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33
물론 그렇게 놔둘 한제가 아니었다. 번개 문양을 내보낼 때부터 준비하고 있던 그는 왼쪽 눈에서 아홉 빛깔의 화염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이 실체의 화염은 아홉 빛깔 화염의 폭풍이 되어 영동상인에게 돌진했다.
“화염의 본원까지! 넌 대체 누구냐!”
영동상인은 경악하면서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고 원신의 기운을 한 움큼 내뿜었다. 이 원신의 기운은 산과 바다를 그린 그림이 됐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의 끄트머리에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뒤이어 영동상인은 화염 폭풍과 충돌하려는 순간 낮게 외쳤다.
“해일!”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그림 속의 바다가 흘러나오더니 높이 1천 척의 파도가 되어 화염 폭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화염 폭풍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바다 역시 완전히 증발해버린 상태였다.
이제 영동상인의 그림에 남은 것은 산뿐이었다.
“쿨럭!”
한제는 피를 토해내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두 눈은 광기와 투지로 번득였다.
‘저자가 빠져나오게 둘 수는 없다. 그전에 죽여야만 한다!’
그 무렵, 영동상인이 안개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겨우 30척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산사태!”
그는 뒤쪽에서 포효하며 다가오는 4품 도령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한제를 노려보며 그림 속의 산을 소환했다. 거대한 산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그때, 한제의 두 눈이 빛나더니 이글거리는 화염과 번득이는 천둥번개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미간에서 융합된 화염과 천둥번개는 눈 깜짝할 사이 한 줄기 불타는 번개가 되어 거대한 산을 향해 유성처럼 달려들었다.
“천둥번개의 본원이여, 화염의 본원이여, 융합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라!”
콰쾅! 콰르릉! 쿵!
불타는 번개와 산이 충돌한 순간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강력한 기세를 품은 그 소리에 안개마저 뒤로 밀려났다.
콰르르!
산이 무너져 내렸다.
“마, 말도 안…”
영동상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 역시 강력한 기세에 가로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한편 한제는 굳건히 버티고 서서 싸늘한 눈으로 안개 속 영동상인을 가리키며 낮게 외쳤다.
“타올라라, 허상의 화염!”
그 순간, 충격에 휩싸여 있던 영동상인의 체내에서 허상의 화염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너무나 갑작스레 나타난 화염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영동상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비참한 비명이 이어졌고 그가 토해낸 피마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동시에 애써 억누르던 체내의 금제까지 폭발했다.
“빌어먹을! 허상의 화염이라니!”
영동상인은 온몸이 불살라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기어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단 20척이면 안개를 벗어날 터였다.
그는 이를 갈며 양손을 휘둘렀다.
“열려라, 영동대마계(靈動大魔界)! 나의 향불로 영동족(靈動族)의 마신(魔神)을 소환한다!”
그 순간 안개 밖에 거대한 균열이 하나 나타나더니 짙은 마기를 뿜어냈다.
위기를 느낀 한제는 곧장 고식엽을 소환했다. 균열을 봉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바로 그때, 또 다른 고식엽이 영동상인의 손에서 나타났다. 두 고식엽이 서로 충돌하고 뒤섞여 서로를 봉인하며 굴러갔다.
봉인의 위기를 피한 거대한 균열에서 거대한 검은색 조각상이 하나 나타났다. 일전에 영동상인이 허상으로 소환해냈던 조각상과 똑같았으나 훨씬 실체에 가까웠다.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던 조각상의 두 팔이 돌연 진동하더니 스르륵 풀렸고 동시에 한제를 향해 파멸적인 힘을 발산했다.
한제는 강력한 위기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가 가진 고신의 육신도 저 힘 앞에서는 버텨내기 힘들 것만 같았다.
위기의 순간, 한제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휘둘러 고신의 팔목 보호대를 소환했다.
“오래된 비호!”
찰나의 순간,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고신의 허상이 나타났다. 고신은 상처 가득한 몸으로 한제를 끌어안은 채 모든 공격을 막아주었다.
콰쾅!
천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조각상에서 발산된 파멸적인 힘이 고신의 등을 강타했다. 그럼에도 고신은 유유히 그 힘을 견뎌내더니 거대한 몸을 홱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두 번째로 보는 광경이었지만 고신의 자태와 따뜻함에 한제는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신의 거대한 주먹이 꽂히자 조각상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동시에 그 충력의 여파는 막 안개를 빠져나오려던 영동상인까지 휩쓸었다.
“크아악!”
영동상인은 연거푸 피를 토해냈고 그의 몸은 다시 안개 속으로 밀려났다.
고신의 허상이 흩어져 사라지는 동안 한제는 결인을 그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정이 남겨둔 세 개의 옥패가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며 그의 손으로 들어갔다. 옥패에 의지해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붉은 안개가 꿈틀거리면서 맞물리기 시작했다.
“안 돼!”
영동상인은 다급히 포효하며 몸을 날렸다. 뒤에서 달려들던 4품 도령이 이미 그의 코앞까지 와 있는 상태였다.
한제는 오른손을 뻗어 안개 속의 영동상인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외쳤다.
“정(定)!”
정신술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상대가 알아차리기 전에 써야 그 위력이 극대화됐다.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필살기로 간주될 만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 그게 바로 한제의 전투 원칙 중 하나였다. 소정의 옥패를 미리 거두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만약 미리 거두었다면 영동상인은 수명을 갉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강력한 신통술을 발휘해 안개를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제가 입을 피해 또한 커졌을 터였다.
