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43
‘요석설과 닮았군.’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어서 답하라!”
“지연⋯⋯ 봉지연⋯⋯.”
봉멸족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이라⋯⋯ 예쁜 이름이로군. 너는 이미 두 번 죽었었지. 그런데도 어떻게 다시 살아난 게냐?”
한제는 덤덤하게 물었지만 자연스레 풍기는 위엄이 봉지연을 압박했다.
“난 묘음도존의 시녀다. 나를 납치하다니, 도존께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게야!”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한제를 노려보았다. 허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두려움이었다.
“묘음도존 말인가? 그는 오래된 무덤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의 덤덤한 목소리가 떨어진 순간, 봉지연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기민하고 똑똑한 그녀는 한제의 말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도존의 분신이 죽임을 당했을 리가 없어!”
겁에 질린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날카로웠다.
한제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옥패를 하나 소환해 봉지연에게 던졌다. 옥패가 미간에 붙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묘음도존이 사망하던 당시의 장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묘음도존과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의 신통술을 잘 알고 있는 봉지연은 옥패에서 본 광경의 진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이 모두 진실임을 어렵지 않게 확신한 것이다. 저자와 대황상인이 합공을 했다면 분신인 데다가 수준까지 억압된 묘음도존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특히 대황상인이 묘음도존의 육신을 빼앗는 장면을 본 순간 마지막 기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사소한 일에는 인내심이 많지 않다. 어서 답하지 않는다면 수혼술을 펼칠 것이다.”
한제의 목소리는 한없이 싸늘했다.
수혼술이라는 말에 봉지연은 움찔 떨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고 주인까지 죽은 지금 기댈 구석도 전혀 없음을 잘 알았다.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그런데도 넌 나를 뒤쫓아 죽이려 했다. 그런 너를 한 번 죽였으니 그걸로 대가는 치른 셈이겠지. 그러니 협조만 한다면 살려주겠다. 그냥 풀어줄 수도 있지.”
한제의 싸늘한 목소리에 잠시 침묵하던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봉멸족에게는 세 개의 목숨이 있다.”
“그건 어떤 신통술이지?”
한제는 상대의 말에 거짓은 섞이지 않았는지 살피며 다시 물었다.
“신통술이 아니다. 봉멸족 사람들은 태어나면 장로와 함께 조상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 그 제사를 드린 후로는 세 개의 목숨을 갖게 되지.”
소녀가 입술을 깨문 채 답했다.
“죽고 싶은 게냐? 감히 나를 속이려 하다니!”
한제는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봉지연의 정수리를 내려치려 했다.
그 순간, 봉지연은 잔뜩 겁을 먹은 듯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외쳤다.
“거짓말이 아니야. 우리 부족 사람들은 태어날 때 미간에 아무런 낙인도 없어. 조상께 제사를 드린 뒤에야 부족 낙인을 갖게 되고 그 후로 세 번의 목숨을 갖게 된단 말이다!”
한제의 손은 그녀의 정수리로부터 3촌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추었다.
“그렇다면 봉멸족의 봉인술은 어떻게 발휘하는 거지?”
“생명을 바쳐 부족 문양을 활성화하면 부족 낙인으로부터 흘러넘친 조상의 힘이 봉인을 진행하지.”
봉지연은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얼른 답했다.
그 순간, 한제는 오른손을 그녀의 정수리에 얹고 신식을 주입해 수혼술을 진행했다.
심신이 무너져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기억이 한제의 눈앞에 선연히 드러났다.
이제 한제는 상대의 혼에 아무런 부상도 입히지 않은 채 기억을 훑을 수 있었다.
봉지연의 기억을 완전히 훑은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그녀의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미간에서 부족 낙인이 쑥 뽑혀 나왔다.
손을 휘둘러 봉지연을 봉인해 저물공간에 넣은 한제는 고민에 빠진 눈으로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는 봉멸족 낙인을 바라보았다.
봉멸족은 기이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혈연관계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갓난아이를 데려와 조상께 제사를 드린 뒤 그중 살아남는 아이들만 부족원으로 삼았다. 사망률이 매우 높은 데다가 아주 오래전 봉멸족 제단이 돌연 사라지는 바람에 봉멸족을 보기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부족 낙인은 다른 존재에 의해 찍히는 것이라 그것을 잃는다 해도 죽거나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봉멸족 소속이 아니게 될 뿐이다.
또한 봉멸족은 세 개의 목숨을 갖는데 다른 부족이라도 봉멸족에게서 목숨을 앗아가 자신이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술법은 봉멸족 제단이 있어야만 발휘할 수 있는데 사라진 제단은 여태 찾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성공률도 높지 않은 데다가 까딱 실패했다가는 오히려 반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한제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봉멸족의 부족 낙인을 저물공간에 거두었다. 봉멸족 소녀를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별다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족 낙인까지 거두었으니 오래된 무덤을 나가면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때, 한제의 표정이 급변했다. 열아홉 그루의 나무가 수많은 녹색 잎들을 피워낸 것이다. 비록 그중에 고식엽은 없었지만 한제는 조급하게 굴지 않고 계속해서 고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어느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마치 낙엽처럼 수많은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잎만은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무로 흘러들던 고신의 힘은 모조리 그 잎으로 집중됐다. 한제는 눈도 떼지 않은 채 그 잎을 응시했고 엄청난 양의 고신의 힘을 흡수한 나뭇잎은 점차 빛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식엽의 기운을 발하지는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그 나뭇잎이 금방이라도 가지에서 떨어질 것처럼 뿌리 부분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떨어졌다. 발산하던 빛을 잃고 점점 어두워지며 땅에 떨어진 잎은 평범한 나뭇잎일 뿐이었다.
