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7
유금표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그간 제가 속인 이들은 대부분 수준이 아주 높고 똑똑했지요. 허나 저 광인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이전처럼 복잡하고 치밀한 속임수보다 오히려 가장 간단한 수가 통하더군요. 허점이 그리 많았는데도 원하는 걸 얻게 됐으니 다행입니다.”
허이국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어. 이번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다른 곳도 몇 군데 더 들러야 하니까. 모든 작업이 끝나면 마무리도 잘해야 해. 만약 이한제 그 녀석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말을 끊은 허이국은 바르르 떨더니 시간을 계산했고 옥패를 하나 부수었다.
그때, 동굴 안의 전송진에서 다시 빛이 피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열 명이 넘는 수련자가 나타났다. 험악한 모습의 그들을 이끄는 것은 얼음처럼 서늘한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수련자들을 이끌고 동굴 깊은 곳으로 향했다.
허이국, 유금표는 머지않아 그 수련자들과 마주쳤다. 한데 양측 수련자는 모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허이국은 방으로 달려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임금님, 큰일 났습니다!”
그는 영체의 기운을 한 움큼 뱉어내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더니 픽 쓰러져 버렸다.
유금표도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여자 수련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열 명 남짓의 수련자들과 함께 곧장 방의 장막을 걷어버렸다.
장막 안에서는 광인이 법화자의 맞은편에 앉은 채 멍한 얼굴로 그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 이 몸은⋯⋯ 이 몸은⋯⋯.”
광인은 두려움으로 두 눈이 흔들렸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닥쳐라! 감히 이런 짓을 벌여?”
여자 수련자는 냉랭한 눈으로 광인을 노려보았다. 그녀 뒤에 선 수련자들도 노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뭐? 우린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난 그저 이 계집의 이름을 물었을 뿐 아무 짓도…”
광인은 다급하게 변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가부좌를 튼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흑의의 청년은 뭔가 켕기는 표정으로 일어나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제기랄, 미친놈 하나 속이자고 계집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한데 저 작자는 남색을 밝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왜 굳이 남자를 계집이라 부르는 건지는 알 수가 없군. 뭐, 미친놈의 생각을 이해하려 드는 게 이상한 거겠지.’
법화자가 씁쓸한 속을 달래는 동안 여자 수련자는 역겹다는 눈빛으로 광인을 위아래로 쓸어보았다.
“어디서 변명이냐? 네 녀석이 남색을 밝히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허나 감히 내 남편을 건드리려 들다니! 네 피로 여기 있는 열 개의 동이를 채워라! 그러지 않으면 저 녀석들을 죽일 것이다!”
여자 수련자는 역겹다는 듯 광인을 노려보다가 소매를 휘둘러 열 개의 동이를 소환했다. 동시에 그녀는 허이국과 유금표를 붙들었다. 날카로운 칼에 찔린 허이국은 초췌한 얼굴로 울부짖었다.
“임금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도망치십시오!”
유금표 역시 피범벅이 된 채 비명을 질렀다.
“임금님! 저희는 임금님 때문에 이렇게 붙잡힌 겁니다! 부디 관대하신 임금님께서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백의의 사내가 서늘한 눈빛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허이국, 유금표! 겁도 없구나! 대단해, 아주 대단해!”
악당을 벌하다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유금표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바들바들 떨며 뒤를 돌아본 그는 혼비백산하며 털썩 소리가 나도록 꿇어앉았다.
“쿨럭!”
이번에 토해낸 피는 너무도 큰 충격에 솟구쳐 오른 진짜 피였다.
속임수에 뛰어난 유금표라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한제의 날카로운 눈빛에 심신이 울렸고 육신은 갈기갈기 찢어질 듯했다. 짙은 살기가 어린 무시무시한 눈빛에 머리가 저릿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는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쾅, 쾅 소리와 함께 부딪힌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게 거짓 비명을 내질렀던 허이국 역시 한제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영혼에서 비롯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심지어 영체가 거의 무너져 흩어질 뻔했다.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 초췌해진 몰골로 천천히 몸을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주, 주인님!”
허이국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진짜 공포와 두려움이 담긴 비명이었다.
“주, 주인님, 살려주십시오! 이 일은 주인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일은⋯⋯.”
한제와 가장 오랜 시간 붙어 있었던 허이국은 두려움이 극에 달한 와중에도 유금표보다는 용감하게 변명을 시작했다. 허나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 한제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애걸복걸할 기세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머지 수련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허나 이내 그들도 한제의 냉정한 눈빛에 피를 토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여자 수련자 역시 창백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고 두려움에 바르르 떨었다. 자신의 스승은 물론 지금까지 봤던 어떤 강자조차 눈앞의 사내 앞에서는 감히 저항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너, 넌 누구냐!”
그녀는 힘겹게 내뱉었으나 목소리만큼은 두려움으로 떨렸다.
저 멀리 서있는 법화자 역시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제를 향한 그의 눈은 왠지 감격한 듯했다. 그는 한제의 정체가 짐작이 됐으나 감히 믿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광인은 스승을 보자마자 억울해 죽겠다는 듯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여러 사람들을 지나쳐 한제 곁으로 달려가더니 대성통곡했다.