결국 한제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려 옥패를 거두고 정신술을 발휘해 영동상인을 완전히 안개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깔끔한 승리였다.
한제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자 수없이 많은 금제가 붉은 안개에 떨어졌다. 그 안에서는 우렁찬 포효와 비명이 울려 퍼지다가 점차 잠잠해졌다.
‘금제는 두렵지 않지만 저 도령은 매우 강력한 존재야. 영동상인이 저 도령에 중상을 입힌다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한제의 노림수였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영동상인은 도령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상황은 한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제는 오른쪽 눈을 번득여 번개 문양을 소환했다. 번개 문양은 짙은 안개 상공으로 떠올라 천둥번개를 발산해 번개의 그물을 형성했다.
왼쪽 눈에서는 화염이 흘러나와 안개를 뒤덮는 불바다를 이루었다. 불바다는 활활 타오르면서 천둥번개와 융합해 안개를 더욱 단단히 봉쇄했다.
뒤이어 한제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그의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천황로가 튀어나와 짙은 안개를 삼켰다.
한제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천황로는 제련을 시작했다. 천황로는 고신 왕족의 법기로 방어력이 매우 강력한 데다가 제련에도 뛰어났다.
이 도가니가 제련하는 것은 단약이나 법보가 아닌 노예였다. 고신의 노예!
모든 작업을 마친 한제는 한쪽에 나가떨어져 있던 두 개의 고식엽으로 다가갔다.
‘저자에게도 고식엽이 있을 줄이야. 그는 이걸 대체 어디서 얻었을까?’
한제는 두 개의 잎을 분리한 뒤 영동상인의 고식엽을 신식으로 살폈다. 고신의 힘이 어린 한제의 신식에 영동상인의 신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영동상인의 고식엽에 고신의 기운을 남긴 한제는 두 개의 잎을 조심스레 거두었다. 고식엽은 고족의 것이라 보통 수련자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가 없으나 그에게는 매우 쓸모 있는 무기였다. 심지어 그에게는 정신술만큼이나 유용했다.
암석 조각의 비밀
주위를 훑어보던 한제는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암적색 암석 조각으로 향했다.
‘영동상인이 분명 2급 암석 조각이라 했다. 이 암석 조각에 무슨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그는 차분히 암석 조각을 살피기 시작했고 잠시 후 뭔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암석 조각의 피처럼 붉은 표면에는 수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제는 단번에 그 문양을 파악하고 곧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암석 조각 위의 문양은 이곳에 들어온 수련자들의 미간에 나타난 숫자였다.
한제는 자신이 한 무리의 수련자들을 죽이고 암석 조각을 차지했을 때 죽은 수련자들의 육신은 무너졌으나 미간의 숫자 표식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떠올랐던 것을 기억해냈다. 당시에는 별다른 단서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 암석 조각을 보고 나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죽은 이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숫자 표식은 암석 조각에 녹아들어 그 급을 높이는 거로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이 암석 조각에 새겨진 문양의 수를 헤아렸다. 총 589개였다.
이곳 봉인된 땅에는 수십 명의 수련자가 죽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숨을 거두었지만 그들 미간의 숫자 표식은 보일 듯 말 듯한 문양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이곳을 가득 채웠던 붉은 안개의 폭풍도 저 문양들을 파괴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게다다 영동상인과 소정은 붉은 안개 속 보물을 찾는 데 급급해 그 문양들을 흡수하지 않았다.
한제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떠 있던 여러 숫자 문양이 다가왔다. 한제는 그것들을 전부 자신이 올라탄 암석 조각으로 보냈다.
문양들은 하나하나 암석 조각에 녹아들었다. 그러다가 열한 번째 문양이 녹아든 순간, 바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끝없는 먼지가 일더니 이 암석 조각으로 몰려들었다. 한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암석 조각은 한층 더 커졌다. 몰려든 먼지가 암석 조각에 녹아들면서 그 크기를 키우는 것만 같았다.
암석 조각은 3만 척에 이른 뒤에야 더 커지기를 멈추었고 어느새 암적색이 아닌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암석 조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은 대륙이라고 봐야겠군.’
한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암석 조각을 뚫어져라 살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암석 조각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의 크기가 3만 척에 이른 순간 한 줄기 신식 같은 기운이 발을 타고 체내로 녹아들어 보여준 어떤 장면이었다. 이 화면들은 기억에 빠르게 녹아들어 어느새 그의 일부가 되었다.
지도 같은 무언가가 펼쳐져 있었다. 굉장히 큰 지도는 그러나 대부분이 검은 안개에 뒤덮여 있어 세 부분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하나로 합쳐봐야 전체의 3할 정도 될 듯한 부분들이었다.
한제는 곧 그 지도에서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이곳은 화도봉지(火道封地)라 불리는 곳이었다. 지도에 드러난 부분에는 이런 봉지가 총 세 곳 있었다.
한제는 또한 지도에서 길을 하나 찾아냈다. 오래된 무덤의 깊은 곳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한제는 한참 뒤에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눈앞의 봉지에는 수많은 균열이 다시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벌어지거나 혹은 맞물리고 있는 균열은 퍽 기이해 보였다.
한제는 암석 조각을 벗어났다. 그러자 곳곳에 나타났던 균열이 싹 사라져 버렸다. 한데 의아함을 느낀 한제가 다시 암석 조각 위로 돌아오자 균열들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