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4
천벌전주가 다급히 외쳤다.
“필요 없다.”
한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싸늘하게 대꾸했다.
천벌전주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잠시 넋을 잃었다.
그 사이 한제는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는 오른손을 곧장 거대한 도과 안으로 뻗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동도 느껴지지 않았고 한제는 그대로 홍삼자를 붙잡아 도과 밖으로 빼냈다.
홍삼자의 몸 곳곳에 얽혀 있던 수많은 선들도 한제의 손짓에 무너져 내렸다. 텅 비어 있던 홍삼자의 눈에도 점차 밝은 빛이 드러났다.
“나보다 이 도과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너희 장존도 마찬가지지.”
한제는 홍삼자를 내려놓고 오른손을 도과에 달린 가지 쪽으로 휘둘렀다. 붉은 검이 나타나 곧장 가지를 잘라냈고 한제는 도과를 손에 넣었다.
“말도 안 돼!”
천벌전주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한제가 이렇게 가볍게 홍삼자를 구해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난 이전에 도과 하나를 삼켜 완전히 흡수한 적이 있다.”
한제는 손에 쥔 도과를 거두어 넣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삼자의 눈빛은 점점 또렷해졌다. 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의 체내에서는 펑, 펑 소리가 울렸고 전신의 모공에서는 붉은 피 안개가 터져 나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정신을 차린 홍삼자는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정말 고맙네, 봉계의 지존!”
이내 고개를 들고 돌아선 그는 천벌전주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진구연, 너는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다. 난 널 죽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혈인(血人)으로 제련해 우리 계내를 위해 싸우게 해주지!”
이어서 몸을 날린 그는 한 줄기 붉은 빛이 되어 달려들었다.
천벌전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수준 높은 수련자였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이곳에 있는 네 명의 수련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천벌전주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으나 용반자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산수가 그의 사방을 에워쌌다.
청수 역시 오른손을 들어 천벌전주를 가리켰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다섯 갈래 균열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음월유청은 뼛속 깊이 스며들어 무시무시한 힘을 계속해서 발산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었고 두 눈에서 금빛을 번득였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금빛이 천벌전주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정(定)!”
일방적인 전투였다. 칠채계는 무너졌고 천벌전주 진구연은 홍삼자에게 붙들렸다.
용반자의 타오르고 있던 영혼은 홍삼자의 도움 아래 서서히 원래 상태를 되찾았다. 그는 부상을 안은 채 제자 중현자를 데리고 떠나 다음에 있을 계외와의 대전을 대비하기로 했다.
홍삼자는 한제에게 운해성역에서 봉계 지존의 이름으로 계내 수련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한제는 그 부탁에 응할 수 없었다. 세 개의 도과를 손에 넣은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내 저항력이 완전히 폭발하기 전에 세 갈래의 본원을 완성하여 공의 문을 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수는 떠났다. 푸른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비통함과 고독함을 품은 채 딸을 찾아 나섰다. 허나 과연 뜻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한제가 찾는다면 세상 끝에 이르렀더라도 바로 돌아올 것이다. 세상에서 청수가 신경 쓰는 사람은 딱 둘뿐이고 그중 하나가 사제인 한제이기 때문이다.
홍삼자가 자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은 계내 수련자들의 사기를 드높였고 소하를 되찾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희망을 줬다. 또한 천조상인의 죽음과 용반자의 가담, 천벌전주 포획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제 계내에는 더 이상 칠채계가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수십 년간의 전쟁 덕에 모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전사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 싸움에 질 경우 자신들에게는 죽음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홍삼자가 ‘봉계의 지존이 돌아왔다’고 밝히자 계내 수련자들의 눈에는 짙은 전의가 불타올랐다.
★ ★ ★
곤허성역과 운해, 소하, 나천이 맞닿은 곳. 여기에 수련성이 하나 있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 곳이었다.
이런 수련성은 4대 성역의 교차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 수련자들은 자유롭게 이런 곳을 오가며 필요한 것들을 거래하곤 했다. 덕분에 4대 성역은 점차 하나로 뭉치게 됐다.
곤허성역의 수련성 중 하나인 ‘일령’의 시장에서는 여러 성역에서 온 수련자들이 한데 섞여 시끌벅적하게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 수련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소하성역의 여자 수련자였다. 소하성역이 계외에 함락될 때 수많은 이들이 숨을 거두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의 반격으로 적지 않은 이득을 얻기도 했다.
이번에 소하성역을 되찾게 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덕분에 소하성역은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소하성역 여자 수련자들은 대부분 매우 아름다웠다. 또한 그들의 체향은 다른 세 성역 남자 수련자들의 넋을 빼앗을 정도였기에 소하성역 여자 수련자가 있는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띨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는 거래를 위해 오가는 수련자들에게 좌선할 장소를 제공해주는 객잔들도 있는데 각 객잔의 방에는 대량의 영석과 약간의 선옥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뒷배가 빵빵한 객잔에는 수준 높은 수련자들에게 원력을 제공할 때 쓰는 원옥(元玉)도 있었다.
이 수련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장의 동쪽 지역, 중간 규모의 객잔. 대청 곳곳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는 여러 수련자가 앉아 있었다.
수련자라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뭔가를 먹을 필요는 없지만 선과나 맛있는 술 또는 일반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음식들은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객잔은 거의 항상 꽉 차 있었다.
