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21
“나 역시 그 진에 대해 아는 바는 많지 않다네. 별다른 실마리는 발견하지 못했어. 그저 자네라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남겨놓았지.”
한제는 잠들어 있는 광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주무태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주작성 북쪽에는 산맥이 하나 있다. 그 중심에는 거대한 주작의 조각상이 있는데 오랜 시간 존재해온 이것은 현재 주무태의 처소였다.
바로 그 주작 조각상의 상공에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한제와 주무태가 허상으로 나타났다.
한제는 주무태의 안내에 따라 거대한 주작 조각상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저택의 여러 방 중 어느 석실에서 한제는 당시 주무태가 옮겨왔다는 기이한 진을 볼 수 있었다.
폭이 1백 척 정도로 석실 바닥을 가득 채운 진 때문인지 사방은 남색 얼음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진의 중앙에는 머리카락 한 올이 얼음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 진은 아주 오랫동안 가동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진이네. 당시 홍접의 스승이 그 수준으로 어떻게 이런 진을 설치했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한제는 진 안으로 들어서서 눈을 번득이며 꼼꼼히 살폈다. 무척 복잡한 이 진에는 수많은 금제가 걸려 있었다. 주무태의 말대로 첫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배치할 수 있는 진이 아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이미 가동을 멈춘 상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진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을 게야.”
주무태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제는 쪼그려 앉아 진을 뒤덮은 얼음에 오른손을 얹었다. 순간 서늘한 빛이 번쩍였고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진이 가동될 조짐을 보였다.
고민에 잠겨 있던 한제는 잠시 후 얼음에 얹었던 손을 뗐다. 그러자 진은 다시 멈췄다.
“이건 분혼전송진(分魂傳送陣)이야.”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정열기 후기나 절정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수련자가 설치한 진인 것 같군. 홍접의 스승이 설치했을 리는 없어. 그녀가 자신의 수준을 숨기고 있지 않은 이상에는⋯⋯. 허나 만약 그녀가 수준을 숨기고 있었다면 홍접이 죽은 뒤에 있었던 일들은 설명이 되질 않지.”
한제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진은 한 올의 머리카락에 갈라 넣은 혼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전송하는 역할을 하네. 그리고… 이 머리카락에는 홍접의 기운이 담겨 있어. 그렇다면 홍접은 정말로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지!”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작성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당시 홍접의 스승은 제자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칠 것이며 제자가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측했지. 그래서 제자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주고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진을 만들어 홍접의 혼을 한 줄기 갈라놓은 거야. 덕분에 홍접은 죽은 후에도 한 줄기 영혼으로 남았지. 그렇게 죽음의 위기를 넘기려는 거야!”
한제의 말에 주무태는 한참 고민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진을 발견했을 당시 역대 주작성 주인이 남긴 책들을 다 뒤져보다가 한 가지 비밀을 알아냈네. 설역국 수련자는 거마족과 마찬가지로 이 수련성 밖에서 온 이들이라는 거야.”
석실을 나와 주작 조각상 위에 선 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이 우주에 닿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홍접이 죽지 않았다는 건 기쁜 일이야. 어쩌면 지금쯤 그녀도 넓은 성역 어딘가에서 주작성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르지. 다만 그녀에게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군.”
한제의 작은 목소리가 주무태의 귀에 스치듯 닿았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나 역시 기쁘네. 옛날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으니… 그녀를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주무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당시의 원한은 사라진 상태였다.
“어쩌면 난 이미 그녀를 봤을지도⋯⋯.”
한제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는 지난 2천여 년의 세월을 살폈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됐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면 만나게 되겠지. 허나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주무태는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난 이만 가보겠네.”
한제는 돌아서서 주무태에게 포권을 했다.
주무태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포권을 하며 물었다.
“혹시⋯⋯ 류미는 봤나?”
“봤지. 그녀는 이미 죽었네.”
한제의 대답에 주무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제는 떠났다.
그의 모습이 주작 조각상 위로 사라진 그때, 주무태는 묵묵히 그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전보다 더 풀이 죽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류미가 죽었군.”
주무태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2천 년 동안 내내 지워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열아홉 번째 층의 비밀
술을 연거푸 마시다 보니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주무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짙은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당시의 그가 류미를 연모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제 역시도 방금 전 주무태의 얼굴에 드러난 씁쓸한 표정에 그제야 그 사실을 눈치챘을 뿐이다. 그는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조나라의 집으로 돌아온 한제는 부모님 무덤 앞에서 칠주야를 머물렀다. 그 칠일 동안 그는 술만 홀짝이며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는 마치 모든 생각을 멈춘 노인 같았다. 체내의 저항력에 대한 생각도 그만 둔 그는 그저 부모님의 온정을 떠올리며 낮과 밤을 지낼 뿐이었다.
그 사이 마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일찍이 잠에서 깬 광인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나불대기 시작했다. 한제 곁으로 다가와 술도 몇 잔 뺏어 먹은 그는 더욱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취기가 오른 듯 광인은 잔뜩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그 소리에 잠잠했던 이곳의 스산한 느낌은 어느 정도 흩어졌다.
여덟 번째 날이 밝았을 때, 한제는 부모님 무덤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찧고는 고향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떠났다.
