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5
한제는 훌쩍 성장한 십삼을 보자 기뻤고 위안이 됐다. 그는 요령의 땅에서 처음 봤을 때의 십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의 굳건한 의지와 충성심은 1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갈수록 나의 옛 모습을 닮아가는군.’
한제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십삼의 몸에서 흐르는 서늘한 기운은 주작성에 있었을 당시 자신이 풍겼던 기운과 매우 비슷했다.
십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살짝 젓는 한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에 담긴 존경심을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에게 한제는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삶을 완전히 바꿔준 상대에 대한 감사함을 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전쟁 도중 그에 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어. 사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화분국을 떠나려고 준비 중이었거든.”
주위의 수련자 중 누구도 방금 들어선 백의의 청년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말에만 집중했다.
“나중에서야 듣게 됐어. 이모완을 구한 그가 결단기 수련자에게 쫓기다가 주작성에서 위험하기로 소문난 수마해로 갔다는 것을…”
여인의 가냘픈 목소리가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제는 술을 한잔 들이켠 뒤 미소를 지었다. 결단기 수련자에게 쫓기다가 절망감 어린 눈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모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십삼은 술병을 들어 스승의 잔을 채워주었다.
“주 낭자 당시 봉계의 지존을 쫓았던 그 되먹지 못한 수련자는 대체 누구요?”
“그건 기억나지 않아. 그 후 다시는 마량을 보지 못했어.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이한제라는 수련자가 주작성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지. 원래 조나라 수련자인데 축기기에 이르렀을 당시 등씨 성의 원영기 수련자를 건드려 온 가족을 잃게 됐다더군.”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수련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당시의 봉계 지존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조나라를 피바다로 만들고 우리 주작성을 큰 충격에 빠뜨렸어. 그의 가족을 죽였던 원영기 수련자와 그자의 가족들을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지. 여인이나 어린아이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어. 모든 등가 사람들의 목숨을 끊어놓은 거야. 당시 조나라는 하늘까지 붉게 물들었다고 해.”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냉혹하고 잔인한 내용에 수련자들은 어마어마한 살기와 원한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귓가에는 당시 가슴에 사무친 원수를 갚은 봉계 지존이 내질렀을 우렁찬 포효가 맴도는 듯했다.
말없이 술을 마시던 한제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십삼은 곁에서 한제의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었다. 다른 수련자들처럼 그 역시 한제의 과거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술을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은 한제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는 집과 부모님이 너무도 그리웠다. 얼른 돌아가 제사를 지내고 싶었다.
“가자.”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십삼 역시 일어서더니 영석 몇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과거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대부분 소문으로 들은 것들이야. 그는 주작성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곳을 떠났지. 주작성에는 그의 조각상이 수호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지.”
그때 뭔가를 느낀 여인은 말을 멈추고는 객잔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십삼을 지나친 그녀의 시선이 한제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저 사람, 어딘가 익숙한데⋯⋯?’
한제는 객잔의 문에 걸린 발을 걷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곧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보라색 옷차림의 여인과 눈을 맞춘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은 뒤 객잔을 나섰다. 십삼이 뒤를 따랐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뇌리에는 방금 전 나간 사내의 웃는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그 얼굴은 그녀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모습과 조금씩 겹쳐졌다.
“저, 저 사람은⋯⋯?”
여인의 심신이 마구 진동했다.
“그 사람이야!”
“사저, 왜 그러십니까?”
곁에 앉아 있던 분홍 옷의 여인이 당황하다가 사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객잔 문에 걸린 채 살짝 흔들리고 있는 발뿐이었다.
다른 수련자들도 분분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도 별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니야.”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 그녀의 이름은 주자홍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허나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방금 미소를 짓던 한제의 얼굴로 가득했다.
★ ★ ★
일령성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십삼은 한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스승님, 제자는 스승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십삼, 넌 내가 거둔 첫 번째 제자다. 또한 나를 가장 오랫동안 따른 사람이기도 하지.”
한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십삼을 바라보았다.
십삼은 감격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한제는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어린 새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홀로 풍파를 견디고 모진 세상을 이겨내야만 하지. 넌 여태 아주 잘해왔다.”
한제는 십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스승님⋯⋯.”
십삼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십삼. 이 이한제의 제자는 보호 아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응당 하늘에 저항하고 맞서야만 해! 또한 인간 사이의 용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하늘 그 위로 날아올라야 한다. 수많은 수련자가 입을 모아 ‘저자가 바로 이한제의 첫 번째 제자’라고 칭송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스승님!”
