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20
“감히 봉계 지존의 생가에 난입하…”
허공에 파문이 일더니 도덕자가 잔뜩 분노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무덤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젖어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한제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명석한 수련자이자 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을 확인시켜주듯, 눈앞에 무릎을 꿇은 수련자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한제가 돌아왔습니다.”
허공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덕자는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떨었다.
한제는 도덕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묘비만을 어루만졌다. 묘비는 매우 차가웠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무덤에 떨어져 흙을 적시며 그 아래 묻힌 부모님께로 스며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한기와 마음에 느껴지는 온기, 흐르는 눈물과 그 눈물로 젖은 무덤. 한제는 그렇게 부모님의 묘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융합으로 인해 한제의 몸에서 피어난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운 기운이 무덤을 감쌌다. 허나 한제는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듯 계속해서 눈물만 흘렸다.
허나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도덕자는 헉 하고 찬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에는 분명 한제의 왼편에 한 명의 여인이 허상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 허상은 너무도 흐릿해 바람 한 점만 불어도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비록 여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슬픔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서 묘비를 바라보다가 한제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멀리서 보면 그 허상의 여인과 한제는 부모님의 제사를 올리는 부부처럼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의 오른편에는 또 하나의 허상이 나타났다. 20대의 청년으로 보이는 그 허상은 한제와 무척 닮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의 허상이 나타난 순간 곁에 또 다른 여인의 허상이 나타났다.
슬픈 눈으로 무덤을 바라보던 그들 역시 함께 무릎을 꿇었다.
네 가족이 모인 듯한 이 광경은 따뜻해 보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하하하! 재미있다! 재미있어!”
그 순간 적막을 깨뜨리며 저 먼 하늘에서 쉭 소리와 함께 광인이 나타났다. 그 뒤로는 도덕자의 세 제자가 고함을 내지르며 광인을 쫓고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노인 근처에 이르렀다.
노인은 얼른 세 제자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뒤이어 그가 부릅뜬 눈으로 눈짓을 하자 세 명의 제자들은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숙여 아래쪽의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편 광인은 방금 전까지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쫓던 세 수련자가 우뚝 멈춰 서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오래된 집 뜰에 착지했다. 이어서 멀지 않은 곳에 무릎을 꿇은 한제를 발견하고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한제 곁에 나타난 세 개의 허상을 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한제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꿇어앉아 묘비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해가 빠르게 졌고 격렬하게 번득이던 진 안으로 주작성의 수준 높은 수련자들이 들어섰다. 이어서 열 개가 넘는 빛줄기를 그리며 날아든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왔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던 그들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한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작성 출신으로서 이전에 한제를 만난 적 있던 이들이 동시에 외쳤다.
“봉계 지존!”
“이한제!”
이들의 탄성에 다른 수련자들도 거의 경련을 일으켰다.
도덕자의 세 제자 역시 휘둥그레 뜬 눈으로 광인과 한제를 번갈아 보았다. 무례하고 경박하다 비웃었던 자들이 봉계 지존과 그 일행이라니…
그때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가 밝아지는가 싶더니 붉은 구름이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왔다. 구름 안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붉은 도포를 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자연스러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는 다름아닌 주작성의 주인, 주무태였다.
연기와 같은 과거
한제를 묵묵히 바라보던 주무태가 이내 입을 열었다.
“돌아왔군.”
고개도 들지 않고 묘비만을 바라보던 한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돌아왔네.”
이내 한제 곁으로 내려온 주무태가 무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했다.
“모두 물러가거라.”
주무태는 허공에 머물러 있는 여러 수련자들에게 명했다. 이곳에 모인 수련자 중에는 그보다 수준 높은 이들도 있지만 그들도 주작성에서는 주무태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열 명 남짓한 수련자들은 벅찬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한제를 향해 깊이 절을 했고 이어서 무덤을 향해서도 절을 한 뒤 떠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주작성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나 봉계 지존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뜻을 담아 주작성을 보호하겠다고 자원한 이들이었다.
도덕자와 세 제자들 역시 얼떨떨한 상태로 떠나갔다.
이제 이 오래된 집에는 한제와 주무태, 그리고 광인만이 남게 됐다.
광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심심해졌는지 담벼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인가?”
주무태는 조용히 한제 옆에 앉으며 술병 두 개를 꺼내 내려놓고는 무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제는 묘비를 어루만지다 조용히 일어서 절을 하더니 편하게 앉았다. 그의 곁에 나타났던 세 개의 허상은 흩어져 사라졌다.
“오래 있지는 않을 걸세.”