그 순간, 그는 고향에 돌아온 일반인에서 다시 수련자로 변모했다. 냉혹하고 자비 없는 수련자로.
앞으로 마주해야 할 것은 애정과 온기가 아닌 거칠고 험악한 위기였다.
그리고 그 길에 오른 이상 더는 물러설 수도 멈출 수도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주작성에서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지!’
한제는 광인과 함께 주작성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가 향한 곳은 부문족이 머물렀던 커다란 구멍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부문족의 비밀을 숨기고 있던 곳이자 당시 주작 성황의 분신인 황룡 진인이 가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했다. 저 안의 열아홉 번째 층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한제 역시 오랫동안 궁금해 하던 차였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려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광인과 함께 부문족의 거대한 구멍으로 향했다.
부문족의 깊은 구멍은 여러 변화를 겪은 주작성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주작성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모양이었다.
이따금 이 구멍의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들어가는 수련자도 있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외부에서 온 자들이 적지 않게 이 안으로 발을 들였지만 결국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깊은 층에 진입한 사람도 없었다.
한제와 광인은 눈 깜짝할 사이 이 구멍의 입구에 도착했다. 허나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곧장 안으로 달려들려는 한제와 달리 광인은 움직이지 않고 떼를 쓰듯 외쳤다.
“안 간다! 난 안 가!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다녀와라. 갖다 와서 날 찾으면 될 것 아니냐. 허허허!”
광인은 한제의 눈길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광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광인의 목소리는 한층 작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제는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그는 광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저 주작성에서 놀고 싶은 것이다.
더는 그를 억압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로 몸을 날렸다.
한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광인은 흥분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나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세 계집들, 이름도 안 알려줬겠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표정이 달라졌지. 이번에 만나면 이름을 알려줄지도 몰라. 헤헤헤.”
광인은 바보처럼 웃으며 점차 멀어져갔다.
한제는 부문족의 땅에 수차례 와본 적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기억이 생생했다. 각 층의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막힘없이 이동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여섯 번째 층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번득이는 문양이 새겨진 열세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부문족의 역대 선조들이 안치된 관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듯 놓인 채 여전히 음산한 기운을 발산했고 중앙의 검은 연못은 한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열일곱 번째 층의 입구는 바로 저 검은 연못이었다. 그 안에는 봉인이 하나 배치되어 있는데 최소한 음의의 수준에 이르러야만 열 수 있었다. 당시 한제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까닭에 대두(大頭)의 힘에 의지해 겨우 열일곱 번째 층으로 들어간 바 있었다.
옛일을 떠올리던 한제가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어 가까이 이르자 연못의 봉인이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형태 없는 위압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나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타났다.
한제는 소용돌이를 통해 열일곱 번째 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수많은 쇠사슬에 묶여 봉인된 선인의 시체들이 지키고 있었다.
한제는 당시 끔찍한 전투를 치른 끝에 이곳을 무너뜨린 바 있었다. 그래서인지 열일곱 번째 층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열여덟 번째 층으로 이어지는 입구인 거대한 회오리만은 그대로였다.
입구를 바라보던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여덟 번째 층에 들어가려던 당시 선대 주작 성황의 분신인 황룡진인이 나타나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던 것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룡은 결국 생각을 바꿨고 한제는 그의 보호 아래 열여덟 번째 층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회오리에 진입했다. 귓가에는 요란한 쉭, 쉭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의 심신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소리가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을 때, 한제는 열여덟 번째 층에 이르러 있었다.
이곳은 폭이 1천 척에 달하는 석실로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유일한 빛은 중앙의 미약한 불씨뿐이나 그 약한 불빛만으로는 여전히 어두웠다. 더욱이 불씨는 수시로 깜빡였다.
주위를 맴도는 혼들의 곡성(哭聲)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연기처럼 허상으로 나타나 불씨를 덮치려 다가서는 혼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불씨의 빛에 닿자마자 바르르 떨며 흩어졌다.
당시 이곳에서 한제는 황룡의 도움을 받아 본원의 힘 한 줄기를 흡수한 적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불씨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서자 석실의 어둠 속을 맴돌던 수많은 혼들은 곧장 비켜났고 그들의 참혹한 곡성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들은 한제의 존재 자체가 두렵다는 듯 쉴 새 없이 몸을 떨어댔다.
한제는 불씨와 그 안에 담긴 본원의 힘을 바라보았다. 지금 와서 보니 너무도 약하고 적었으며 순수하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융합한 것처럼 불순물이 잔뜩 끼어 있어 지금의 한제에게는 조금도 욕심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지막 층에는 대체 뭐가 숨겨져 있을까? 운작자는 당시 열아홉 번째 층에 부문족 선조의 잔혼 한 줄기가 있다고 했는데⋯⋯. 한데 부문족 선조는 장존의 딸이지. 그녀는 청림에 의해 요령의 땅에 봉인되었고. 그러니 이곳에는 그녀의 잔혼이 존재할 수 없어!’
한제가 생각을 정리하더니 손을 들어 올려 불씨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불씨에 들어 있는 본원의 힘이 저항하려는 듯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한제에게는 너무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