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77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게 한제는 더 이상 수련자가 아니라 원고 시대에서, 태고 시기에서 돌아온 마신(魔神)이었다.
살선! 마신!
한편 한제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운해성역의 어느 황량한 수련성에 있었던 그때, 그는 천운자의 혼을 이용해 수많은 미래를 점치는 한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 곧 다가올 수도자와의 전투에서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했다.
허나 지금 둘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한제는 엄청난 위엄을 발산했고 수도자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지였다.
“나와 수도자 사이의 원한 관계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은 물러가라! 그럼 목숨만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설 때마다 근처의 수련자들은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한제의 기세와 수십만 척을 뒤덮은 서늘한 기운, 그리고 살육의 본원이 그들을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죽여라!”
“저자가 신종에 들어가게 둬서는 안 돼!”
“목숨을 걸고 신종의 명령을 지킨다! 우리 운해성역의 수련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압박감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 수련자들은 용기를 쥐어짜냈다. 신종은 그들이 평생 수련을 해온 이유였다. 그런 신종이 수만 년간 지켜온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이 한제의 손에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이 수도자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운해성역은 물론 다른 세 성역 수련자들도 분개해 한제를 공격할 것이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써 세력이 약화된다면 곧 다가올 전쟁에서 계외에 공적을 쌓는 일이 될 터였다.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명예 사이에서 운해성역 수련자들은 계내 수련자의 존엄성을 보여주었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명예를 택한 것이다.
“운해에 영광을!”
“운해에 영광을!”
운해성역 수련자들은 용기를 북돋아 외쳤다. 이들의 고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신종을 수호하고 운해성역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어린 소리였다.
이 외침은 듣는 이들의 심신을 진동시키고 영혼을 떨리게 했다.
운해성역 수련자들은 더는 물러나지 않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멸여천진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들의 성역과 존엄성을 지키려 하는 그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달려드는 운해성역 수련자들을 바라보는 한제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저들의 수준도 각기 달랐고 경지와 도념 또한 각자 달랐으며 출신 종파도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운해성역 출신이었고 같은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운해성역의 수련자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수도자가 아니라 신종이었다. 그들은 수도자의 음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신종에서 이한제라는 수련자의 접근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운해에 영광을!
그러니 그 명령에 따르고 그 명령을 완수해내는 것은 운해성역 내 모든 수련자들에게 명예였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는 한제라도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상의 화염을 일으켜 그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한제는 뒤로 물러나며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칠채계에서 보았던, 죽음을 불사하고 봉계의 진을 향해 달려들던 과거 선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 다른 성역에서 신식을 뻗어 상황을 살피고 있던 수준 높은 수련자들 역시 이 광경을 보았고 운해성역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도 들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나머지 세 성역의 수련자들에게서 동조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계내 수련자들의 마음을 훼손시키고 전쟁 준비에 차질을 빚기 위한 수도자의 수작이 오히려 계내의 모든 수련자들을 하나로 만든 셈이었다.
이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수도자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붉은 검
그 무렵, 한제는 뒤로 물러나는 와중에도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살기를 드러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손을 크게 휘둘렀다. 동시에 자신의 모든 원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분노에 찬 고함을 낮게 내질렀다.
“수도자 넌 죽어 마땅하다!”
이어서 짧은 외침이 따라붙었다.
“정(定)!”
순간 온 세상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한제에게 달려들던 모든 수련자들은 물론 별의 움직임마저 그대로 멈춰버렸다.
정신술의 위력은 그들의 육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에도 작용했다. 운해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수련자들의 모습을 보며 한제의 정신술에 기이한 변화가 인 까닭이었다. 이들을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한제의 마음에서 기인한 변화였다.
한제로서도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정신술(定身術)이 정신술(定神術)로 바뀌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렇게 온 세상을 멈춰버리는 것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수련자들이 뿜어낸 힘을 목격하면서 한제는 의지에 대해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 한제는 앞으로 나아가며 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주위의 모든 수련자들은 세상에 녹아들거나 저 멀리 밀려났지만 누구도 다치거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한제에게도 그들은 존중할 만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곧장 신종이 있는 수련성으로 향했다.
“수도자 나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겠느냐?”
한제가 수련성 상공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지가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균열이 드러났다. 한제에게서 발산된 서늘한 기운에 하늘은 쩌적 하고 얼어붙었고 온 하늘을 뒤덮은 서리는 곧 대지마저 꽁꽁 얼려 버렸다.
그러는 사이 한제의 눈빛은 멀리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 가운데 가부좌를 튼 수도자에게로 향했다.
“이한제!”
수도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들이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뒤이어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한제와 수도자 사이의 공간이 왜곡되더니 허상의 화면이 하나 나타났다.
화면 속에 비친 것은 귀원종 수련자들이었다. 그들은 분지에 갇혀 있었고 그 위에는 서늘한 빛을 번득이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있었다. 산봉우리는 언제라도 떨어져 분지 안의 모든 사람을 그대로 짓눌러 버릴 것 같았다.