“저놈들이 나를 속였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저 계집의 이름만 물어봤을 뿐인데!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허이국이 재미있게 놀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뭘 하기도 전에 저놈들이 들이닥쳤어!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흑흑. 난 진짜 아무것도…”
생각할수록 억울했던지 광인은 이내 엉엉 울어버렸다.
뭔가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허이국이 막 입을 열려는데 한제가 오른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끄아악!”
그 가벼운 손짓에 허이국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영체의 기운을 토했다. 그는 거의 투명해진 상태로 벽에 처박혔고 그 순간 벽에 드리워져 있던 금제가 번쩍이면서 그는 또다시 튕겨 나갔다.
한제의 손짓 한 번에 허이국은 수준의 3할 이상이 파괴됐고 영체 상태인 몸도 금방 무너져 내릴 것처럼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신의 고통은 그보다 훨씬 컸기에 허이국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주,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위해 공을 세우고 피를 흘렸습니다! 주인님, 주작성 거마족의 선조를 기억하십니까? 아직 기억하시죠?”
허이국은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자신이 한제를 위해 했던 일들을 재빨리 언급했다.
“그 덕분에 네 수준의 3할만 파괴한 것이다!”
한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는 광인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한데 광인을 잘 모시라는 명령에 허이국은 대담한 일을 꾸몄다. 허이국의 말처럼 그가 지난날 자신을 위해 행한 여러 일들이 없었더라면 가장 오랫동안 자신을 따른 자가 아니었다면 즉각 소멸시켰을 것이다.
한제는 끊임없이 머리를 찧으며 벌벌 떨고 있는 유금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안 변한다더니 역시 그런가? 유금표, 넌 나를 실망시켰다! 화작족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풀어주겠다고 약조하기도 했다. 이번에 내 명대로 저자를 잘 모셨다면 큰 선물도 줄 생각이었다.”
한제의 냉랭한 목소리에 유금표는 몸을 달달 떨었고 더욱 빠르게 바닥에 이마를 찌었다.
한제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바람이 휙 하고 날아갔고 유금표는 피를 토하며 수십 척이나 나가떨어졌다.
“네가 세운 공은 이것으로 상쇄되었다. 앞으로 자유는 꿈꾸지 말고 내 노예로서 1천 년을 살아라!”
한제의 말에 유금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처벌이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봉계 지존! 봉계 지존이구나!”
그때, 법화자가 열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확신하지 못했으나 한제가 주작성과 화작족을 언급하자 확신이 든 것이다.
그는 재빨리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그러자 주위의 수련자들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일제히 절을 올렸다.
“봉계의 지존을 뵙습니다!”
멍하니 서 있던 여자 수련자도 숭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는 법화자의 말을 다른 누구보다도 신임했고 저 정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자라면 봉계의 지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제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흑의의 청년을 쳐다보았다.
“나를 본 적이 있느냐?”
잔뜩 흥분한 얼굴로 법화자는 얼른 앞으로 나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나천성역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첫 번째 전쟁이 발발해 나천성역 편에서 싸웠습니다. 당시 멀리서나마 봉계 지존을 뵌 적이 있지요.”
그는 대답을 하면서도 한제 뒤에 선 광인을 힐끔거렸다.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의 그는 뭔가 변명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말없이 동굴 안의 수련자들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수련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큰 압박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잠시 후 덤덤하게 외친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허이국과 유금표, 그리고 광인을 데리고 허공에 나타난 파문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뒤에야 고개를 든 수련자들은 떨리는 심장을 안은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책역자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때문에 봉계 지존께서 나를… 하아, 허이국에게 속아 넘어간 게 잘못이지. 광인을 속이는 일에 동참하다니⋯⋯.”
깊은 부끄러움에 법화자는 한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후회했다.
그는 한제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우연히 봉계 지존을 만나는 날을 수도 없이 많이 상상해왔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아니었다.
책역자 역시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전부 허이국 때문이야.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어!”
한편, 우주로 나온 한제는 유금표와 허이국에게서 금색 피를 압수하고는 그들을 저물공간에 집어넣은 후 나아가고 있었다. 뒤에서는 광인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쉴 새 없이 나불대는 중이었다. 그의 형편없는 기억에도 이번 일은 꽤나 깊게 각인된 모양이었다.
“사람만큼 무서운 게 없다더니⋯⋯. 영석과 은은 중요해. 중요하고말고! 앞으로 영석이나 은을 얻게 된다면 잘 세어두고 멋대로 낭비하지 말아야지. 절대 낭비하지 않을 거야!”
이 일이 광인의 성격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켰으리라고는 한제로서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영석과 은을 가지게 되면 광인의 쩨쩨함과 인색함은 극에 달할 터였다.
끊임없이 중얼대는 광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제는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졌다. 광인은 기억 속의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았다. 계외 태고 성신에서 한 번 본 적 있던 있으나 지금은 거의 잊은 누군가를.
한제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방금 그 생각은 너무도 허황되고 우스웠기 때문이다.
우주는 잠들어 있는 검은 바다처럼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반짝이는 별들은 어머니의 눈처럼 깜빡거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한층 더 쓸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