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2
“한발 늦었구나. 선체의 피는 아깝게 됐어. 그리고 그 광인은⋯⋯ 설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인가? 그가 저리 미쳤을 줄이야⋯⋯. 한데 그들을 집어삼킨 회오리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분명 부벽층(府壁層)의 기운이었어.”
노인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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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한 우주. 주작성이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작은 먼지 하나가 경미하게 무너져 내렸을 뿐이다. 그 먼지는 바로 한제가 재난을 맞이한 곳이었다.
전가 노인이 사라진 뒤 주작성 밖 우주에는 파문이 연달아 나타났다. 점점 더 늘어난 파문은 결국 온 우주를 뒤덮다시피 했고 각 파문에서는 홍삼자와 남운자 청림, 청수 등이 다급하게 걸어 나왔다.
속속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강력한 신식으로 사방을 샅샅이 살폈다. 그들은 이내 방금 전 먼지가 흩어진 곳에 신식을 고정했으나 한제의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다. 꼭 실종되었을 당시처럼 또는 죽은 것처럼…
“죽지 않았어.”
홍삼자가 슬픈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전쟁이 곧 시작될 거야. 계외에서는 이 사실을 널리 퍼뜨리겠지.”
청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눈으로 먼지가 무너진 곳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저 먼 우주를 바라보는 청수의 두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드러났다. 심지어 그에게서 피어오른 한 줄기 살육의 기운이 사방을 뒤덮기도 했다.
“내가 그를 대신하겠다. 운해성역에서 폐관수련을 하고 있지.”
두 눈을 감은 청수는 점차 한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은 본래도 한제와 무척 닮은 구석이 있었다. 딸을 찾는 것도 자유도 포기한 채 한제를 대신해 운해성역에서 폐관수련을 하며 하나의 상징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사제, 내가 복수해주마. 이 일과 관련된 자들은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청수는 두 눈을 감아 슬픔을 감췄다.
계내의 수준 높은 수련자들 중 누구도 봉인에 구멍이 생겨나기 전까지 그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태고 성신에서는 오랫동안 철저히 준비해왔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아마도 한제는 무사히 그 재난을 넘기지 못했을 터였다. 죽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모였던 이들은 잠시 후 뿔뿔이 흩어졌다. 가슴속에 맺힌 분노만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처럼 이글거릴 뿐이었다.
★ ★ ★
주무태는 여전히 주작 조각상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조나라 황조성의 오래된 뜰과 건물 앞의 외로워 보이는 무덤에도 텅 빈 술병 몇 개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편, 개천부를 쥐고 있는 주작성의 거대한 조각상은 하염없이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며칠 뒤, 차가운 인상의 청년이 그 조각상 아래 나타나 묵묵히 서 있다가 꿇어앉더니 머리를 찧으며 눈물을 흘렸다.
“스승님, 이 제자는 언젠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날 수많은 이들 앞에서 스승님의 제자임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며칠 뒤에는 예쁘장한 여인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곳에 이르렀다. 그녀의 곁에는 늙은 호랑이가 있었다. 여인은 조각상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삼촌⋯⋯ 나 은혜야. 주은혜⋯⋯.”
다시 며칠 뒤에는 거구의 사내가 조각상 앞에 나타나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사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동이의 술을 가져온 그는 술에 얼큰히 취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너를 수련자의 길로 이끌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네게서 천역주를 가져갔더라면⋯⋯ 네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년이었던 때로 돌아간다면⋯⋯.”
며칠 후,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조각상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조각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해가 뜨고 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떴다. 돌아선 순간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땅에 뿌려졌다.
그녀는 모은미였다.
다음으로는 분홍색 치마를 입은, 피곤한 기색의 여인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를 모르시지만 저는 당신을 압니다.”
선인의 꿈인가 꿈의 선인인가
흐름을 잊은 허공과 시간. 시작도 끝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두 구의 망가진 육체뿐이었다.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한 이 허무에는 어두운 붉은색 빛이 있었다. 약간의 금빛을 발하는 붉은 빛은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원 안에는 심각하게 무너져 내린 한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두 눈을 감은 광인이 있었다. 안색이 잿빛에 가까운 광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일곱 색채의 빛이 있었다. 이 칠채창은 광인의 불멸체를 다치게 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중상을 입은 후 보호되지 않은 상태였던 그의 혼에는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붉은색 빛으로 그려진 원은 한제가 손에 쥐고 있던 금빛 핏방울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한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진 광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내쉰 그는 가까스로 오른손을 들었지만 몇 번 헛손질을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저물공간을 열고 세 개의 도과를 꺼낼 수 있었다.
