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46
짙은 안개 속, 모든 창끝이 자신에게 겨눠진 것을 아는지 한제는 거대한 8급 암석 조각 위에 가부좌를 튼 채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사방의 안개를 밀어내는 짙은 금빛은 멀리서 보면 태양 같았다.
한제의 머릿속 지도에는 여덟 번째 부분까지 열려 있어 오래된 무덤의 절반 이상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거친 목소리가 네 번째로 심신에 울렸다.
“천, 지, 인, 세 개의 부 중 천부는 나의 유산을 위한 곳이다. 우리 부족원 중 누군가의 수준이 끝에 이르면 이 반고성도(返古成道)를 얻을 수 있을 터. 그리 되면 이곳을 떠나 나의 고향으로 가 나의 부족을 찾으라.”
목소리는 점점 약해지면서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한제는 7급 암석 조각 세 개가 자신을 향해 이쪽으로 몰려드는 것을 감지했다. 또한 다섯 번째 지도의 지역에서 방금 막 5급 암석 조각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 주인도 자신에게 돌진하고 있다는 것 역시 파악했다. 그리고 그 주인은 대황상인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루도 안 되어서 세 단계나 높아졌으니 놀랄 만도 하지. 내가 먼저 9급 암석 조각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막고 그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날 죽이려 할 게 분명해.’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한제는 피식 웃었다.
8급 암석 조각의 주인인 그는 저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저들은 한제의 위치를 그만큼 또렷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고요의 법기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군. 그것만으로는 9급으로 진화시킬 수는 없어.’
정석적으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죽이고 그들의 암석 조각을 빼앗아 9급 암석 조각을 완성해야 할 터였다. 허나 한제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암석 조각을 통제해 앞으로 돌진했다.
8급 암석 조각의 속도는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낼 수 있는 속도보다도 훨씬 빨랐다. 게다가 한제는 자신을 추격하는 이들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따라잡히지 않을 터였다.
‘고요와 관련된 물건들을 찾아서 지금껏 했던 방식으로 9급 암석 조각을 완성한다. 누가 더 빠른지 보자고!’
한제의 암석 조각은 쏜살처럼 나아가며 밝은 금빛을 발산했고 이에 전방의 안개는 빠르게 물러났다. 안개의 방해가 사라지자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한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세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8급 암석 조각을 만들어내고 지도의 여덟 번째 부분을 파악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여덟 번째 지도의 지역에 이르면 길을 더듬어 나가야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더 빠르다!’
한제는 망설임 없이 암석 조각을 타고 질주하며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자신을 쫓는 이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콰쾅!
한편, 한제를 쫓는 사람들은 일곱 번째 지도의 지역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안색이 어두워진 구천마존도 있었다.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서 가고 있군. 8급 암석 조각이라 다른 이들의 위치를 더욱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모양이지?’
구천마존은 눈을 번득이며 결인을 그린 두 손으로 암석 조각을 꾹 눌렀다. 그러자 암석 조각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그 무렵, 백의의 여인과 요염한 여인 또한 한제를 추격하고 있었다.
대황상인의 암석 조각은 아직 5급에 불과했지만 그는 세 번째 단계 수련자의 힘을 발휘해 속도를 높여 추격해왔다.
그때, 한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두 개의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한제는 암석 조각을 그대로 멈춰 세우더니 위로 솟구쳐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수십만 척 위로 떠오른 그때, 양옆에서 느껴지던 기운 역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들은 미처 다가오기 전에 사방의 안개에 방해를 받았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암석 조각을 우뚝 멈춰 세우더니 전방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후방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매섭게 휘둘렀다. 그러자 수백만 개의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휘몰아치며 한제의 뒤편으로 갑자기 불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우산이 나타났다.
“분계고산!”
한제는 피를 토하며 낮게 외쳤다. 그의 피는 뿜어지자마자 활활 타오르며 우산을 향해 날아갔고 그 순간 우산이 2할 정도 펼쳐졌다. 그러자 그 안에서 강력하고도 파멸적인 화염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 한제의 왼쪽에서 7급 암석 조각에 오른 구천마존이 안개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오른쪽에서는 역시 7급 암석 조각에 오른 백의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한제를 본 순간 흠칫 놀라더니 이내 다소 멍해졌다.
분계고산의 위력은 놀라웠다. 겨우 2할이 펼쳐졌을 뿐인데도 그 안에서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듯한 힘이 나타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불바다에 뒤덮인 안개는 순식간에 타올라 거친 폭풍을 형성했다.
이 놀라운 광경에 구천마존의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본체인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수준이 억제된 분신으로는 저 불바다의 충격을 피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한편 백의의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고 그녀 역시 빠르게 후퇴했다.
두 사람을 물리친 한제는 입가의 피를 닦아내더니 곧장 분계고산의 충격을 이용해 지도의 여덟 번째 지역에 진입하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구천마존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한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한 번 봤으니, 그리고 네놈을 눈에 담았으니 됐다. 이제 네가 아무리 멀리로 간다 해도 너와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드리워져 있다 해도 난 너를 죽일 수 있다! 격산지선(隔山指仙)!”
그는 미간을 두드린 손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두 눈동자 안에서 한제의 모습이 허상으로 나타났다. 분계고산을 펼치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허상으로 나타난 한제는 구천마존의 손가락질에 따라 곧장 왜곡되기 시작했다. 기이한 힘에 의해 금방 찢어져 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한데 구천마존이 정중로월에 버금가는 이 강력한 도술을 펼친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백의의 여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고운 손을 들어 허공을 후려치며 외쳤다.
“천문삼도(天門三道)! 일(日), 월(月), 성(星) 삼문(三門) 중 성문(星門)이여, 열려라!”
