울부짖고 있었다.
‘다섯은 네 번째 천쇠, 둘은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르렀군.’
개중 가장 눈에 띄는 자는 머리가 피로 물들인 것처럼 붉은 노인이었다.
미약한 향불의 힘이 풍기는 것을 보면 세 번째 단계에 발을 살짝 들인 모양이었다.
말없이 서 있는데도 강력한 위압감을 풍기는 것으로 보아 태고 성신 내에서도 제법 지위가 높은 인물인 듯했다.
마지막 한 사람은 깃털 부채를 쥔 중년 문인이었다. 가늘게 뜬 눈에서는 빛이 번득였다. 수준은 세 번째 천쇠 정도에 불과했지만 결코 만만한 자는 아닐 터였다.
그들이 올라탄 암석 조각 사이에는 한제 등이 타고 있던 1만 척 정도의 암석 조각에 비해 두 배나 큰 것이 하나 섞여 있었다. 그 암석 조각 위에는 세 번째 단계에 반 발짝 정도 들인 붉은 머리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2급 암석 조각도 차지하지 못한 주제에 감히 이곳의 보물을 탐하려 하다니!”
적발(赤髮) 노인이 경멸어린 눈으로 한제 등을 훑어보았다.
한제는 신중한 눈으로 그 노인이 올라탄 암석 조각을 살폈다. 다른 수련자들도 그 노인의 강력함을 직감했는지 말없이 한제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자연스레 한제를 우두머리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노인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한제를 내려다보았다. 함께 나타난 여덟 명의 수련자도 살기 어린 눈으로 음산한 기운을 발산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세 번째 천쇠 수준에 불과한 중년 문인이 돌연 앞으로 나서더니 노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노인이 흠칫 놀라더니 가만히 주위를 살폈고 다시 한제를 포함한 수련자들을 훑어보았다.
“너, 이리 와라!”
적발 노인은 한제 곁에 선 수련자를 가리켰다. 노인에게 지목된 수련자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앞으로 나서더니 노인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영동상인을 뵙습니다.”
“허! 나를 알고 있구나!”
“영동상인의 이름이야 태고 성신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수련자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말을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겠지? 저 고신의 등에 드리운 봉인을 풀어라. 성공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영동상인의 느릿한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지목된 수련자는 갈등하는 듯하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신통술을 발휘하더니 고신이 짊어진 암석 조각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서 이를 악물더니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순간 그의 앞에 나타난 허상이 안개로 돌진했다.
콰쾅!
허상과 안개가 충돌한 순간, 안개 내부에서부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안개가 커다란 입처럼 넓게 퍼져 나가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그 수련자를 덥석 집어삼켰다.
“끄아악!”
도망칠 틈도 없이 안개에 삼켜진 수련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길게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역시 도령(道靈)이었군! 몇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발 노인이 씩 웃더니 곧장 안개 근처에 이르렀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바닥이 안개에 떨어진 순간, 안개는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격렬하게 꿈틀거리더니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암석 조각
콰쾅!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인은 급변한 얼굴로 수백 척이나 밀려난 뒤에야 멈추었다.
“최소 6품! 안타깝게도 금제가 걸려 있군.”
“고혼금입니다!”
부채를 쥔 중년 문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곁에 있던 푸른색 도포의 노인이 뭔가를 알아차린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고혼금이라⋯⋯. 난 금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해제할 수 있나?”
영동상인은 고신이 짊어진 암석 조각과 그것을 에워싼 붉은 안개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것이⋯⋯ 2할 정도의 확신밖에는⋯⋯.”
중년 문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2할이라고?”
영동상인의 미간이 팩 구겨졌다.
한편 한제는 말없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붉은 안개에서 금제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 금제는 분명 고혼금이었지만 그 안에는 다른 금제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해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저 아홉 명의 수련자가 저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영동상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고 있던 그때,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상인, 저는 저 금제를 해제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한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영동상인을 바라보았다.
“네가 저 금제를 풀기만 한다면 도령을 제외한 무엇이든 저 안에 있는 것들을 넘겨주마. 또한 저자들이 손에 넣은 오래된 무덤의 법보 중 절반도 네게 줄 것이다!”
영동상인의 말에 푸른 도포의 노인은 흡족한 듯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전 어렸을 때부터 금제를 익혀온 사람입니다. 금제에 있어서는 소정 도우도 저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말에 부채를 쥔 중년 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고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금제를 익히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푸른 도포의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오만하게 말했다.
“하하하! 그래, 내 가르침을 주겠네. 금제는 진법의 본원과 다름없지. 난 금제를 거의 1만 년간 연구해오면서 대도에 대한 실마리를 파악했고 또 스스로 수많은 금제 해제법을 창조해냈지. 사실 저 안개 속 금제는 고혼금이 아니야. 난 고혼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네!”
그는 끊임없이 떠들면서 붉은 안개 근처로 다가가더니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금제에서 빛이 번득였고 동시에 거대한 문양이 나타났다.
금제로 이루어진 문양은 밝은 빛을 번득이면서 붉은 안개에 대항하려는 듯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동시에 붉은 안개에서 울려 퍼지던 우렁찬 소리는 뚝 끊겼고 문양에서 일어난 광풍에 안개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의기양양해진 고 노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대한 문양이 곧장 붉은 안개로 돌진했다.
“하앗!”
푸른 도포의 노인이 고함을 내지른 순간, 문양과 붉은 안개가 충돌했다. 한데 바로 그때, 붉은 안개가 거대한 입처럼 벌어지더니 달려들어 단숨에 문양은 물론 푸른 도포의 노인까지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