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62
한데 잠시 후, 전방에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나더니 하얀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일견 느릿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다.
한데 아직 저 멀리 있는데도 보는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의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던 그의 모습은 찰나의 순간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로 수련자들은 환각을 본 것만 같은 느낌에 심신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특히 선두의 중년 사내가 받은 충격은 컸다.
한데 그들이 충격에서 미처 헤어 나오기도 전에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쾅!
이 작은 탄식에 수련자들의 심신은 다시 크게 울렸다.
서자봉 역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 작은 탄식에 담긴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그녀의 심신은 강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싶었으나 끝끝내 그 충동을 참아냈다. 대신 고개를 더 깊이 숙인 그녀는 다른 수련자들 뒤로 숨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일며 상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조금 전 사라졌던 인영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들을 훑어보았다.
허나 수련자들은 상대를 똑바로 살필 수 없었다. 상대가 마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뿜어내 제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두의 중년 사내는 상대의 시선에 모든 동작이 멈췄고 심지어는 원신마저 체내 깊은 곳에 짓눌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상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육신은 물론 원신 역시 소멸될 것 같았다.
“서, 선배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얼른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한제였다.
사실 한제는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허나 그들 중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만난 적 있던, 자신을 연모했던 한 여인을.
한데 너무도 변해버린 여인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다른 이들의 뒤쪽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푹 숙인, 창백한 얼굴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 여인만 보일 뿐이었다.
서자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난 8백 년간 눈물이 말라버렸다고 더 이상 흘러내릴 눈물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얼굴 위의 깊은 흉터를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었다.
숨고 싶었다.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지난 세월 그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흉측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눈물은 점점 굵어져만 갔다. 그녀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세상 끝, 상대가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옛 추억만 더듬으며 살고 싶었다.
“서자봉, 나 이한제다.”
한제는 뒷걸음질을 치는 중년 여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흉측해진 서자봉의 얼굴이 이윽고 한제에게로 향했다.
한편, 한제가 이름을 밝힌 순간, 이곳의 모든 수련자들은 화들짝 놀라 덜덜 떨었다. 특히 선두의 중년 사내는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었다.
이한제!
그 옛날 나천성역을 뒤흔들었던 그 이름!
“저는 서자봉이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뒷걸음질을 치던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서자봉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상대는 자신을 흠모했던 여인. 그런 여인을 자신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한제는 서자봉의 상태를 단숨에 파악했다. 원신에 여러 차례 입은 상처가 고질병이 되어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바로 좀 전에 입은 부상도 있었다.
“저 여인이 좀 전에 왜 다친 거지?”
한제의 시선이 수련자들을 찬찬히 훑다가 한 노인에게 닿았다. 눈에 익은 그 노인이 당시 자신과 함께 뇌의 선계에서 빠져나온 수련자 중 하나임을 한제는 어렴풋이 떠올려냈다.
노인은 한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감격한 모습이었다. 당시 한제 덕분에 무사히 뇌의 선계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여태까지도 상대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한제의 이름은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를 숭배하는 사람도 많았다.
“은인이시여!”
노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선두에서는 뇌선전의 사자가 몸을 격하게 떨었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허나 애원하는 듯한 그 눈빛은 노인의 한마디에 그대로 무너져 내려버렸다.
“저자 때문입니다! 저자가 계속해서 도우를 몰아세운 탓입니다!”
노인이 선두의 중년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종운, 네가 감히 나를 모략하느냐! 난 뇌선전의 사자다! 허튼 말로 나를 모략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중년 사내는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초조한 얼굴로 소리쳤다.
“선배님, 저자의 말은 거짓입니다. 저는 결코 서 도우를 힘들게 한 적이 없습니다.”
중년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재빨리 1천 척을 물러났다.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몸을 돌려 그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한제는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약한 여인을 그리 괴롭혔다니, 죽어 마땅하구나!”
한제의 눈에 짙은 살기가 드러났다. 특히 고개를 숙인 서자봉이 뒷걸음질 칠수록 한제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8백 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스러진 것들에 한제는 슬퍼졌다.
한편 슬금슬금 도망치던 중년 사내는 다급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난 뇌선전의 사자다! 뇌선전의 명령에 따라 전쟁 준비 중이란 말이다! 나를 죽인다면 넌 뇌선전과 척을 지게 될 것이다. 또한 전쟁 준비를 방해한 것이니 나천성역은 물론 4대 성역 모두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년 사내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협박과 변명을 했다.