십삼은 감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너를 해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난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허나 앞으로 너는 나의 첫 번째 제자로서 네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한제는 자신의 제자들 중 가장 큰 애정을 품고 있는 십삼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강력한 위엄이 담긴 형태 없는 파문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법보는 주지 않겠다. 본원의 씨앗 하나만 남겨주마!”
한제는 십삼에게 천둥번개와 화염의 본원에 대한 깨달음을 씨앗으로 심어두었다.
십삼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한제의 손이 이마에 닿은 순간 하나의 금빛 씨앗이 마음속에 응집되었고 그 안에는 세 번째 단계에 속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또한 한제의 혈맥도 담겨 있었다.
이 씨앗은 어떤 법보보다도 귀한 것이었으나 한제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의 첫 번째 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만 가야겠구나.”
십삼을 바라보던 한제는 몸을 돌려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마치 자식을 보는 아버지와 같은 눈으로 십삼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하는 일을 하거라.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살 수 있다면 아무리 큰 재난이 닥쳐온다 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스승이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너만은 꼭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길 바란다.”
십삼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떠나가는 스승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꿇어앉은 채 바닥에 머리를 아홉 번 찧었다.
한제는 왔을 때도 그랬듯이 홀로 묵묵히 우주를 나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고요의 조각상을 흡수할까 고민하다가 우선은 저물공간에 넣어두었다.
아직은 체내에서 폭발하려는 저항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흡수해야만 최상의 효과를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요의 조각상이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같은 이유로 나천성역에서 잡아들인 고요도 아직 저물공간에 봉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고요에게는 살아남을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할 때와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속도로 나아갔다.
그는 우의 선계에는 가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광인을 데려와야 할 때였다.
★ ★ ★
곤허성역 한쪽 가장자리의 7급 수련성. 수많은 작은 수련성에 둘러싸인 이곳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그 주위의 우주에는 수련성이 듬성듬성 있는 정도였기에 방문자도 많지 않았다.
때는 가을이었다. 한 일반인 도시 위로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작고 소박한 도시였다.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점포의 일꾼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하품을 쩍쩍해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람에 낙엽이 흩날렸다. 그중 낙엽 하나는 회오리에 휩쓸린 듯 빙글빙글 돌다가 으쓱대며 막 골목으로 들어서던 사람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뒤에서 굽실거리며 따르던 두 사람이 손바닥을 비벼가며 중얼거리는 아첨에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차였다.
허나 그의 호탕한 웃음은 느닷없이 뺨을 갈긴 낙엽 때문에 뚝 끊겨버렸다. 그는 얼굴에 붙은 낙엽을 떼어 내던지더니 마구 짓밟았다.
“낙엽 따위가 감히 이 몸의 옥안(玉顔)을 건드려!”
때마침 또다시 불어온 바람이 사내에게 짓밟혀 너덜너덜해진 낙엽을 다른 곳으로 쓸어 간 후에야 사내는 발길질을 멈추었다.
사내는 다름 아닌 광인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손바닥을 비벼대던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허이국과 유금표였다. 그들은 이미 광인의 과격한 행동에 익숙해졌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유금표, 설마 저자가 우리 꿍꿍이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허이국이 신식으로 말을 걸었다.
“안심하세요, 허 영감님. 제 분석에 따르면 저자는 진짜 미쳤습니다. 그러니 절대 우리의 속을 읽어내지 못할 겁니다.”
유금표의 대답에 허이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금표의 판단에 믿음이 있었다. 이들은 지난 며칠간 합심하여 광인을 속여가면서 적지 않은 이득을 봐온 바 있다.
이내 허이국은 얼른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가 광인의 어깨를 주무르는 한편 날아가 버린 낙엽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감히 우리 임금님을 업신여기다니! 임금님, 지금이라도 저걸 가져와 태워버릴까요?”
광인은 손을 휘저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됐다. 사소한 낙엽 따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허이국, 네가 말한 그 계집은 어디에 있느냐? 얼른 안내하거라. 만약 나를 만족시킨다면 내 상을 줄 것이다.”
허이국은 상이라는 말에 두 눈을 번득였지만 곁에 있는 유금표는 덤덤한 얼굴로 헛기침만을 해댔다.
“임금님, 이전에 소개해드렸던 여인들은 모두 마음에 차지 않으셨겠지만 이 허이국이 온갖 노력을 들여 찾아냈으니 이번만큼은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한데⋯⋯.”
허이국이 말을 맺기도 전에 광인은 오른손 검지를 깨물어 피를 한 방울 내더니 허이국에게 묻혀주었다. 그러자 허이국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조심스레 그 피를 닦아내 잘 거두었다.
그때쯤 유금표의 눈도 반짝였다. 애써 덤덤함을 유지하며 그는 끊임없이 허이국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