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54
그런 탁삼을 마주보며 한제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마흔셋!’
석대(石臺)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상태임에도 의자에서는 멈추지 않고 강력한 힘이 흘러나왔고 한제는 이를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의자의 저항력은 한제가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무렵 한제의 미간에서는 여덟 번째 반점의 기반인 회오리가 더욱 또렷해진 상태였다. 또한 한제의 곁에 놓인 고마의 시체는 오른쪽 눈에서 어느덧 네 번째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동시에 한제는 유산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동안 왼쪽 눈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당시 이광이 엽막의 왼쪽 눈을 쏘아버린 탓에 도고의 유산은 완전하지 못했고 유산의 기운을 흡수할수록 왼쪽 눈의 고통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심지어 자신이 당시의 도고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왼쪽 눈은 이제 시야마저 흐릿해졌다. 마치 왼쪽 눈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이 사라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광이 쏘았던 도고의 왼쪽 눈에는 그의 기억의 절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이에 왼쪽 눈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한제의 기억도 무언가에 의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모완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 주작성, 그간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포함해 절반의 기억. 왼쪽 눈이 사라지면 그 기억들 역시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될 터였다.
“내 눈을 돌려줘!”
한제는 유산의 기운을 흡수함과 동시에 속으로 포효했다.
바로 그때, 탁삼이 이글거리는 전의가 담긴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동시에 길이가 1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창을 소환해 힘껏 움켜쥐었다. 서사의 왕족 법기, 멸신모였다.
“끝을 보자 이한제!”
탁삼은 고함을 내지르며 온몸의 힘을 녹여낸 멸신모를 비스듬히 기울였다가 힘껏 내던졌다.
콰드드!
멸신모는 눈부신 빛을 번득이며 짙은 고신의 기운을 담아 마치 한 줄기 번개처럼 날아왔다.
한제는 피가 철철 흘러 흐릿해진 눈으로 멸신모를 바라보았다. 기억 역시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됐고 얼굴에는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나 있었다.
‘마흔넷!’
의자에서 발산된 힘이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체내에 전해진 순간,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당시의 도고 엽막이 이 의자 위에서 전방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손바닥을 뻗던 모습이 떠올랐다.
“신진! 병사들! 위치로!”
의자가 내뿜은 압력에 한제의 칠규에서는 피가 흘렀다. 하지만 덕분에 유산의 기운도 적지 않게 빨아들일 수 있었다.
한제는 왼쪽 주먹으로 전방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공간에 왜곡이 일어나면서 그를 중심으로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미간에서는 여덟 번째 반점의 기반인 회오리가 점차 응집돼 급속도로 모습을 갖춰갔다.
응집된 회오리가 진정한 반점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8성급 고신이 될 토대는 마련한 셈이었다. 일단 회오리가 생겨나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충분한 고신의 힘을 흡수하는 순간 반점이 될 터였다.
한제가 앉아 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대지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산산조각 난 대지가 사방으로 휘날렸고 수많은 파문이 끊임없는 진동을 일으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이 되어 있던 시신들이 파괴됐다.
그때, 한제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하나 생겨나더니 곧장 탁삼을 향해 달려들었다.
탁삼은 폭풍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달려들었다.
그때 멸신모는 1백 척 안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기세에 한제의 머리카락과 의자 아래 산산조각 난 석대가 뒤로 마구 날렸다.
“마도 생사역동(生死逆動)!”
한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번에는 왼손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멸신모가 닿으려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콰쾅!
거의 동시에 그의 신식이 폭발하면서 의자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의자에서 발산되던 힘이 층층이 무너져 내렸고 신식은 의자와 연결된 세 번째 층의 심장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한제의 손가락 끝과 멸신모가 충돌한 순간.
꽈르릉!
세상 모든 소리를 압도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마저 놀라게 할 분노의 포효와도 같은 소리였다.
한제의 손가락으로부터 신진과 마도의 힘이 곧장 멸신모에 쏟아졌다. 이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던 멸신모는 우뚝 멈춰 섰다. 마치 한제의 손가락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단단한 존재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멸신모는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한제의 손가락이 발휘한 위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밀려드는 파문 때문이기도 했다.
파문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멸신모를 강타했다. 그러자 멸신모의 표면에는 미세한 문양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이 문양들은 급격하게 번득이기 시작하더니 멸신모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멸신모는 고신 서사가 사용한, 최강의 왕족 고신 법기였다. 서사와 유사한 존재인 탁삼인 만큼 그가 멸신모로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은 당시 서사가 발휘했던 것에 버금갔다.
한제는 그런 멸신모가 손가락 끝에 닿은 순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 힘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그의 체내로 전해졌다.
“큭!”
한제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하지만 눈빛은 굳건했고 표정은 냉철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이미 계획한 일인 것처럼.
이때 그의 신식은 의자 안으로 달려들어 세 번째 층에서 박동하는 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에 가까워질수록 강력한 저항력이 느껴져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멸신모에 담긴 엄청난 힘이 한제의 체내에서 폭발하면서 밖으로 흘러넘쳤다. 이에 한제가 앉아 있는 의자에는 더 많은 균열이 일어났고 석대도 더욱 크게 부서졌다.