“저들은 모두 너 때문에 죽을 것이다. 저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네 도심에 흠결이 생기는지 보고 싶구나! 크하하하!”
수도자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네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한제는 한없이 침착한 표정으로 마치 이 모든 것을 예견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뱉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허상의 화면 속, 거대한 분지 위의 산봉우리는 수도자의 손짓에 곧장 떨어져 내렸다. 분지에 갇힌 귀원종 제자들은 곧 그 산봉우리에 뭉개질 터였다.
산봉우리 주위로는 검은 옷을 입은 수련자가 열 명 정도 있었다. 이들은 귀원종 수련자들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는 그 순간을 매우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한데 바로 그때, 돌연 분지 안에서 붉은 빛이 번쩍 뿜어져 나오더니 곧 화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그 붉은 빛 아래,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자루 붉은 검이 튀어나오더니 가라앉고 있는 거대한 산봉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붉은 검과 산봉우리가 충돌했다. 범상치 않은 산봉우리에 드리워진 수많은 금제가 빛을 번득이며 붉은 검의 공격에 저항했다.
하지만 붉은 검은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도 막기 힘들 정도로 예리했다. 탁삼의 육신도 관통한 검이니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산봉우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관통당했다. 그 순간, 붉은색 균열이 줄기줄기 생겨나더니 산봉우리는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허나 그중 단 하나도 그 아래 분지로 떨어지지 않았다.
주위에 모여 있던 10여 명의 흑의의 수련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붉은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붉은 검은 다시 빛을 번득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 사이 부서진 돌조각들이 다시 무너져 내렸고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달려들던 흑의의 수련자들이 붉은 검에 관통당하며 지른 비명이었다.
콰쾅!
붉은 검에 머리와 몸을 가차 없이 관통한 흑의의 수련자들은 원신조차 살아남지 못하고 붕괴하더니 시체가 급속도로 말라붙었다. 그들의 모든 생기가 완전히 붉은 검에 흡수당했기 때문이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대부분은 무슨 일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제로 수도자가 허상의 화면을 띄운 후 손을 휘두른 뒤로 셋을 세기도 전에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
“네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붉은 검이 허상의 화면을 뚫고 다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허공을 강하게 후려쳤다.
비록 세 번째 단계 수련자는 아니지만 그 육신은 충분히 그 차이를 뛰어넘고도 남는 한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 거대한 손바닥 허상이 나타났다. 하늘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손바닥은 그를 지나쳐 수도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수도자가 서 있는, 거대한 손가락 같은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손바닥과 한제가 허상으로 소환한 손바닥이 충돌했다.
수도자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여러 개의 칠채정을 소환해 내던졌다.
“망할 녀석! 그렇게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런 상황에도 여전히 오만한 수도자의 손짓에 따라 칠채정들은 일곱 색깔의 빛이 되어 한제의 손바닥과 충돌했다.
콰콰쾅!
수련성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한제가 소환한 허상의 손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한제는 뒤로 세 걸음을 밀려났다.
하지만 칠채정 역시 바르르 떨다가 저 멀리 떠밀려 나갔다.
“주덕!”
대지가 진동하자 다섯 개의 산봉우리에서는 대량의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다. 수도자는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경악한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그는 한제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에 궁지에 몰린 데다가 공격을 이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큰 대가를 들일 것을 각오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도자의 호명에 어디선가 긴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밝았던 하늘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수련성의 주야(晝夜)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뒤이어 어두워진 하늘 아래 응집된 허상의 인영이 곧장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가진 것을 빼앗고 죽이라 했지? 수도자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되네. 난 분명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어!”
허상의 인영은 빠르게 응집해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모습이 되었다.
얼굴에 고름집이 가득한 노인은 매우 끔찍해 보였지만 대황상인과는 달랐다.
노인과 한제 사이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 1천 척 안으로 줄어들었다.
“어린 친구, 내가 6품 도령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흑의의 노인은 여유롭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방금 전 목격한 한제의 실력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제가 소환한 거대한 손바닥을 본 순간 6품 도령이고 뭐고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일단 나선 이상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노인의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허상의 늪이 나타나 한제를 집어삼켜려 했다.
이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수도자가 흑의의 노인과 반대 방향에서 협공에 나섰다.
두 명의 세 번째 단계 수련자가 연합해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계외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순간, 한제 뒤쪽의 어두운 하늘에서 파문이 일더니 급속도로 다가왔다. 뒤이어 파문에서 서른두 개의 주판알 허상이 길게 한 줄로 늘어서더니 한제에게로 향했다.
허나 한제는 침착했다. 그는 흑의의 노인과 뒤에서 다가오는 주판알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도자에게 몸을 날렸다. 미간에서는 고신의 반점이 번득였다.
다음 순간, 영동상인이 튀어나오더니 곧장 흑의의 노인에게 달려들면서 오른손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무궁무진한 향불의 혼을 담은 짙은 보라색 바다와 함께 영동족 마신상이 나타나 팔짱 끼고 있던 두 팔을 확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