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94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무한한 우주를 수도 없이 살폈지만 자신 외의 누군가를 본 적도 없었다. 때문에 여태까지도 그는 몇 년 전 이렇게 누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소박해질 대로 소박해진 그는 단 하나, 함께 놀 도우 한 명만 내려달라고 하늘에 간청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간청을 한두 번 해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시야 한쪽에 비친 흐릿한 우주에서 돌연 한 줄기 빛이 나타나더니 곧장 이곳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는 거의 며칠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퍼뜩 놀라는 한편 기쁨에 껄껄 웃었다. 그리고 수련성 반대편에 떨어져 내린 이 온전치 못한 시체를 찾아 자신의 거처로 끌고 왔다.
“드디어 나와 함께 할 자가 생겼군. 죽은 자라고는 해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한데 어찌 죽은 자가 점점 자라나는 걸까? 모를 일이군. 그나저나 오늘은 비가 올 모양이야. 소홍, 얼른 가서 피우(避雨) 도령을 가져와라. 뭐? 피우 도령은 지난번에 이미 먹었다고? 그럼 이가에 가서 더 얻어 와! 젠장, 주지 않으면 내일 당장 이 몸의 형님을 보낼 거라고 전해라!”
사내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
“어쩌면 은자가 부족한 것일 수도⋯⋯. 그럼 어떡한다? 소계, 넌 내 형님을 찾아가 좀 더 달라고 해. 만약 그가 주지 않는다면 내일 당장 내가 직접 빼앗으러 갈 거라고 전해라!”
그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뇌까렸다. 심지어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는 칠채계에 갇혀 있을 때부터 나타난 현상으로 이렇게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리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생겨난 습관이었다.
쉬지도 않고 혼잣말을 한참 중얼거리던 그는 숨을 깊게 내쉰 뒤 시체를 바라보며 또다시 험상궂은 표정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이놈! 감히 네놈이 이 왕을 놀라게 해? 가만두지 않겠다!”
고함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른 그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대량의 신통술을 소환해 시체에게로 쏘아 보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대지가 바르르 진동했고 사내는 그 진동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신통술을 발휘했다.
광인(狂人)
쾅! 쾅!
며칠 동안이나 요란한 소리가 이어졌다. 만약 이 며칠간 사내가 사용한 신통술을 누군가가 봤더라면 기겁했을지도 모른다.
“봉선, 내 뒤를 따라라!”
광인(狂人)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바닥 문양이 나타나 시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력이 부족한 것인지 손바닥은 시체에 떨어지자마자 무너져 내리고 말았지만 그 모습만큼은 굉장했다. 거기에 무시할 수 없는 기운까지 뿜어내고 있는 이 문양은 다름 아닌 진정한 역령인이었다. 봉계의 지존이 신종에 남긴 궁극의 술법이었으나 이 광인은 당시의 봉계 지존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은도! 내가 어떻게 너를 공격하는지 잘 봐둬라!”
광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들어 올린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하늘에는 천막과 함께 기둥의 허상이 나타났다. 온 세상을 떠받칠 법한 기둥의 허상은 천막과 연결되면서 거대한 우산의 모습을 갖추었다.
“분계고산!”
광인이 손을 크게 휘두르자 이 우산은 즉각 줄어들더니 그의 손에 쥐어졌다. 광인은 시체를 향해 우산을 휘둘렀다. 허나 이 신통술 역시 매우 강력해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는 그렇지 않았고 시체에 닿자마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이광! 내 화살을 받아라! 크하하핫!”
사내는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허상의 활을 쥐듯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위를 당기듯 손을 뒤로 쭉 당겼다가 놓았는데 그러자 아무것도 없었던 그의 두 손 사이에서 돌연 허상의 화살이 나타나 시체에게로 쏘아졌다.
“칠채 낭자! 그대의 남편은 내 형님에게 쫓겨났지! 그러니 내 말에 잘 따르래도! 난 칠채술까지 발휘할 수 있다니까!”