한제는 술병 하나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건⋯⋯?”
술병에 든 것은 한제에게는 매우 익숙한 술이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한제는 마치 1천 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천가의 술이네. 그때 적지 않은 양을 남겨놓았지. 언젠가 자네가 돌아오면 함께 마시려고 말이야.”
주무태가 말했다.
“천가의 아이는 내가 제자로 삼았다네. 만약 자네가 돌아온 것을 알았다면 아주 기뻐했을 거야.”
한제의 머릿속에 천우가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던 그 어린아이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고맙네.”
한제는 부모님의 무덤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고맙긴. 내가 주작성의 주인이 된 것도 자네 덕분인걸. 안타깝게도 주작성의 변화를 막지는 못했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성지로 만들려 했고 그게 좋은 뜻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무턱대고 막을 수는 없었지. 조나라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게 내 한계였네.”
주무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자네가 옛날을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조나라마저 완전히 변해버린다면 자네가 슬퍼할 것 같더군.”
주무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독백처럼 내뱉는 말을 들으며 한제는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주무태는 다시 술 몇 병을 더 꺼내놓았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달빛이 드리웠다. 공기도 서늘해졌다.
두 사람은 달빛 아래 술을 기울이며 과거의 추억을 늘어놓았다.
“운작자는 이미 수명이 다했네. 난 그를 잘 묻어주었지. 운천종은 현재 9대 종파의 하나가 되었어. 하지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 지금의 주작성은 자네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낯선 곳이야. 당시의 사람들 중 아직까지 남은 이들은… 아주 적다네.”
주무태는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화분국의 주자홍 기억하나? 나중에서야 그녀와 자네 사이에 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녀는 오래전 모친을 따라 봉란으로 갔어. 소하성역 어느 종파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네만⋯⋯.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의 전쟁에서 죽었다더군.”
한제는 주무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술병을 비워갔다.
“이한제, 난 사실 자네가 너무 부럽네.”
약간 취기가 오른 듯 주무태가 중얼거렸다.
“자네는 감히 이 주작성 밖으로 나가 수많은 죽음의 위기와 맞섰지. 허나 나는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곳만 지키고 있었어.”
주무태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지만⋯⋯ 당시 내게 주작성을 맡기고 떠나던 자네의 뒷모습이 도저히 잊히지 않더군. 그때도 자네가 부러웠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네. 내 제자 녀석도 생각나는군.”
주무태는 슬픈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몇 년 전에 죽은 그 녀석은 내 도의 경지의 일부였다네. 당시 나는 녀석에게 죽을 때까지 함께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리고 녀석을 주작성에 묻어주었지.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녀석의 무덤을 찾아가 혼자 술을 마셨네.”
주무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제자 녀석은 고향을 좋아해서 이곳을 떠나기를 원치 않았거든⋯⋯.”
한제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한제, 홍접 그 여자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네!”
날이 밝아올 무렵, 완전히 취한 주무태가 불쑥 말했다.
술병을 쥔 채 입가로 다가가던 한제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의 눈앞에 고고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만함과 고독으로 가득했던 홍접의 붉은 영혼은 이 주작성에서 밝은 빛을 발했다.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매우 화려해 한제는 여태까지도 그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죽을지언정 굴복은 원치 않았던 여인. 매우 냉랭했던 그녀를 감히 똑바로 볼 수 있는 수련자는 많지 않았다.
홍접은 그녀의 이름처럼 가장 붉게 빛나는 불빛으로 이루어진 나비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했다.
옛날을 떠올리며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은 한제가 주무태를 바라보았다.
“홍접은 설역국에 있지. 설역국이 사라져버린 것은 그곳에 당시 자네가 남겨놓았던 봉인과 관련이 있어. 그 안에 있던 수련자들 중 여태 살아남은 이들은 9대 종파에 흩어져 있다네.”
주무태는 한제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설역국이 흩어져 사라진 뒤, 나는 그 텅 빈 나라에서 어떤 공간을 발견했어.”
주무태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홍접의 스승을 기억하나? 그녀는 당시 홍접이 죽음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과 만약 홍접이 그 위기에서 살아남는다면 제자가 가진 오행의 육체가 완성되리라는 것을 예측했지.”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홍접의 스승이 죽기 전 봉인한 곳이었네. 홍접의 스승은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기이한 면이 있었지. 그녀는 대체 어떻게 그토록 복잡한 진을 만들어냈을까? 어쨌든 그 진 안에는 홍접의 머리카락 한 올이 들어 있었네.”
주무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진이지?”
한제는 의혹이 어린 눈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