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2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상황을 빠르게 분석했다.
‘한데 그자는 왜 살육의 본원을 거두지 않은 걸까? 그자의 목적은 살육의 본원이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가 청수 사형에게서 얻어내려 했던 건 대체 뭐지?’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데 그때, 번개가 내리치듯 청수의 정수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던 가시가 번쩍 하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가시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정수리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그자는 윤회를 열기 위해 꽂아놓았다고 했지. 윤회⋯⋯ 윤회는 본디 실체를 갖추지 못한 허황된 것. 그렇다면 그자는 청수 사형이 살육의 본원 아래 윤회하게 하려던 것인가? 그게 무슨 쓸모가 있기에? 게다가 그는 자신과 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확신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청수 사형과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뜻인지도…’
한제는 생각을 이어갔지만 뭔가를 알 것 같다가도 다시 혼란에 빠졌다.
타락의 땅에서 탐랑을 만나 칠채 도인의 조각상을 얻은 후로 내내 안개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안개 너머에는 계내와 계외 모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그 비밀을 파헤칠 틈도 없이 운해성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전가 노인이 나타나 장존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도 한제는 추측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계내와 계외에서 반복되는 전쟁도 안갯속에 감춰진 비밀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작도 못하고 끝난 사랑
‘그자는 대체 무얼 찾는 거지?’
한제는 문득 현무의 등 안에 있던 결정을 떠올렸다. 그 결정은 일곱 빛깔 인영이 가져갔다.
콰르릉!
그때 갑자기 울려퍼진 우렁찬 소리에 한제는 생각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청수가 공의 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거대한 문은 진동하면서 열릴 조짐을 보였다.
한제의 눈에 갈망의 빛이 드러났다. 그는 세 번째 단계 수련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더욱 강해져야만 안갯속에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있고 그래야 모완을 살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터였다.
‘삶과 죽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 이 세 가지 본원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다행히 완성은 멀지 않았어!’
한제의 두 눈은 강한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도과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하나만 더 얻으면 완성할 가능성이 9할은 될 테니 머지않아 세 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거야!’
그때 청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공의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을 휘둘러 살육의 본원을 발휘한 그는 검은 눈을 빠르게 응집시켜 한 자루 장검을 형성하더니 낮게 포효하며 공의 문을 향해 휘둘렀다.
“오늘 이 선군은 도를 증명하여 공의 문을 열 것이다!”
장검은 검은색 살육의 폭풍이 되어 공의 문으로 돌진했다. 그 위력은 어마어마해 공의 문과 충돌한 순간 온 수련성이 진동했다.
콰르릉!
공의 문에는 미세한 균열이 줄기줄기 일었고 미처 열리기도 전에 쩍 벌어졌다.
한제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청수의 체내에서 발산된 살육의 본원은 한제가 여태껏 보았던 그 모든 본원의 힘보다 강력했다.
검기에 반 정도 무너져 내린 공의 문이 밀려나더니 그 안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부드러운 빛이 청수의 몸을 뒤덮었다. 무색(無色)의 그 빛이 체내로 스며들자 청수의 몸에서 발산되던 기운은 한층 증폭됐다.
이어서 청수에게서는 공열기 초기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살육의 기운을 품은 기운이었다. 또한 청수의 주위로는 수많은 허상이 나타났는데 모두 청수의 손에 죽은 이들이었다.
끝없이 나타나던 허상은 덜덜 떨며 청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질린 듯 그들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허상들은 바닥에 꿇어앉더니 청수를 향해 절을 했다. 허나 꿇어앉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청수를 바라보고 있는 허상도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청수 역시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자 여인은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따스한 눈길로 다가와 청수 앞에 섰다. 청수는 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당한 선군이자 살육의 본원을 가진 강력한 수련자 인간으로서 견뎌내기 힘들었던 고통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가 이 순간 한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마치 두 팔의 힘을 조금이라도 풀면 품 안의 여인이 그대로 흩어져 사라지기라도 하듯 꼭 끌어안은 채…‧.
아랫입술을 꼭 깨문 여인 역시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허나 그녀가 허상이듯 눈물 또한 허상일 뿐이었다.
청수의 품에 안긴 채 소리 없이 웃고 소리 없이 울던 그녀는 청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청수의 뺨을 가볍게 감쌌다. 하지만 그녀는 청수를 만질 수가 없었다.
청수는 비통한 눈빛으로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여인을 만질 수 없었다.
그때 마치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듯 여인이 청수의 팔을 관통해 뒤로 흘러가더니 서서히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함연!”
청수는 포효하듯 외쳤다. 자신이 공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여인을 애타게 불렀다.
단지 아내의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살육계를 파괴한 청수에게 함연은 즐거움과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지금 청수로서는 수만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를 다시 한번 잃게 된 상황에 비할 데 없는 고통을 느꼈고 아내의 혼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몸을 날렸다.
세 번째 단계? 필요 없었다. 아내의 혼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다. 설령 그 혼이 완전치 않더라도 방금 전처럼 만질 수조차 없는 허상에 불과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함연의 혼은 점점 멀어져갔고 깊은 슬픔이 담긴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처연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묵묵히 청수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한제는 재빨리 저물공간을 소환해 열 개 남짓한 고식엽을 꺼냈다. 이게 과연 도움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시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한제의 두 손이 그려낸 1백만 개의 금제로 인해 더욱 강력해진 고식엽은 점점 흩어져 사라지고 있는 여인의 혼을 향해 날아갔다. 이어서 한제는 혀끝을 깨물어 옅은 금빛이 도는 선인의 피로 고식엽을 감쌌다.