동시에 한제는 체내로 전달된 어마어마한 힘으로 신식을 떠밀었다. 그러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의 흩어져 사라질 상태에 놓여 있던 한제의 신식이 쏜살같이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 번째 층에서 박동하는 심장에 이르렀다.
한제의 신식은 드디어 심장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유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제는 심신을 통해 쿵쾅, 쿵쾅 하고 뛰는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었다.
천둥과 같은 이 소리는 한제의 심신에 울려 퍼지면서 심지어는 그의 심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한제의 심장은 세 번째 층의 심장과 같은 박자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쿵쾅!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 한제의 심장은 극한의 압력을 견뎌내기 힘든 듯 지독한 통증에 휩싸였다.
한편 한제의 심장과 세 번째 층의 심장 사이에 기이한 연계가 생겼는지 한제의 머릿속에 너무도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혼백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고신으로서의 손겁을 겪었을 당시보다도 극심한 고통이었다.
“크아아!”
한제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쿵쾅, 쿵쾅, 쿵쾅!
세 번째 층의 심장은 갈수록 빠르게 박동하더니 급기야는 하나로 이어졌다. 한제의 심장도 그 영향을 받은 듯 빠르게 박동했다. 그의 심장과 연결된 수많은 혈관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한숨이 한제의 심신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우렁찬 쾅 소리와 함께 세 번째 층의 심장이 마지막으로 폭발시킨 한 줄기 힘을 한제의 심신으로 쏘아 보냈다.
“크윽!”
피를 토해내는 한제의 심장에 수많은 균열이 생겨났고 극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제의 뒤로 고신 서사의 허상이 나타났다. 서사 역시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층의 심장이 마지막 한 줄기의 힘을 뿜어냈을 때, 한제의 뒤에 나타난 서사의 허상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치 한제가 얻었던 고신의 유산이 누군가에 의해 순식간에 지워져버린 것만 같았다.
서사의 허상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머리가 하나 나타났다. 서사의 전신에 비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그 머리는 약간 흐릿했는데 왼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채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머리가 나타난 순간, 세 번째 층에서 박동하던 심장이 마지막으로 뿜어낸 한 줄기 힘이 한제의 체내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아래의 석대는 완전히 붕괴해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의자 역시 바르르 진동하면서 절반 정도 무너져 팔걸이와 등받이가 사라졌다.
한제는 이 엄청난 힘에 육신이 파괴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멸신모를 막았던 손을 거두고 붉은 검을 소환했다.
집으로
한제의 왼손에 막혀 있던 멸신모는 방해물이 사라진 순간 곧장 한제를 꿰뚫으려는 듯 돌진해왔다.
그 순간, 한제는 자신의 육신을 무너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과 석대를 무너뜨리고 의자를 파괴한 힘, 그리고 세 번째 층의 심장에서 발산된 압도적인 힘을 전부 붉은 검에 몰아넣었다.
쐐애액!
이 모든 힘을 담은 붉은 검은 곧장 멸신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꽝!
우렁찬 소리와 함께 붉은 검과 멸신모가 충돌했다. 그리고 붉은 검은 바들바들 떨리는 멸신모를 파고들어 파죽지세로 완전히 갈라버렸다. 이어서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던 탁삼의 가슴까지 찔러들더니 순식간에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악!”
탁삼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온 순간, 붉은 검은 그의 등을 뚫고 빠져나왔다. 탁삼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쿨럭! 크으으…”
울컥 피를 토해낸 탁삼은 곧장 뒤로 수천 척 밖이나 밀려나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반쯤 꿇어앉았고 곧장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때 그의 멸신모는 반으로 갈라진 채 한제를 스쳐가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에 박혔고 그 위에 새겨졌던 모든 문양은 무너져 내렸다.
그 무렵, 무궁무진한 기운을 흡수한 한제의 미간에서는 흐릿했던 회오리가 완전한 회오리로 거듭난 상태였다. 만약 이 회오리가 없다면 수만 년을 노력한다 해도 8성급 고신이 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을 터였다.
한편, 한제가 내내 오른손을 얹고 있던 고마의 시체는 바르르 진동하면서 석상 같은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동시에 오른쪽 눈에서는 새로운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반점까지!
그러나 이 순간 한제의 왼쪽 눈은 매우 흐릿해져 있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의 극심한 고통이 영혼으로부터 느껴졌다. 기억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느낌도 계속됐으며, 왼쪽 눈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왼쪽 눈이 완전히 멀어버릴 것이고 도고처럼 절반의 기억을 잃게 될 터였다.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 고향에 대한 기억을…
“안 돼!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한제는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그의 심장과 세 번째 층의 심장 사이의 연계는 곧장 끊어졌고 의자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 사라져 버렸다.
궁전은 적막에 휩싸였다. 오직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한제가 눈을 감자 그의 뒤에 나타났던 거대한 허상의 머리는 흩어져 사라졌다.
한참 후, 안정을 되찾은 한제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떴다.
“앞으로 난 더 이상 서사로부터 유산을 이어받은 고신이 아니라⋯⋯ 도고다!”
한제는 고마의 시체로부터 거둔 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가 이전에 고신의 땅에서 얻었던 서사의 기억의 유산이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며 영혼으로부터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