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70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제가 물었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법. 난 이미 충분히 피곤해. 삶을 더 이어간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네. 차라리 이렇게 떠나는 것이 나아.”
손릉은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바뀐다면 이 단약을 먹게.”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단약 하나를 꺼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노부인을 살피던 그는 이내 뜰 밖으로 향했다.
손릉은 점점 멀어지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치 그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동굴을 관리하는 바위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온종일 밖으로만 나돌며 수련을 게을리 하는 한제를 엄하게 꾸짖던 그때로.
“수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나? 내 알려주지. 수련자는 무엇보다 부지런해야 해!”
“넌 자질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근면성실하게 수련한다면 언젠가 대성할 날이 올 것이다. 난 이곳에서 수많은 외부 수련자를 지켜봤다. 그 동안 화신기에 이른 수련자 역시 적지 않았지. 그런 수련자들은 방 안에 틀어박혀 수련에만 매진했다. 너처럼 이른 새벽부터 나가 돌아다니지 않았어!”
노부인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약간의 부끄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 ★ ★
아침 햇살이 대지에 드리우며 어둠과 한기를 몰아냈다. 가을바람에 실렸던 서늘한 기운도 적지 않게 흩어졌다. 노랗고 붉은 낙엽들이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한제는 그렇게 부는 가을바람 속에 서서 이 수련성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반인처럼 걸음을 옮겨 산을 올랐다. 마치 이평을 데리고 그 산을 정복했을 때처럼.
그러다 어느 강 앞에 이르자 강변에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큰 바다 위에서는 조각배에 홀로 서서 파도의 포효를 마주했다.
“평아, 산은 강직하고 강은 신념과 같으며, 바다는 심장이다. 이 아비가 너를 데리고 산을 정복한 것은 네가 강직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굴하지 않고 운명에 굴하지 않으며, 어디에 가더라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제는 마치 눈앞에 이평이 있는 것처럼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강을 정복한 것은 네가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신념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념이 없는 강은 흐를 수 없고 신념이 없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체와 다르지 않다! 또한 너를 데리고 바다를 정복한 것은 네가 바다와 같은 심장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에는 곡절이 있는 법이다. 허나 바다와 같은 심장을 가진 자에게 그런 곡절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한제는 산과 강, 바다 그리고 평원과 숲을 지나며 당시 평과 함께 다녔던 곳들을 돌아다녔다. 지금 그는 7성급 고신으로 계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앞으로는 계내 역시 뒤흔들어 이름을 널리 알릴 터였다.
허나 그는 한 명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먼저 간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하는 보통의 아버지.
당시 아들과 함께 누빈 곳을 돌아다니며 옛 추억을 떠올리려니 슬픔이 차올라 한제는 체내에 녹아든 천역주 속에서 이평의 혼을 느꼈다.
잠시 후, 한제는 1백 년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준 염운성을 떠나 점차 멀어져 갔다. 슬픈 한숨 소리만이 우주 속에 울려 퍼지며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 ★ ★
나천성역 어느 지역. 매우 황량한 곳으로 짙은 안개가 가득 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들어왔다가는 방향을 잃고 갇혀서 영원히 헤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곳은 나천성역의 금지(禁地)였다.
때문에 주위를 지나다니는 수련자조차 거의 없었다. 반드시 지나야만 한다면 될 수 있는 한 멀리 돌아서 지나갔다.
짙은 안개 속에는 기이한 흉수들이 숨어 있었다. 구름과 흡사한 이 흉수들은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안개 속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형성한 상태였다. 또한 이 안개는 신식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곳을 살피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나천성역 금지 한쪽에서 왜곡이 일더니 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제의 번득이는 눈이 칠흑처럼 검은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시 뇌의 선계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그것도 그 기이한 마수의 체내로 전송된 바 있었다. 이후 그 안에 있던 선유족 사람들을 이끌고 마수에게서 탈출했다.
그가 이곳에서 본 것은 마치 고래처럼 생긴, 거대한 지하마수였다. 그리고 한제가 나천성역에서 마지막으로 하려는 일이 바로 그 마수를 사냥하는 것이다.
