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04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넌 내가 너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 그 용을 주마. 향불에는 독성이 있지만 너에게는 손해보다 이익이 더 클 것이다. 그 향불을 잘 이용한다면 세 번째 단계 수련자로 거듭날지도 모른다!”
염뇌자는 몸을 바르르 떨며 얼른 한제가 봉인한 검은 용을 잡아챘고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한제에게 깊이 절을 올렸다.
그가 한제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이이라는 말은 그저 농담이었건만 그 농담이 이렇게 큰 결과로 돌아오자 복잡한 심경이 되어버렸다.
“신공 가문의 신공호는 아직 살아 있느냐?”
한제는 계외 수련자들을 훑으며 물었다. 한제의 눈에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검은 용을 거두어들언 염뇌자가 공손하게 답했다.
“신공호라면 현재 나천에 있습니다.”
한제의 눈빛이 아련해졌고 머릿속에서는 신공호와 관련된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당시 신공호는 자신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던 한제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그와의 기억이 떠오르자 한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신공호는 일전에 나를 도와준 적이 있다. 나천으로 돌아가면 그를 잘 돌봐주도록.”
말을 마친 한제는 두 번째 검은 용을 봉인하고 그 안에 있던 계내 수련자들의 혼을 해방시키고는 염뇌자에게 건넸다.
“이것은 신공호에게 전해주고 나를 주인으로 모신 보상이라 전해라.”
염뇌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두 번째 용도 잘 챙겨 넣었다.
한제의 서늘한 금색 눈으로 세 번째 검은 용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의 수련자들을 삼키고 이 진을 연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 말에 검은 용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뒤로 돌아 거대한 몸으로 계외 수련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의 포효에 이어 계외 수련자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 끔찍한 소리에 염뇌자도 심장이 뛰었다. 죽어가는 자들은 분명 적이었음에도 염뇌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용에게 계외 수련자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절망과 두려움에 질려 있던 검은 용은 살려준다는 한 마디에 광기를 일으키며 단 1각 만에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버렸다.
죽은 수련자들의 혼을 삼켜 체내 향불의 혼으로 삼고 그들의 육신을 섭취한 용의 피는 수련자들의 붉은 피와 섞여 거의 보라색에 가까워졌다. 녀석의 몸에 돋아난 예리한 가시들 또한 꿈틀거리면서 조금 더 자라났고 머리의 뿔은 1촌가량 더 길어졌으며, 몸 또한 배로 커졌다.
“캬오오오!”
검은 용은 포효하며 거칠게 수련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잔상이 남을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동한 용은 순식간에 거대한 수련성과 충돌했다.
콰르릉! 콰쾅!
거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고 주위를 맴돌던 작은 수련성들은 기이한 힘에 이끌리듯 검은 용을 향해 돌진했다.
산수도
콰쾅!
이어진 우렁찬 소리와 함께 검은 용과 작은 수련성들의 충돌로 인한 충격이 고리처럼 퍼져 나갔다. 검은 용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고 동시에 거대한 수련성에는 수많은 균열이 일어났다.
한제는 체내의 저항력을 제압하면서 덤덤한 얼굴로 거대한 수련성을 지켜보았다. 그 수련성에 균열이 일어난 순간, 조금 전까지는 잠들어 있는 듯했던 네 번째 기운이 번쩍 깨어났다. 이 기운이 깨어나자 거대한 수련성은 마치 생명을 얻은 듯했다.
거대한 수련성을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작은 수련성들이 두 줄로 나뉘어 어스름한 빛을 발산했다. 이 두 갈래의 빛은 거대한 수련성의 양쪽에 늘어섰다.
또한 거대한 수련성에서는 한 줄기 하얀 빛이 피어났다.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오른 이 빛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상으로 나타난 노인은 마치 수련성의 혼처럼 수련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누구든 우리 연맹을 건드리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노인의 거칠고 노회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한제와 염뇌자에게 떨어졌다.