광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린 순간 일곱 빛깔이 나타나더니 거대한 법륜을 형성해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광인은 쉬지도 않고 온갖 신통술을 발휘했다. 계내와 계외를 통틀어 본 적도 없는 신통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신통술을 그쳤다.
“훌륭해! 이 몸의 신통술이 또 강해졌군! 좋아, 이제는 힘을 훈련할 차례야.”
혼잣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시체의 손에는 활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 활은 현이 끊어진 상태로 한쪽 끝은 활에 매여 있었지만 다른 끝은 시체의 피와 살에 녹아들어 있었다.
시체 옆에 서서 두 손을 비비던 광인은 활을 움켜쥐더니 힘을 주어 당겼다. 허나 활이 꿈쩍도 않자 급기야 그는 펄쩍펄쩍 뛰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고국(古國) 놈, 죽었는데도 이광의 활을 쥔 손에 들어간 힘이 어찌 이리 강하단 말인가! 엇,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고국? 이광의 활?”
흠칫 놀란 광인은 활을 잡아당기던 손을 놓고는 눈을 끔뻑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시체를 바라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국이라… 낯익은 느낌인데⋯⋯ 깊은 원한이 느껴져.”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다른 생각이 나지 않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쪼그려 앉아 다시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오른손 끝을 물어 피를 내더니 시체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마셔라. 조금 더 마셔서 몸이 완전히 불어나면 나랑 놀 수 있겠지? 이 왕의 피는 매우 귀한 것이다. 당시 이가의 계집도 몇 년을 애걸한 끝에 한 방울 마실 수 있을 뿐이었지. 그리고 또 누가… 누가 왔었지? 소홍, 그게 누구였더라? 아, 무슨 종파의 성녀였는데… 나중에 내가 납치했지. 하도 가련해 보이기에 내 피를 내어준 적이 있어. 내 피 한 방울은 도성(道聖)보다도 더 진귀한 것이야!”
거기까지 말을 마친 광인은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런, 먹을 게 없군! 소홍, 지묵 가문을 찾아가 과일을 내놓으라 해라. 10만 년 만에 하나 난다는 몽과(夢果)인가 뭔가 하는 그것 말이다. 젠장, 얌전히 내놓지 않는다면 내일 내 형님이 빼앗으러 갈 것이다!”
광인은 혼잣말에 열중하느라 시체의 회복 속도가 자신의 피를 흡수한 뒤 거의 멈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시체의 상태는 더 악화됐을 뿐이다.
광인이 이 시체에 자신의 피를 마시게 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처음 시체를 본 순간부터 매일 해온 일이었다. 이에 시체의 체내에서는 그 피에 대한 저항력이 생성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융합되려는 기색도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체는 물론 한제였다.
한제의 체내에 흘러든 광인의 피는 도고의 힘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광인의 피와 도고의 힘은 서로를 삼켜댔는데 그러는 사이 한제의 몸에서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혈맥에서부터 시작된, 진정한 선인으로 거듭나려는 듯한 변화였다.
한편 이광의 활은 이광의 죽음 이후 누구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제의 체내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 이광의 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만약 전가 노인이 이 광경을 봤더라면 그답지 않게 매우 놀랐을 터였다.
한제의 체내로 녹아든 활의 현은 그의 체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맥의 변화에 의해 천천히 융합했고 현을 따라 혈맥의 힘이 활까지 전해졌다. 이에 이광의 활에서는 한제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일종의 환호성이 피어올랐다. 수만 년 만에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는 격앙된 감정이 담긴 환호성이었다. 심지어 이 활은 한제의 체내에서 바뀌고 있는 혈맥이 당시 자신이 모셨던 주인보다 열 배, 백배는 강하다는 것도 느꼈다.