금색으로 물든 고식엽은 청수를 지나쳐 여인의 주위를 감싸더니 공간을 봉인했다. 그러자 흩어지던 여인이 몸이 다시금 응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다가선 청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여인 역시 청수를 꼭 끌어안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청수는 왼손을 휘둘러 오래된 뒤꽂이를 소환했다. 파멸된 살육계에서 가져온 그것은 이내 여인의 머리에 꽂혔다.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는 청수의 눈은 점점 더 깊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청수는 고개를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생명의 은인에게도 보이기 힘들 정도의 감사와 감격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곧 청수는 왼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공의 문을 여는 데 사용했던 검은 장검이 다시 나타나더니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여인을 제외한 모든 허상을 흡수한 검은 짙은 살육의 기운을 뿜어냈다.
“이한제, 이것에는 내가 부순 공의 문이 응집되어 있다. 나를 도와 공의 문을 열면서 공의 기운을 품게 됐고 내가 가진 살육의 기운도 품고 있으며, 내 혼의 힘도 품고 있다. 또한 살육의 본원으로 형성된 검이지. 이 검을 주마. 잘 제련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너 역시 살육의 본원을 갖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청수가 손을 휘두르자 검은 쉭 하고 날아가 한제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육의 기운에 한제는 간담이 서늘했다.
‘이 검은 완전하고 완성된 살육의 본원이다!’
이는 현재의 청수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이자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만들어낸 본원의 법보였다.
본원을 응집하여 법보를 만들어 공의 문을 파괴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화작족 선조나 남조상인, 천조상인, 주진, 영동 등 누구도 그런 행운을 얻지는 못했다. 홍삼자와 남운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청수가 한제에게 준 이 검의 가치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의 문을 열고 어마어마한 힘을 얻은 청수는 함연의 혼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그녀는 하나의 낙인이 되어 그의 마음에 찍혔다.
상대를 저물공간에 넣을 수도 있지만 청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제는 청수로부터 받은 살육의 검을 잘 거두었다. 운해성역에의 전투로 한제에게는 많지 않은 살육의 본원이 생겨난 상태였으나 아직 너무 미약했다. 그러니 청수로부터 살육의 검을 받게 됨으로써 한제의 본원은 드디어 여섯 개로 늘어난 것이다. 본원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전(戰) 자 문양은 일찍이 규칙의 반점이 되어 체내 깊은 곳에 새겨진 상태였다.
한제는 살육의 본원을 당장 제련하고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인과와 생사, 진실과 거짓의 본원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살육의 본원은 후에 공의 문을 타파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섯 개의 본원을 가진, 세상에 몇 없는 희귀한 수련자가 될 터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청수는 점차 흩어져 사라져가는 공의 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염룡의 피가 든 푸른 술병을 기울였다. 혀끝을 타고 흐르는 알싸함을 음미하며 그는 술병을 한제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묵묵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 황량한 수련성에서 사라져 가는 공의 문을 바라보았다.
한제는 청수에게 수련자 연맹 본부에 있는 칠채계에서 당시 그가 알아내기를 원했던 답을 찾았는지 묻지 않았다.
청수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놀잇감이라⋯⋯.’
청수의 표정이 점차 씁쓸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이내 염룡의 피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이 청수가 놀잇감이라… 크하하! 정말 재미있군. 하하하! 사제,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주겠나.”
청수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어려 있었기에 한제는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그때 내 시체가 온전히 남아 있다면… 나를 내 고향에 묻어다오. 묘비에 이름을 남기지는 마. 그저 한 줌 흙으로 스러지고 싶으니⋯⋯.”
청수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고향이 사라졌으면 어떻게 할까요?”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이 세상에 묻어다오!”
청수는 입가로 흐르는 염룡의 피를 소매로 훔쳐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제는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제가 사형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제 시체는 주작성에 묻어 주십시오. 조나라, 이가의 집 마당에⋯⋯.”
청수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두 사형제의 약속이었다.
염룡의 피는 매우 독했으나 한제도 청수도 취하지 않았고 이내 바닥나버렸다.
“사제, 내 여태 한 번도 묻지 않았군. 혹 후사가 있느냐?”
청수는 두 눈을 감은 채 고독한 빛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한제의 두 눈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염룡의 피를 들이켰지만 이제는 알싸한 맛보다는 찌르르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군. 내게는 딸이 하나 있다.”
감았던 두 눈을 떴을 때 청수의 눈빛은 더없이 씁쓸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찾지는 못했다. 어쩌면… 이미 영원히 떠났을지도 모르지.”
청수는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광기에서 정신을 차렸던 순간, 아내의 시체를 안고 애달프게 울부짖던 그 순간,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고여덟 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수많은 시체 뒤로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는 죽은 두루미를 안은 채 멍한 두 눈으로 자신을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제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윤회의 굴레를 거쳐 다시 태어났을 수도 있지. 허나 나는 그 아이의 왼쪽 어깨에 붉은 낙인을 하나 남겨놓았다. 그 낙인은 영원히 그 아이를 따라다닐 거야. 만약 언젠가 그런 사람을 보게 된다면 부디 잘 보살펴다오.”
그때 공의 문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