지하마수는 몸집은 거대하지만 겁이 많아 적을 마주하면 피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녀석을 건드릴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노부자 역시 이곳에 지하마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사냥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하마수의 성격 자체도 포악했더라면 나천성역에서 녀석의 존재는 어마어마한 재난과 다를 바 없었을 터였다.
지하마수의 신통술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허화개자(虛化芥子)로 그 거대한 몸을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워낙 겁이 많고 담이 작은 녀석은 뭔가에 놀라거나 방해를 받으면 곧장 이 신통술을 발휘해 작은 겨자씨[芥子]처럼 남들에게 존재를 숨겼다.
허나 이런 회피 성격의 허화개자와 달리 다른 하나의 신통술은 너무도 강력해 심지어 망월이라 해도 그 앞에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지하마수의 체내에는 하나의 세상이 있다.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그 세상은 그야말로 변화막측하다.
한데 녀석은 다급한 상황에 몰리면 입을 크게 벌려 우주를 진동시키면서 법보나 흉수, 수련자 수련성, 심지어 하나의 성역까지 삼켜버렸다. 그렇게 녀석이 삼킨 것들은 그 체내의 세상에 갇히게 된다.
한데 이 체내의 세상은 녀석이 입을 열었을 때만 시간이 흐르는데 한순간에 만 년 또는 수만 년의 세월을 지나 보내기도 했다. 즉, 지하마수는 체내 세상의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사실 지하마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떠도는 소문으로 드문드문 아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데 이 소문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태고에 한 지하마수가 자신을 쫓는 적과 우주를 삼키더니 체내의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함으로써 그 우주와 적까지 한순간에 연기와 재로 흩어지게 했다는 소문도 있다.
다만 이 신통술은 녀석에게도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런 두려운 힘 때문에 지하마수를 건드릴 만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한제는 지하마수에 대한 정보 대부분을 계외에서 얻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수련자의 기억을 흡수하는 동안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가 쌓일수록 그는 지하마수에 점점 흥미를 갖게 됐다.
“한데 당시 뇌의 선계에서 겨우 선왕에 불과했던 그자가 대체 어떻게 지하마수를 이용할 수 있었던 거지?”
한제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짙은 안개를 응시했다. 만약 직접 지하마수를 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 녀석의 몸에서 풍겼던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는 지하마수를 쓸데없이 몸집만 큰 존재라 여겼을 터였다.
“그 선왕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어. 어쩌면 지하마수의 힘을 이용할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한제는 신중한 얼굴로 발을 딛더니 이내 한 줄기 빛을 그리며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 그가 눈 깜짝할 사이 안개 속으로 진입한 순간, 안개가 꿈틀거리더니 그 안에서 수많은 흉수의 포효가 어렴풋이 울려 퍼졌다. 귀신들의 곡성처럼 끔찍한 소리였다.
예전에는 이 짙은 안개가 한제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허나 지금 그는 긴장한 기색 없이 엄청난 속도로 안개 깊은 곳을 뚫고 나아갔다. 심지어 사방으로 신식을 펼치기도 했는데 안개를 다 뒤덮을 수는 없어도 수십만 척 반경은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영동과 주진의 신식까지 펼친다면 찾아내기는 쉽겠지만 녀석은 워낙 겁이 많아 신식을 느끼는 순간 숨어 버릴지도 몰라. 더구나 허화개자라도 발휘한다면 다시 찾아내기는 힘들겠지.’
한제는 빠른 속도로 안개 속을 끊임없이 헤치고 나아가는 한편 곳곳을 훑으며 지하마수의 흔적을 찾았다. 마치 사냥꾼이 되어 사냥감이 출몰할 만한 곳을 탐색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기이한 모습의 흉수들이 끊임없이 신식에 걸리기도 했다. 매우 거칠고 포악한 흉수들이었지만 녀석들은 한제의 신식에 휩쓸리자 온몸을 바르르 떨더니 제자리에 멈춰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안개로 뒤덮인 구역의 3할 정도를 살폈으나 지하마수는 마치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제는 지겨워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묵묵히 탐색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점점 안개 깊은 곳으로 접근하고 어느덧 안개로 뒤덮인 지역의 절반 정도를 탐색했을 때까지도 지하마수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자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영동과 주진의 신식을 동원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결국 혼자 좀 더 꼼꼼히 찾아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안개 범위의 8할 정도를 훑었을 때였다. 한제의 눈이 밝게 번득였고 신식을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3만 척 정도 앞의 안개 속, 길이가 1천 척에 이르는 수십 개의 돌이 표류하고 있었다.