“용반자!”
염뇌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르르 떨며 외쳤다.
마치 용반자와 그를 감싼 빛은 머리, 거대한 수련성은 몸뚱이,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작은 수련성들은 두 팔을 이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단한 기백이로군. 자신의 원신과 혼백을 수련성에 녹여내 제련했어. 게다가 저 수련성을 통해 어느 정도의 불멸을 얻은 셈이야!’
한제는 이 수련성의 기이함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검은 용을 이용해 수련성을 열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마자 모든 상황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중현자의 스승인 용반자는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 이 놀라운 생각을 떠올려내고는 완벽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다.
저 정도 반열에 이른 수련자를 얕잡아볼 수는 없다. 저런 발상을 해내는 지혜와 실제로 실행에 옮길 만한 힘을 가진 노인에게 한제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상대가 적이라 해도 감탄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염뇌자 역시 이 상황을 잠시 지켜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찬 숨을 들이켰다.
“용반자…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법을⋯⋯?”
그때 두 눈을 번득이던 한제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뒤로 나가떨어졌던 검은 용이 몸부림치며 다시 포효를 내지르더니 거대한 수련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캬오오오!”
거친 포효와 함께 수련성 근처에 이른 순간, 검은 용은 입을 쩍 벌려 향불의 세계를 열더니 수많은 향불의 혼들을 뿜어냈다. 쏟아져 나온 혼들은 곧장 수련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데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수련성 안에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살기가 담긴 포효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살기는 평생 수많은 수련자를 도륙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살육의 본원에 기인한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이 소리는 한제에게 매우 익숙한 소리로 그 소리를 들은 순간 한제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청수 사형!”
한제는 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청수는 그에게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더라도 잊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다. 또한 한제는 온정을 중요시했다.
청수는 한제자 자신과 같은 신통술을 익혔다는 것만으로 그를 사제로 받아들여 완전한 신통술을 전수해주었다. 또한 한제가 아직 약했던 시절 숱한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누구도 이 청수의 사제를 해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청수의 그 한 마디에서 한제는 수천 년간 온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청수가 수련자 연맹에 붙잡혔을 때 한제는 당장 구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수준이 부족해 불가능했다. 그는 당시 정신없이 도망치면서도 언제고 반드시 돌아와 사형을 구하겠노라고 결심했다.
사실 한제에게 백범은 낯선 존재로 스승님이라 하기는 애매했다. 하지만 청수는 그에게 틀림없는 사형이었다.
청수는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집과 가족을 잃었고 청수국의 주군이 됐다가 쫓기게 되면서 슬픔 속에 절망을 경험했으며, 극의 경계를 깨우친 뒤 깊은 원한을 품은 채 살육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온 날, 청수국에서는 수많은 수련자가 죽어 나가며 피가 강을 이루었다.
복수를 했음에도 청수는 기쁨을 되찾지 못했다. 오직 살육으로만 가득한 삶을 살았던 그는 짙은 살기로 인해 뇌의 선계에 이르게 됐고 그곳에서 스승을 만났다. 또한 오직 살육으로만 점철된 냉혹해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여인을 만나게 됐다.
여인을 위해 살육을 비롯한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뇌의 선계의 선군이 됐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행복을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다. 분명 행복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광기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수면 위에 비친 달처럼 망가지기 쉬운 행복이었다.
그는 직접 아내를 죽였고 아내의 애정이 담긴 피는 그의 얼굴에 튀었다.
뜨거운 피에 청수는 영혼까지 떨며 정신을 차렸고 그 순간 자신의 손에 죽어가는 아내가 자신의 뺨을 쓸어주기 위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 백옥 같은 손은 결국 툭 떨어져 내렸고 청수는 끔찍한 절망이 어린 포효를 내질렀다.