이제 그 나무는 더 이상 고신의 힘을 흡수하지 않았다. 대신 말라가다가 결국 한 줌 재로 흩어져 버렸다.
한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머지 열여덟 그루의 나무도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전의 나무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지난 며칠간의 수고와 고신의 힘은 그냥 낭비한 것이 될 터였다.
“어째서지? 내 생각이 틀렸나? 고식엽⋯⋯ 고식⋯⋯ 고⋯⋯ 식⋯⋯.”
혼잣말을 하던 한제의 두 눈이 돌연 번득였다. 어렴풋이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남은 열여덟 그루의 나무를 응시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의 숨은 바람이 되어 열여덟 그루의 나무에 스며들었다. 고식, 즉 고신의 숨결로 이루어진 바람이었다.
숨결에 휩쓸린 열여덟 그루의 나무에서는 우수수 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나무에는 단 하나의 나뭇잎만 남겨졌다. 남은 나뭇잎들은 한제의 숨결을 흡수해서인지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한제는 흥분한 눈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열여덟 개의 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그에게로 다가왔다.
“고식엽!”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의 때를 같이해 천황로 안의 바다가 거의 사라지면서 대황상인조차 화들짝 놀랄 만한 단 아홉 방울의 독만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한 방울 한 방울의 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향불의 혼까지 담겨 있었다.
“아아!”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탄성의 주인공은 한제가 아닌 영동상인이었다. 그는 천황로 안의 또 다른 세상에서 보라색 바닷물 안에 담긴 향불의 혼 중 4할을 융합하면서 마침내 진정한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됐다.
보라색 바닷물이 콰르릉 소리를 내며 요동쳤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영동상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수많은 향불이 이룬 허상의 띠가 영동상인 주위에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에게서 드러나는 명확한 특징이었다.
여기서도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네 번째 기쁨이 찾아왔다.
이 숲을 둘러싼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길이가 5만 척에 달하는 암석 조각이 나타났다.
그 암석 조각 위에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얼떨떨해 보였다. 여기서 한제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적을 만들다
봉천랑족 사내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던 한제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하늘에 숨겨져 있던 번개 문양이 순식간에 거구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헛!”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봉천랑족 사내의 반응은 기민했다. 곧장 고식엽을 소환해 가슴에 붙여 감정을 봉인해 허상의 화염에 대비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결인을 그린 손으로 앞을 가리키자 1만 척에 달하는 늑대의 허상이 번개 문양을 향해 돌진했다.
한데 그때 번개 문양 뒤에서 아홉 빛깔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불바다가 되어 하늘을 뒤덮고 늑대 주위를 휘감았다. 동시에 번쩍이는 붉은 빛과 함께 나타난 핏빛 검은 늑대의 허상을 관통해 사내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네가 5급 암석 조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 이참에 너를 죽이고 나의 암석 조각도 6급으로 진화시키겠다! 주제에 맞지 않게 고식엽을 탐하다가 나를 마주치게 된 네놈의 불운을 탓하거라! 하하하!”
거구의 사내는 크게 웃으며 손을 힘껏 휘둘러 향불의 힘을 소환했다. 동시에 늑대의 허상도 다시 나타나더니 붉은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파죽지세로 금제를 뚫고 나간 사내는 곧 한제에게로 향했다. 한제 앞의 열여덟 개 고식엽을 발견한 그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한제를 향해 뻗어 나왔다.
“네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한제는 덤덤하게 내뱉더니 손을 마주 휘둘렀다. 그러자 미리 소환해두었던 천황로가 사내에게로 날아들었다.
“저항해봐야 소용없다!”
봉천랑족 사내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힘껏 전방을 후려쳤다. 그러자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천황로가 진동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반발력이 사내의 팔을 타고 체내로 흘러들었다.
“큭!”
봉천랑족 사내는 표정이 급변해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물러나려 했다.
그때, 천황로 안에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영동상인이 튀어나왔다. 봉천랑족 사내에게 달려드는 그의 주위로 무궁무진한 향불이 맴돌았다.
“영동!”
봉천랑족 사내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영동의 출현에 심신이 진동한 것이다. 어느새 세 번째 단계에 이른 듯 주위를 맴도는 향불도 놀라웠지만 그가 한제의 명에 따르는 듯한 모습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주진!”
영동상인은 봉천랑족 사내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눈 깜짝할 사이 그 앞에 이르러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포효하는 보라색 바다에서 나타난 거대한 검은 조각상이 두 팔을 펼치며 파멸적인 힘을 쏘아 보냈다.
봉천랑족 사내, 주진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후방에 피비린내를 짙게 풍기는 어두운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한 쌍의 붉은 눈이 나타났다.
“아우우!”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수만 척에 달하는 붉은 늑대가 튀어나오더니 곧장 영동상인의 조각상으로 달려들었다.
한제가 세 번째 단계에 완전히 진입한 영동 상인과 한패가 되어 있는 상황에 불길함을 느낀 주진은 자존심이고 뭐고 팽개치고 붉은 늑대를 내보낸 뒤 곧장 도망치려 했다.
‘이런 싸움을 이어갈 수는 없어. 영동상인은 충분한 향불을 가질 수만 있었다면 나보다 훨씬 먼저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자야. 그러니 이제 막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고 해서 나보다 아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제는 고신의 두개골 위에 가부좌를 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저 주진이 거만한 모습으로 달려들다가 기겁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보고 꽤나 반가워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반갑다네.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