한제는 잠시 후 몸을 날려 돌들 앞에 이르렀다.
가까이에서 본 돌들은 보석처럼 색깔이 다양했다. 수많은 돌이 기이한 한 줄기 힘으로 한데 뭉쳐 있는 것만 같았다.
한제는 몸을 숙여 자신이 착지한 돌을 슬쩍 두드려보았다. 그러자 쿵, 쿵 소리가 돌 안쪽에서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한 손으로 돌을 꽉 움켜쥐어 일부를 떼어내 살피기 시작했고 이내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돌조각에서는 아주 오래된 기운과 함께 매우 짙은 영기가 느껴졌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돌은 길이가 1천 척에 불과했지만 폐허가 된 수련성 하나가 가진 영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 담겨 있었다. 다만 그렇게 짙은 영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생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영석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정도라면 특상품 영석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가치가 있을 터였다.
“세월의 흐름이 남긴 흔적으로 보아 수만 년은 족히 지내온 듯해.”
한데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한제는 뭔가를 깨달은 듯 흠칫 놀랐다.
“세월의 흔적? 그렇다면 이건…”
그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지하마수의 배설물이야!”
자신이 생각하고도 쉬이 믿기 힘들었지만 한제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하마수가 수련성을 삼키고는 체내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게 했고 이에 따라 수련성은 폐허가 됐겠지. 허나 수련성의 혼은 스러져도 그 안의 영력은 응집해 이런 돌조각이 된 거야. 그러니 짙은 영기를 풍기면서도 생기는 갖지 않는 거지. 마치 사물처럼!”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지하마수 사냥에 대해 그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하마수를 잡으려면 일단 봉인을 해야 해. 녀석의 거대한 몸 안팎 모두 철저하게⋯⋯. 외부는 천둥번개를 이용해 공격하면 될 터. 내부와 그 혼을 봉인하는 것이 문제겠군.”
지하마수 사냥 (2)
한제가 앞으로 뻗은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광풍이 일어나 돌을 강타했다. 돌들은 전부 무너져 내리면서 영기를 피워 올렸다. 이 영기는 한제의 오른손에서 맴돌다가 회오리가 되었다.
한제는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회오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영기는 연기처럼 변해 한제의 몸을 한 바퀴 돌더니 곧장 오른쪽으로 돌진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연기를 바짝 뒤쫓았다.
돌에서 뽑아낸 영기에 생기는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있었다. 그리고 그 세월의 흔적은 지하마수의 체내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지하마수의 기운도 담겨 있었다. 그 기운을 이용해 지하마수를 찾겠다는 생각이었다.
한제는 연기를 따라 안개 깊은 곳으로 향하던 중 표정이 밝아졌다. 먼 곳에서 어떤 위압감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 위압감의 범위에는 감히 어떤 마수도 접근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제의 심신에까지 영향을 미쳐 심신이 진동할 정도였다.
한제는 수십만 척까지 펼쳐둔 신식을 재빨리 거둬들여 반경 1천 척까지만 드리웠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위압감은 더욱 강력하고 또렷해졌다. 수많은 산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한제는 물러나기는커녕 잔뜩 흥분해 전의를 드러냈다.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질주하던 연기를 저물공간에 넣었다. 이어서 제자리에 서서 입술을 핥으며 마음속에서 피어올린 화염으로 온몸을 뒤덮었다.
“녀석이 약하다면 사냥하는 재미가 없겠지. 힘든 사냥일수록 전리품도 큰 법이니까. 또한 그래야만 녀석을 내 고신의 흉수로 삼을 만할 터!”
한제의 입가에서는 모처럼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