동시에 그녀가 결인을 그린 손을 휘두르자 구천마존의 전방에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며 나타나 교차하더니 거대한 문을 형성했다. 하늘과 맞닿을 듯 거대한 이 문은 세 번째 단계에 이를 때 나타나는 공의 문과 매우 비슷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달랐다.
두 가지 강력한 도술이 충돌했다. 허나 놀랍게도 아무런 소리도 파문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바르르 진동하던 성문이 별빛으로 부서져 흩어졌을 뿐이다.
“큭! 선비(仙妃),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수천 척이나 밀려난 구천마존이 창백한 얼굴로 백의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백의의 여인 역시 1천 척 정도 밀려난 상태였으나 표정만은 덤덤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자네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네가 뭐기에?”
여인의 덤덤한 목소리에 구천마존은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다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잠시 후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여인을 피하듯 빙 돌아 여덟 번째 지도의 지역으로 향했다.
백의의 여인은 미간을 찌푸린 시선을 돌려 한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 역시 앞으로 나섰다.
한편, 한제는 여덟 번째 지도의 지역에 진입하기 직전에 온몸을 덮쳐오는 한기를 느꼈다. 동시에 강력한 위기감을 느끼고는 곧장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려 천황로를 소환해 그 안에 담긴 채 전진했다.
한데 막상 이 지역에 들어서고 나니 위기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제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긴장감을 놓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길을 재촉했다.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천마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는 이 지역이 낯설었기에 고민이 됐으나, 그는 결국 흐릿한 감응에 의지해 다시 한제를 추격했다.
그와 동시에 요염한 여인 역시 암석 위에 선 채 이 지역으로 들어섰다.
한편,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파악한 한제는 빠르게 나아갔다.
이 지역에는 봉인된 땅이 세 곳 있는데 재미있게도 지도에는 각각이 고족의 문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신, 요, 마!
평소였다면 ‘신’이라고 표시된 곳부터 찾았겠으나 지금은 고요의 법기가 필요했기에 한제는 ‘요’라는 문자로 표시된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한 시진 만에 목적지에 거의 이를 수 있었다.
구천마존 등은 감응에 의지해 여전히 그를 쫓고 있었다.
‘반 시진 후면 따라잡히겠군. 시간이 부족해.’
한데 한제는 목적지를 눈앞에 뒀을 때 거대한 회오리를 하나 발견했다. 길이가 수십만 척에 달하는 회오리에서는 짙은 요기가 풍겨 나왔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심신을 흔드는 요기가 느껴졌고 그 안에 흘러넘치는 듯한 한 줄기 생기가 담겨 있음을 확인했다.
‘살아있는 고요!’
한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채 회오리를 응시했다.
살아 있는 고요
회오리 가장 깊은 곳, 혼탁한 기운으로 가려진 그곳에는 누군가가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기운 바깥으로는 봉인이 하나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고요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듯했다.
짙은 요기와 그 안에 깃든 강력한 생기를 통해 한제는 저 고요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강력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적어도 8성급은 될 터였다.
한제는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암석 조각으로부터 벗어난 뒤 암석 조각을 저물공간에 거두고 회오리 안으로 들어섰다.
회오리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요란한 쉭쉭 소리가 울렸다. 요기가 강인하고 견고한 비단 천처럼 한제의 몸에 뒤얽혔다.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겨우 1천 척 정도 들어왔을 뿐인데도 더 이상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십만 척 이상은 들어가야 할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을 급속도로 회전시켜 온몸에 고신의 힘을 녹여 넣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에 수천 척을 나아간 그는 순식간에 1만 척 정도를 더 들어갔다.
더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잠시 가부좌를 틀고 숨을 고른 뒤 마혼병을 소환했다.
이어서 마혼을 뽑아내 고신의 힘을 불어넣은 그는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고요의 기운 한 줄기를 붙잡고 세 갈래의 기운을 빠르게 융합시켰다.
그렇게 융합을 통해 기이한 힘이 나타나 미간을 두드려 숫자 문양을 만들어냈고 곧장 거두어들였다.
그는 쉬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했다. 마혼병에 남은 고마의 혼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숫자 문양은 늘어만 갔다.
…
어느덧 2각이 흘렀다. 그 동안 한제가 만들어낸 숫자 문양은 수천 개에 달했다.
‘더 빨리!’
암석 조각을 9급으로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숫자 문양을 채우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더구나 네 개의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저 멀리 허공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7급 암석 조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서는 분홍색 옷의 요염한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야릇한 신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 웃음이 귀에 닿은 순간, 한제의 심신이 움찔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주작묘에서 류미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련을 해오면서 얻은 굳건한 자제력과 주작묘에서의 경험으로 생겨난 끔찍한 고통을 통해 그 묘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한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암석 조각과 그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한제는 회오리 안으로 1천 척 정도를 더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더니 분홍 옷의 여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두 눈을 감은 채 다시 문양을 만들어갔다.
“네놈이었구나! 이미 탁삼과 손을 잡은 게 안타깝군. 그러지 않았다면 너를 죽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호호호!”
여인은 입을 가리며 웃었지만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뒤이어 그녀는 신중한 얼굴로 회오리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고요의 기운을 살폈다. 더욱이 그녀가 신중해진 것은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은 한제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는 사실 도술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한제가 아주 잠시 멍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자 의아한 생각이 든 것이다.
‘저놈 혹시…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는 건가?’
여인은 눈을 번득이며 입술을 살짝 핥더니 더욱 간드러지게 웃었다. 동시에 몸을 훌쩍 날려 회오리 안으로 들어서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저 멀리 허공에 나타난 구천마존은 암석 조각을 거두고는 빠르게 돌진해 눈 깜짝할 사이 회오리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