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8
남은 가족도 없는 이들은 더욱 깊은 슬픔에 한숨만 내쉬게 될 뿐이었다.
수련자도 감정과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가끔은 오랜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날 속인 놈에게 너무 가벼운 벌을 줬어. 허이국 그 망할 자식을 돼지 새끼로… 아니, 낙엽으로 바꿔버려서 흠씬 짓밟아줬어야 하는 건데! 유금표 그 녀석도! 흥! 날 속인 녀석들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고작 1천 년간 노예라니!”
광인은 한제의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한제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먼 우주만을 내다보고 있자 광인은 결국 말을 멈췄다. 대신 그는 한제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포효했다. 한제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일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한제는 묵묵히 주작성으로 향했다. 그는 눈을 감고도 주작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신통술과는 무관한 능력이었다. 주작성에는 그의 혼을 슬프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광인은 갈수록 격렬하게 포효하다가 이내 버럭 외쳤다.
“낙엽으로 변신시키라니까! 내가 짓밟을 수 있도록!”
“그만!”
광인이 수천 번이나 포효하다가 외치자 한제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상대를 움켜쥐었다.
“조용히 해.”
한제가 노려보며 말했지만 광인은 그 와중에도 꽥 소리를 질렀다.
“낙엽으로 바꾸라니까!”
한제는 참지 못하고 미간을 팩 찌푸렸다.
“낙엽으로 바꿔! 낙엽으로! 낙엽으로!”
꼭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너도 녀석들의 꿍꿍이를 진즉 알아챘을 텐데?”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한제가 물었다.
“어⋯⋯ 어? 어어… 이, 이 몸은… 몰랐어.”
광인은 멍하니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광인을 바라보다가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네가 녀석들에게 준 피는 쓸모없는 것이었어. 그 전부를 합쳐서 제련한다고 해도 너의 진짜 피 반 방울의 가치도 안 되지! 결국 너 역시 그들을 속인 거지. 허나 나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마. 유금표와 허이국에게 내린 벌은 그걸로 충분하니 그 이야기도 여기서 끝이다.”
한제는 광인을 등진 채 말했다.
눈을 깜빡이던 광인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더니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나처럼 똑똑한 사람이 어찌 그놈들에게 속아 넘어가겠느냐? 놈도 그리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지만 너무나 못됐어. 내가 내 피의 귀중함을 잘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내 피 한 방울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한제가 저 멀리 가버리자 얼른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의아한 듯이 한제를 살피다가 지하마수의 체내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상대로부터 느꼈던 그 느낌을 받게 됐다.
한제는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저 멀리 한 줄기 짙은 영기를 발사하는 수련성이 나타났다. 이 작은 수련성을 본 순간, 한제는 몸을 가늘게 떨면서 멈춰 섰다.
묵묵히 그 수련성을 마음속 깊이 새겨진 고향을 바라보던 한제의 눈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얼굴들은 한데 모여 주작성에서의 삶을 형성했었다.
한제의 얼굴은 더욱 깊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사람은 변해도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던가. 하지만 한제는 사물조차 한결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주작성은 강력한 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진은 지속적으로 가동되면서 파문을 바깥쪽으로 퍼뜨렸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저런 진은 없었다. 아마도 배치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으리라.
뿌리를 찾은 낙엽
한참이나 주작성을 바라보던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나아갔다. 광인은 덩달아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주작성을 살피며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떨어진 우주 끄트머리에서 몇 갈래의 빛이 다가왔다. 빛에 휩싸인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은 한제와 광인을 지나쳐 주작성으로 향했다.
“이곳이 바로 주작성이다. 봉계 지존의 고향이지.”
진 근처에 이르자 사내 중 한 명이자 유일하게 나이가 든 노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작성 안에서는 절대 말썽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곳은 곤허성역뿐만 아니라 우리 계내의 성지다. 수많은 수준 높은 수련자가 봉계 지존을 위해 이 수련성을 지키고 있음을 잊지 말거라!”
노인의 당부에 세 명의 젊은 수련자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욱 공손한 눈으로 주작성을 바라보았다.
한제가 진과 그 안의 수련성을 슬픈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심심함을 참기 힘들었던 광인은 문득 허이국과 유금표가 그리워졌다.
‘그 녀석들, 나를 속이려 하긴 했지만 내게 극진하긴 했지.’
재미난 일이 없나 사방을 기웃거리던 광인의 눈이 이내 수천 척 너머 네 명의 수련자에게로 향했다.
“하하! 거기 세 계집, 이름을 말해보아라. 내 상을 주마!”
광인은 경박하게 웃으며 네 수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에 수련자들은 흠칫 놀랐다. 특히 그중 유일한 여자 수련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너 말고 나머지 세 명의 계집들 말이다! 이름을 밝혀봐라!”
광인은 잔뜩 흥분한 채 소리쳤다.