“전장에서의 죽음이라면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을 것이다. 만약 반드시 나를 죽여야겠다면 1백 년의 시간을 다오. 계내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수 있도록!”
보통의 수련자라면 이 말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가 도망도록 놓아주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 중년 사내는 뛰어난 언변으로 거짓을 일삼고 이득을 얻어온 사람이었다. 뇌선전 사자라는 지위도 그렇게 얻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한제였다. 평생을 수많은 속임수와 음모를 겪어오면서 한제는 교활하게 꾀를 부리는 자를 간파해내는 능력이 생겼다. 그는 상대가 얼마나 말만 번지르르한 자인지 단박에 파악했다.
한제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수천 척까지 거리를 벌린 중년 사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뒤이어 바르르 떨던 그의 몸에서는 펑 소리와 함께 피 안개가 분출됐다.
“지난 수백 년간 저 여인을 괴롭힌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 내게만 이러느냐! 자신이 있다면 그간 서자봉을 업신여기고 괴롭혔던 모든 이를 다 죽여보아라!”
눈 깜짝할 사이 혈인(血人)이 되어 버린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펑 하고 터져 나가 육신은 물론 원신까지도 소멸되어 버렸다.
적막이 찾아왔다. 중년 사내의 악행을 폭로했던 노인을 포함한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으로 규열기 수준 수련자를 단번에 제거해버리는 한제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한제는 서늘한 눈으로 수련자들을 훑은 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어느새 서자봉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어디선가 한 줄기 부드러운 빛이 날아들더니 한 알의 단약이 되어 노인 앞에 이르렀다.
“이 단약을 먹고 폐관수련을 해 그 안에 깃든 흉수의 혼을 깨우쳐라. 수준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단약에서는 매우 짙은 원력의 파동이 발산되고 있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마치 몇 달간 좌선을 한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나천성역의 반쯤 폐허가 된 어느 수련성.
눈이 대지를 이불처럼 뒤덮고도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이 수련성 북쪽 산봉우리 꼭대기에 선 서자봉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창백한 얼굴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한제는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가 손을 살짝 뻗어 휘두르자 한 줄기 원력이 부드럽게 그녀의 체내로 흘러들어 원신 안에 녹아들더니 부상을 회복시켰다.
서자봉은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서자봉의 체내로 흘러든 원력은 이어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맑고 청아한 쩌적 소리가 이어지더니 그녀 얼굴의 흉터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렸다.
이내 서자봉의 얼굴은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이전에 비해 세월의 흔적이 다소 늘었으나 오히려 세월이 남긴 원숙함으로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서자봉은 손을 들어 자신의 매끈한 얼굴을 만져보았다. 순간 그녀는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8백 년 전, 스스로 얼굴을 망가뜨렸던 그녀로서는 오늘 같은 날을 상상한 적도 없었다.
“난 평생 단 두 명의 제자를 두었다. 한 명은 사청이고 다른 한 명은 십삼이지. 네가 나의 세 번째 제자가 되겠느냐?”
한제는 눈이 내려 바닥에 쌓이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서자봉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제는 조용히 상대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는 본디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도록 억제할 수 있지만 세상에는 그가 막을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을 흠모했던 이 여인의 감정을 막을 수 없었고 8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온 그 감정을 포기하게 할 수도 없었다.
남녀의 관계에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는 법이다. 이천매와는 서로 잊고 지내는 것을 택했지만 유약하고 가련한 서자봉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발은 점차 굵어졌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눈으로 이루어진 막이 드리운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서자봉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이내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8백 년간 이어온 감정을 끊어내기 위한, 한 차례의 인과를 마무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씁쓸했지만 동시에 그간의 힘겨웠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다.
눈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눈물이 매끈해진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바닥의 눈 위에 떨어졌다. 소복하게 쌓인 흰 눈 위로 몇 개의 눈물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내리는 눈으로 뒤덮였다.
“함께 떠나자.”
한제가 말했다.
“제 고향은 이곳 나천입니다.”
서자봉은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을 두드렸다. 순간 한 줄기의 강력한 원력이 서자봉의 체내에 녹아들어 원신을 강화했고 그녀가 현재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깨달음도 전해주었다. 덕분에 서자봉의 수준은 양의를 돌파해 곧장 규열기에 이르게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주입된 원력은 게속해서 서자봉의 수준을 높여 정열기에 이르게 한 뒤에야 천천히 멈추더니 세 갈래의 봉인이 되어 더 이상의 수준 증폭을 억제했다. 앞으로 그녀가 천천히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방식의 전수는 지금의 한제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노부자를 향한 손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