게다가 이런 곳은 계내와 계외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도우들과 친분을 쌓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의 신통술을 교환하기도 했다.
객잔의 북쪽 끝 탁자에는 여러 명의 수련자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중 어느 중년 문인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곁에 있는 도우에게 말했다.
“말했잖아, 난 봉계 지존과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하지만 그대들 중 누구도 믿지 않았지.”
맞은편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둘 다 미모가 상당했지만 나이는 차이가 있었다. 분홍색 도포를 입고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더 어려 보이는 여인은 호기심이 인 듯한 얼굴로 물었다.
“추 형은 어디서 봉계의 지존을 만나셨나요?”
그녀 곁에 앉은 보라색 옷차림의 여인은 약간 더 나이가 든 부인 같았다. 이 여인은 덤덤한 얼굴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허 낭자 추 도우의 말을 다 믿지는 말게. 이자는 매번 낭자와 같은 소하성역 여자 수련자를 만나기만 하면 이런 말을 한다네. 옆에서 저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게 생겼다니까. 으하하!”
중년 문인 곁에 앉아 있던 노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주작성에서 만났지. 그때 봉계 지존은 지금과 같은 강자는 아니었어. 결단기에 불과했지. 그런 그가 봉계의 지존이 될 줄이야!”
중년 문인은 노인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개무량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홍 옷의 여인은 고개를 돌려 보라색 옷차림의 부인에게 말했다.
“사저, 일전에 사저도 주작성 출신이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사저도 봉계 지존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 말에 중년 문인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보라색 옷차림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다른 탁자의 수련자들도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집중했다.
봉계 지존과의 친분을 과시하던 중년 문인은 얼른 보라색 옷차림의 여인에게 포권을 했다.
“난 추동수라 하네. 주작성 도우를 보게 되니 기쁘군. 방금 했던 말은 농담이었으니 개의치 않길 바라네.”
그때 곁에 앉아 있던 노인은 물론이고 주위의 다른 수련자들 역시 출신 성역을 불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포권을 해왔다. 특히 운해성역 수련자들은 더 다가와 깊이 절을 올리기도 했다.
봉계 지존은 그저 유명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모습들에 이들은 봉계 지존을 계내의 영혼으로 여겼다. 또한 봉계 지존이 곤허성역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곤허성역 수련자들은 다른 성역 수련자들에게 은근한 존중을 받기도 했다. 더불어 봉계의 지존이 곤허성역 중에서도 주작성 출신임이 알려지면서 주작성 출신 수련자들은 존경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주작성은 아주 작은 수련성이라 그곳 출신 수련자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오히려 주작성 출신 수련자들은 더욱 존중을 받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었던 주작성은 이제 한제 한 사람 덕분에 계내 수많은 수련자들의 존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아무래도 불편한지 보라색 옷차림의 여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더니 주위 수련자들에게 맞절을 하고는 사매에게 답했다.
“어쩌면 그를 본 적이 있을지도⋯⋯.”
여인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고 주위 수련자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가 본 사람이 정말로 그인지는 잘⋯⋯.”
여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 사저, 그냥 말씀해주세요.”
분홍 옷의 여인이 재촉했다.
“그때 그 사람은 자신을 마량이라고 했어. 당시에는 막 축기기에 이른 상태였지. 아주 냉담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어. 역외 전장에서 우리와 함께 화분국으로 돌아갔는데 만약 그가 정말로 봉계의 지존이라면… 그와 이모완은 그곳에서 알게 됐을 거야. 모완은 나와 가장 친한 벗이었어.”
여인은 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위 수련자들은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주작성 수련자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객잔에서 단 한 사람, 반대편 탁자에 홀로 앉아 있는 검은 옷차림의 청년만은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감히 다가서기 힘들 만큼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그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스승님⋯⋯ 어디 계시는 겁니까?’
청년은 술잔을 비우더니 멍하니 객잔 밖을 내다보았다. 한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몸을 바르르 떨며 객잔으로 막 들어서는 백의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자홍
“그때 주작성은 반쯤 폐허가 된 수련성이었어. 화분국에서 수준이 가장 높은 수련자도 원영기에 불과했지.”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주작성을 떠난 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의 기억은 머릿속에 깊게 새겨져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화분국에 재난이 닥쳤을 때 어쩔 수 없이 선무국으로 피난을 가려 했어. 하지만 선무국에서는 화분국 백성들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고 결국 두 나라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지.”
여인은 당시의 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 중얼거렸다.
“마량⋯⋯ 어쩌면 그가 정말로 봉계의 지존일지도 몰라. 축기기 수련자에 불과했던 당시에도 두각을 드러냈으니까. 소문에 의하면 그는 같은 수준의 수련자를 백 명도 넘게 죽였다고 해.”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사방의 수련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같은 수준의 수련자를 백 명 이상 죽였다니, 그건 말도 안 돼!”
“안 될 게 뭐 있어? 그가 봉계의 지존이 맞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일 텐데…”
수련자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그때, 객잔에 들어선 백의의 사내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흑의의 수련자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절을 하려는 흑의의 수련자를 말리고는 씩 웃어 보였다.
“스승님⋯⋯.”
흑의의 수련자 십삼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한제의 모습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소하성역의 칠채계를 처리한 한제는 주작성을 찾아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인과와 생사, 진실과 거짓의 본원을 제련할 계획이었다. 한데 이동하던 중 십삼과 고요 분신의 기운을 느끼고 잠깐 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