그들은 그제야 상대가 제정신이 아님을 눈치챈 듯했지만 덤덤한 노인과 달리 두 청년 수련자는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저자는 남색을 밝히는 자인가 아니면 단순히 정신이 나가서 남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두 청년은 머지않아 ‘미친 것도 맞고 남색을 밝히는 것도 맞다’는 결론을 내렸고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들이 화를 내려는 순간, 노인이 손을 뻗어 제자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광인이 아니라 그 뒤에서 추억을 더듬는 듯한 눈빛으로 주작성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제에게 닿아 있었다.
“도우 역시 봉계 지존의 고향을 순례하기 위해 온 모양이군. 이곳은 고귀한 성지와도 같은 곳이니 부디 도우의 일행이 결례를 저지르지 않게 해주게.”
말을 마친 노인은 시선을 거둔 뒤 소매를 휘둘러 세 제자와 함께 주작성의 진을 향해 다가갔다.
제자들, 특히 두 청년은 혐오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광인을 노려보았으나 말없이 스승의 뒤를 따랐다.
광인은 기분이 상한 듯 입을 비죽였다.
“비싸게들 구는군. 그저 이름을 물은 것뿐인데 저리 노려볼 건 없잖아.”
한제는 말없이 광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진을 향해 다가갔다.
앞선 네 수련자가 진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진이 번득이더니 허상처럼 흐릿한 두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전광과 같은 눈빛으로 네 수련자를 둘러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소하성역 명매성(明枚星)의 도덕자라 합니다.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성지순례를 왔으니 부디 진을 열어주십시오.”
진중한 표정의 도덕자는 허상의 두 노인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주작성은 계내 모든 수련자에게 개방되어 있다. 규칙은 알고 있겠지?”
허상의 두 노인 중 한 명이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주작성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고 주작성의 어떤 것도 파괴해서는 안 되며, 오직 사흘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도덕자의 말에 두 노인은 동시에 결인을 그리더니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이 밝게 번득이더니 주작성과 연결된 계단이 나타났다.
도덕자는 포권을 한 뒤 감격한 모습의 세 제자를 이끌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 역시 광인과 함께 그 계단을 통해 주작성으로 나아갔다.
허상의 두 노인은 그를 막지는 않았지만 냉랭한 눈으로 한제와 광인을 여러 번 살폈다. 그리고 모두가 진 안으로 사라지자 그중 한 노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입을 열었다.
“저 백발,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아.”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런데. 허나 대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더군.”
잠시 고민하던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흩어져 사라졌다. 주작성을 두른 진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고 발산되던 빛도 곧 약해지다가 자취를 감췄다.
한편, 계단을 따라 내려간 한제와 광인은 잠시 후 주작성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서게 됐다.
한제의 눈에 비친 주작성은 이제 낯선 곳이었다. 산과 강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이전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지에는 녹음(綠陰)이 우거져 바람에 따라 싱그러운 풀 내음이 퍼져 나갔다.
“재미있는 곳이군! 저기 산을 봐라, 하하! 너무나 조악해. 내가 만들어도 저것보다는 낫겠다.”
광인은 계단과 이어진, 주작성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리키며 킬킬댔고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자 앞서 가던 네 명의 수련자 중 세 제자가 몸을 홱 돌려 광인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조각상처럼 다듬어진 산은 도포를 입은 수련자의 모습이었다. 왼손으로는 결인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거대한 개천부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조각상의 눈에는 하늘과도 맞설 법한 위엄이 어려 있었다.
계단은 그 조각상과 같은 산 아래쪽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주작성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거대한 산을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각상과 같은 거대한 산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운해성역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에서의 한제를 묘사한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조각상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흐릿하고 불분명해 생김새를 자세히 분간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운해성역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화작족 선조와 남조상인을 죽이고 봉계의 진에 벌어진 틈을 홀로 막아 선 봉계 지존의 위풍당당함을 담아낸 조각상이다!”
노인의 설명에 광인을 노려보던 세 제자는 다시 조각상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경건한 눈으로 감탄했다.
“그 전쟁 이후 봉계 지존의 이름은 계내에 널리 알려졌고 모두가 그분이 이곳 주작성 출신임을 알게 됐지. 이에 수준 높은 몇몇 선배님들과 주작성 주무태가 이 자리에 봉계 지존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는 묵묵히 그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산봉우리가 당시만 해도 주작국의 성지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은 변한 상태였다.
이런 변화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는 광인과 함께 먼 곳으로 나아가 네 수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한 청년이 차게 내뱉었다.
“저런 저속한 자들이 감히 봉계 지존의 출신지에 성지순례를 오다니!”
곁에 있던 젊은이들도 노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니 저들은 곧 주작성 차원에서 벌을 받게 되겠지. 어떤 참혹한 꼴로 이곳을 떠나게 될지 두고 보자고.”
그 무렵, 한제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아래를 살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고 그 점이 그를 더욱 외롭게 했다. 그 변화 때문에 고향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고 고독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그의 마음만 그대로인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한제는 조금이라도 익숙함을 느껴보려 했지만 눈 닿는 곳마다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