한편 곁에 있던 광인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가 내리는군. 아, 소홍. 이리 와서 네 주인의 어깨를 좀 주물러라. 그리고 형님께 전해라.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 수련을 할 수가 없다고. 난 나가서 놀 것이다. 그러니 형님에게 날 찾지는 말라고 해. 충분히 논 후에 알아서 찾아갈 것이다. 만약 이전처럼 나를 찾으려 한다면 그대로 연을 끊어버릴 것이다!”
한제가 가진 고신의 힘은 회복되려 할 때마다 광인의 피에 저지되면서 상태가 악화됐다. 또한 광인의 피는 한제의 체내를 거친 바다처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한 격렬한 고통은 거의 미칠 정도였다. 차라리 의식이 없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사실 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다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체내가 광인의 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다.
사실 광인의 피에는 매우 순수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한제로서 이런 피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래된 무덤의 의자에 앉아 보았던 환각 속의 도고 엽막이 강력한 신통술인 무선술(無仙術)을 발휘했을 당시 폭발했던 기운만이 유일하게 이 피에 담긴 힘에 비할 만했다.
하지만 이 힘은 한제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광인의 피에 숨겨진 힘은 한제의 몸에서 맴돌면서 고신의 힘과 맞서는 동안 뼈와 핏속에 스며들었다.
뼈는 피의 근본이었다. 광인의 피는 그런 한제의 체내를 오랫동안 맴돌면서 끊임없이 골수에 녹아들어 그의 혈맥을 변화시켰다.
혈맥이란 곧 골수였다. 그러니 혈맥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골수를 변화시킨다는 것과 같았다. 만약 이 작업에 성공한다면 앞으로 한제의 몸에 흐르는 피는 광인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고귀한 피가 될 터였다.
한제는 그 고귀한 피로부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광인의 핏속에는 세상 만물로 하여금 경배하게 만드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심지어 한제는 그 피가 자신의 체내로 주입될 때 원신이 바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그 피가 세상 모든 수련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의식이 돌아왔을 때 한제는 광인의 피에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쏘아대는 갖가지 신통술을 보고 경악했다. 특히 광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혼잣말에 한제의 심신에 거친 파도가 일었다.
하지만 체내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은 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끔찍한 고통에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고신으로서의 손겁을 마주했을 때보다 몇 배는 강력한 고통이었다.
지금 한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눈을 뜨지도 못했다. 그의 원신은 광인의 피에 의해 체내에 굳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오른손에 쥔의 활에 담긴 따스한 기운이 한제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한제는 마치 활이 자신에게 융합되어 혈맥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왕의 피는 매우, 매우⋯⋯ 매우? 음, 매우희라는 이름의 계집이 기억나는군.”
한제의 곁에 앉은 광인은 멍한 눈으로 혼잣말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제의 입가에 가져다 댄 손을 거둬 자신의 입가에 대더니 도취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미소를 지었다.
“내가 봐도 정말 훌륭한 맛이야! 하지만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지. 형님이 말했어. 내 피는 한 방울만으로도⋯⋯ 뭐라고 했더라? 에잇, 기억이 안 나는군. 소홍! 이 녀석, 어딜 간 게냐! 벌써 몇 년째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니! 집으로 돌아가면 너부터 먹어치워주마!”
광인은 분노한 듯 화를 내더니 벌떡 일어나 한제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우뚝 서서 악에 받친 눈빛으로 한제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한제의 모습에 광인의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뭐가 이렇게 어려워? 뭐야?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차도를 보여야지! 몇 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다니!”
전방에 연거푸 발길질을 하던 광인은 화풀이를 하려는 듯 한제의 몸 위로 훌쩍 뛰어올라 계속해서 껑충껑충 뛰었다. 꼭 성난 원숭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형님이 그랬다. 우리 종족의 피는 세상에 그 어떤 상처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내 피를 이렇게나 먹여주었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이내 뛰어내린 그는 한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내가 포기할 것 같으냐? 기다려라!”