한제가 숨을 들이마시자 그 즉시 줄어든 세 개의 도과는 결국 세 갈래의 빛이 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혼잡한 도념을 품은 채 그에게 스며들었다.
한제의 눈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번득였다. 그는 한 손으로 광인을 붙잡아 자신과 연결시킨 후 다른 손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가볍게 건드렸다.
“몽도⋯⋯.”
마지막 힘을 짜내 도념으로 만들어낸 한제는 자신이 창조해낸 세 번째 신통술, 몽도를 발휘했다. 그리고 이 신통술의 힘을 빌려 1천 년 전으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한제는 삶과 죽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의 세 본원을 완벽하게 완성할 생각이었다.
이내 오른손을 힘없이 떨군 한제의 두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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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씨, 형씨! 좀 일어나봐요!”
“어휴, 얼마나 마셔댄 거야. 난 객잔을 청소해야 하니까 네가 좀 깨워.”
길가에 붙은 허름한 객잔. 푸른 옷을 입은 점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탁자에 엎드린 청년을 툭툭 밀었다.
“백면서생이시군. 겨우 두 잔을 먹고 이렇게 뻗다니.”
점원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청년을 떠밀었다.
“무릇 세상은 만물의 여관이고⋯⋯ 세월은 영원히 흘러가는 나그네로다. 한바탕 꿈같은 인생⋯⋯ 기쁨을 즐긴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하하하, 정말 좋은 시야!”
술에 잔뜩 취한 청년은 고개를 들고 점원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하하, 내가 뭣 좀 하나 알려주지. 내 방금 꿈을 하나 꾸었다네. 내가 글쎄, 선인이 되는 꿈이었지.”
청년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더니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대지에 드리웠다. 맑은 하늘에는 깃털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방금 막 떠오른 해에서 발산된 빛은 멀리서 보기에는 퍽 몽환적이었다.
개 짖는 소리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침밥 짓는 연기가 길가의 객잔에서 흘러나왔다. 가게에서 기르는 개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꼬리를 열심히 팔랑팔랑 움직였다.
하지만 잠시 후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길 끄트머리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흙먼지를 뚫고 질주하는 여러 마리의 말 위에는 도포를 입은 사내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길 위에서 놀고 있던 개들은 부리나케 비켜섰고 말들은 바람을 일으키며 곧장 이곳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말발굽 소리가 어찌나 급박하고 컸는지 건물 안까지 그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길가의 붙은 객잔들은 더욱 그랬다. 심지어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낸 듯 매우 허름한 이 객잔은 진동을 못 견디겠다는 듯 삐걱대기까지 했고 2층 방에서는 놀란 손님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 가게가 지어진 지 백 년이 넘어서 그런지 말이 빠르게 달리면 이러긴 해도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대청 안 구석에서 무명 옷을 입은 노인이 곰방대를 물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서는 수건을 어깨에 걸친 점원이 입을 비죽이며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각 방에 묵고 있는 손님들에게 제공할 물이었다.
2층 오른편 가장 끝 방에는 한 청년이 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방안은 지독한 술 냄새로 가득했다.
급박한 말발굽 소리에 방이 진동하자 그제야 눈을 뜬 청년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몸을 일으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휴,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야. 왜 그렇게 마신 거지?’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평범한 외모의, 열여덟이나 됐을까 싶은 청년에게서는 책깨나 읽은 듯한 느낌이 풍겼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쓴웃음을 짓던 그는 침상을 짚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탁자로 걸어가더니 차가운 물을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조금 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다시는 술을 이렇게까지 마셔서는 안 되겠어. 어젯밤에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지. 강도라도 만났다면 돈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험했을 거야.”
청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찬 물을 한 사발 더 들이켰다.
그때 점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혹시 뜨거운 물 필요하십니까?”
청년은 얼른 일어났지만 너무 갑자기 움직인 탓에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물동이를 든 점원이 들어왔다. 옆에 놓인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은 그는 고개를 돌려 청년을 힐끔 보더니 피식 웃었다.
“여기에서 일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겨우 두 잔에 그렇게 취한 손님은 처음 봤습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시지 않아 제가 방까지 손님을 업고 데려왔죠. 술은 조금 더 훈련이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수도의 관원들은 술 한 말을 먹고도 취하지 않는다던데요?”
청년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더니 점원에 포권을 하며 웃었다.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어젯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잔을 마셨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잔을 마시자마자 고꾸라져버렸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