그 후, 그의 삶에 다시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거대한 수련성에서 흘러나온 포효에 한제의 엄청난 자제력이 무너져 내렸고 두 눈에는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청수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포효에서 짙은 광기가 느껴졌음에도 한제는 기뻤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청수의 정신을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
수련성을 향해 달려들던 검은 용은 청수의 포효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포효에 배어 있는 광기와 짙은 살육의 본원을 느낀 것이다.
“하하하! 청수 사형이 살아 있었어! 사형, 제가 갑니다!”
한제는 크게 웃더니 오른손으로 검은 용을 움켜쥐어 뒤로 내던졌다.
“넌 자유다! 하지만 만약 계내의 수련자를 한 명이라도 죽인다면 그때는 곧장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바르르 떨던 검은 용은 한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한제는 밝은 금빛을 발산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때, 사람의 형태를 갖춘 수련성의 오른팔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청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한제는 조금도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체내의 저항력을 억제하지 않고 온몸으로 금빛을 번득이며 미간에 일곱 개의 금빛 반점을 회전시키더니 주먹을 마주 뻗었다.
콰르릉!
거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수련성의 오른팔은 바르르 떨리더니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제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한 걸음 더 나섰다. 동시에 수련성의 왼팔이 그에게 뻗어 왔다.
“비켜라!”
한제가 짧게 외친 순간 그의 눈에서 금빛 번개와 화염이 쏘아져 나갔다.
콰쾅!
굉음과 함께 수련성의 왼팔에는 수많은 균열이 일어났다. 한제가 쏘아 보낸 금빛 화염은 그 균열을 통해 스며들었고 작은 수련성들로 이루어진 왼팔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한제는 단 세 걸음 만에 거대한 수련성의 상공에 이르렀다.
그때, 용반자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결인을 그리고는 합장을 했고 두 손을 양쪽으로 펼쳤다. 그러자 수련성이 바르르 진동했고 그 안의 대지와 산봉우리가 붕괴했다.
그 와중에 두 개의 거대한 산맥은 맹렬히 솟아올랐다. 마치 두 개의 장대처럼 치솟은 두 산맥 사이의 거리는 1만 리에 달했는데 그 사이에 그림 한 폭을 건다면 펼쳐진 두루마리처럼 보일 듯했다.
“산수도! 연맹을 보호하라!”
용반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두 산맥 사이에는 왜곡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 그림처럼 보이는 파문이었다.
파문이 나타나자 수련성은 다시금 진동했고 왜곡된 파문에서는 산과 강 그림이 마치 혼을 가진 것처럼 그 안에서 빠져나와 용반자 앞에 모여들었다. 이내 그곳에는 길이가 1백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이 허상으로 나타나 점점 또렷해졌다.
산수도라면 한제도 탐랑의 병풍에서 본 적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탁본이었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진정한 우의 선계의 보물이었다.
“우의 선계가 붕괴했을 당시 수련자 연맹은 가장 먼저 그곳에 들어가 수많은 법보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있었지. 아마도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
한제는 산수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위력을 똑똑히 느꼈다.
또한 그 안에는 한 줄기 향불도 들어 있었다. 마치 산수도에 그려진 세상에 향불의 혼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산수도의 내력은 비밀스러워 그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산수도가 펼쳐지면서 거대한 흡입력이 뿜어져 나와 한제 역시 끌어당겨졌다. 그 순간, 한제는 지하마수에게 삼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우주 역시 급류를 타듯 산수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산수도에는 한 줄기 세월의 힘도 흐르고 있어 그 안에 빨려 들어가면 무궁무진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될 것만 같았다.
한제는 두 눈으로 금빛을 번득이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떨리는 그의 오른손은 산수도가 발휘한 흡입력에 수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쾅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바닥이 한제와 산수도 상공에 나타났다.
장문(掌紋)이 또렷한 손바닥은 금빛을 발했고 함께 흘러나온 한 줄기 짙은 선력이 곤허성역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