광인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손과 가슴팍이 닿으려던 순간 손에서는 기이한 문양이 떠올라 가슴팍에 찍혔다.
이에 광인은 몸을 바르르 떨었고 낯빛이 순간 붉어졌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가 한제의 몸에 뿌려졌다.
“내겐 피가 차고 넘쳐! 그러니 얼른 일어나 나랑 놀자!”
그가 이번에 뱉어낸 피는 손가락 끝으로 흘려 넣어주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짙은 금빛에 순수한 기운으로 가득한 피가 뿌려졌을 때 한제의 몸은 바르르 진동했다. 그러더니 이내 온몸의 모공이 빠른 속도로 벌어져 광인의 피를 흡수했다. 눈 깜짝할 사이 금빛 피는 한제에게 말끔히 흡수되었다.
체내로 스며든 대량의 피는 한 줄기 폭풍처럼 고신의 힘과 경쟁하는 한편 한제의 골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 움큼 피를 토해낸 광인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조금 헐떡였다. 그러더니 곧 조금 전보다도 더 짙은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도 안 일어나? 기다려라. 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올 테니! 흥!”
광인은 콧방귀를 뀌고는 옆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체내의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 그저 제자리에 앉아 거친 숨을 안정시키고는 곧장 다시 한제 앞에 섰다.
“젠장, 어떻게든 네놈을 깨워놓고 말겠다!”
광인은 낮게 고함을 지르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몸을 무려 세 번이나 연거푸 두드렸다. 이를 통해 무려 세 번이나 더 피를 토해냈다.
이렇게 토해낸 피는 비처럼 한제의 몸에 뿌려졌다.
“젠장!”
광인의 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금 상태라면 그의 형님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시체에 변화가 없자 그는 이를 빠드득 갈더니 이번에는 아예 혀끝을 깨물어 피를 뿜어냈다. 수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 피는 이전에 내뱉었던 다른 피보다 몇 배는 더 진귀했다.
불멸의 몸을 가진 선족(仙族)
한꺼번에 너무 많은 피를 잃은 광인은 눈이 뒤집히더니 혼절한 채로 털썩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의 진귀한 피를 너무 많이 써버린 것 같군. 어지럽다, 너무나 어지러워! 소홍, 이리 와서 얼른 나를 좀 주물러라.”
한편, 한제의 온몸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이 피는 마치 이성을 가진 듯 한제의 몸에 뿌려지자마자 얼른 모공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광인의 수명과 연결된 피까지 체내로 스며든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한제 체내의 도고의 힘과 고신의 힘을 제압했다. 아직 완전히 융합되지는 않은 상태였으나 도고의 힘을 제압한 광인의 피는 한제 전신의 뼈로 달려들어 골수에 녹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광인의 피가 한제의 골수와 하나로 섞인 순간, 한제의 온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곳곳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그 자신의 피가 몸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광인의 피와 융합하면서 변화한 골수는 새로운 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피가 만들어진 순간 한제 체내에서는 고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세상 모든 수련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고귀한 기운이었다.
한제의 감긴 왼쪽 눈 안에서는 아홉 빛깔의 화염이 타올라 눈꺼풀 밖으로까지 그 빛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화염은 곧장 골수에서 흘러나온 새로운 피에 의해 수많은 불씨로 무너져 내려 다시 융합되었고 이내 한 줄기 금빛 화염이 되었다. 이 금빛 화염은 비록 도화(道火)가 아니었으나 세상의 대도를 담고 있었다.
오른쪽 눈동자 안에 자리해 있던 번개 문양 역시 골수에서 흘러나온 새로운 피와 만나 그대로 소멸했고 그 주위를 맴돌던 아홉 갈래의 천둥번개 역시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번개 문양과 그 순간 한 줄기 금빛 번개가 한제의 감긴 오른쪽 눈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