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3
점원은 씩 웃더니 물동이를 들고 나가며 놀리듯 말했다.
“과거를 보러 오신 서생이시죠? 어젯밤 저를 붙잡고 끊임없이 꿈 얘기를 하시더군요. 꿈속에서 선인이 되었다나 뭐라나. 하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시간 나시면 나중에 다른 꿈 얘기도 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점원이 방에서 나가자 청년은 씁쓸하게 웃으며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로 다가가 세수를 했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취기가 적잖이 씻겨나간 것 같았다.
세수를 마친 뒤 창문을 열자 밝은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청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꿈을 꾸기는 했지.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니⋯⋯.”
청년은 창문 앞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지. 넷째 작은아버지가 오시고 대산파라는 곳에 입문하고⋯⋯. 하하! 정말 재미있는 꿈이야. 한데 왠지 그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대산파에 들어간 뒤는 꾸지 못했으니까. 대산파라⋯⋯. 세상에 그런 문파가 있긴 한가? 아니, 선인이 있긴 할까? 나처럼 평생 공부해온 사람이 그런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이야기에 속아서는 안 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청년은 탁자 위의 잔이 시야에 들어오자 흐릿하게 머릿속에 남은 결인을 그리는 시늉을 했다.
“인력술!”
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습군.”
잠시 장난을 치던 청년은 피식 웃더니 옷과 돈, 마른 식량, 필기구 등을 정리한 뒤 방을 청소했다. 이어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책 따위가 든 봇짐을 등에 메고 방을 나섰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지만 성격은 순박했던 그는 산촌에서 자라다가 처음으로 집을 나선 상태였다.
마을 초입까지 나온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산촌을 떠난 그는 막 날개를 펼치려 하는 아기 새와 다르지 않았다.
굳이 방을 청소하고 나온 것은 지난밤 자신을 업고 방까지 데려다준 점원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이다.
1층으로 내려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한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점원에게 포권을 한 뒤 햇빛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햇빛 아래 청년은 더욱 밝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누구라도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깨끗한 옷과 말쑥한 차림은 그를 더욱 단정하고 씩씩해 보이게 해주었다.
길을 따라 걷던 청년은 전방으로 이어진 길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조나라의 수도가 있을 터였다.
‘이한제, 넌 할 수 있어! 과거에 급제해 부모님을 도시로 모셔오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야!’
청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걸음을 옮겼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어디에서 실려 왔는지 모를 꽃과 풀 내음을 품은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다.
개 짖는 소리는 바람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다 흩어졌다.
이 또래의 청년들은 오래 걸어도 피로하지 않은지 길을 따라 걷는 한제의 눈은 어느새 영리하게 빛났기 시작했다. 그는 때때로 멈춰 서서 주위의 광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한참을 걷자 나무는 점차 줄고 숲 너머로 강이 나타났다.
콸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상쾌한 바람이 느껴졌다.
왼쪽으로는 겹겹이 산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는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강 위로는 배가 몇 척 떠가는 중이었다.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검은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이내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뱀 같은 번개가 저 멀리서 내리쳤다.
낮까지만 해도 맑았던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산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마치 구름을 뚫으려 하는 산과 산을 삼키려는 구름이 맞서는 것처럼 보였다.
꽈르릉!
그때 또 한 번 천둥이 울리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른 나무 밑으로 들어간 한제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솜씨 좋은 그의 아버지가 만든 이 우산만 펼치면 피를 막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우산을 든 한제는 구름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은 저 먼 곳의 산을 그리고 땅과 나뭇잎, 강의 수면 강 위의 배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먹 쏟은 듯 검은 구름이 산을 채 덮기 전에 하얀 비가 진주를 튀겨 배로 마구 뛰어들더라는 시가 있지. 과연 그렇군.”
한제는 비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봐, 공부 좀 한 것 같은데 정신이 나간 건 아니겠지? 내 배에 비가 들이치는 게 그리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 짜증나게!”
강둑 근처에 이른 배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뱃머리에는 우산을 든 예쁜 소녀가 잔뜩 화가 난 듯 눈을 부릅뜬 채 고운 손으로 한제를 가리키며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한제는 웃음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비취색 옷을 입은 소녀가 들고 있는 우산의 대는 나뭇가지 같았고 우산의 천은 나뭇잎 같았으며 그 천을 고정하고 있는 얇은 대는 꼭 잎맥 같았다. 피부는 분홍빛을 띠었고 눈썹과 부릅뜬 눈은 단번에 시선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고 보통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였다.
비는 장막처럼 소녀와 한제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강에 떨어진 빗물이 튀면서 부연 물안개가 일어 강과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듯했고 저 멀리 떨어진 산은 수묵화에 그려진 배경 같았다.
이 광경을 넋 놓고 보던 한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앞에 나타난 소녀는 고향을 떠난 뒤 본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고향의 소녀들과 비교하면 일반인과 선녀만큼이나 그 차이가 컸다.
깨어나지 않은 때
약간 안색이 어두워져 있던 소녀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한제의 모습에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소녀의 기분은 이 날씨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모양이었다.
“거기 책벌레! 그만하면 충분히 본 것 같은데? 호호홋!”
소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면서생 같은 한제의 얼굴은 이제 귓불까지 붉어진 상태였다. 그는 얼른 우산을 옆에 기대어 놓더니 뱃머리의 소녀에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실례했습니다. 아가씨께서 괘념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얼이 빠진 한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던 소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때, 배 안에서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매!”
그와 동시에 옥처럼 고운 손이 배 위에 마련된 천막 한쪽을 거둬냈고 이어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쉬지 않고 내리던 비도 멈춘 듯했다. 허공에 멎은 듯한 빗방울 너머 그녀의 얼굴이 한제의 시야에도 어렴풋이 들어왔다.
보라색 옷을 입은 그녀의 두 눈은 달처럼 밝았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세상 모든 빛이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세상에 오직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우수에 찬 빛이 어려 있었다. 피곤함과 망설임, 슬픔 등의 감정이 혼재된 듯한 기색이 오히려 그녀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녀는 나무라는 듯한 눈으로 비취색 옷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여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둑 위에 있는 한제를 가리키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서생이 못되게 굴어서요. 처음에는 경박한 언사를 늘어놓더니 나중에는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군요. 저렇게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게 우습지 않아요? 호호.”
보라색 옷의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 그늘 아래 비를 피하고 있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흠칫 놀란 듯한 여인은 한제를 몇 번 더 살폈는데 두 눈에 혼란한 빛이 드러났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아.”
두 여인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한제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마른기침을 하며 두 여인을 향해 다시 포권을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한제, 책을 그토록 많이 읽은 게 무슨 소용이냐? 저 아가씨들을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다니, 침착하자. 비만 그치면 다시 길을 떠나는 거야.’
한제는 축축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공자 이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밤새 내릴 것 같아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리로 와서 비를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룻밤 묵을 공간도 있습니다.”
한동안 한제를 바라보던 보라색 옷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내리는 비를 뚫고 퍼져 나갔다.
“그게⋯⋯.”
잠시 망설이던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시커먼 하늘은 쉴 새 없이 비를 퍼붓고 있었다. 여인의 말대로 밤새 내릴 기세였다.
“사저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비취색 옷의 소녀가 한제를 흘겨보며 성을 냈다.
“사매!”
보라색 옷의 여인은 소저에게 주의를 주듯 가볍게 꾸짖었다.
한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산을 쓰고 진흙탕이 된 좁은 길을 따라 둑으로 향했다. 빗물 범벅이 된 흙이 걸음마다 철벅거리며 옷에 튀었다. 가뜩이나 미끄러운 데다가 길은 약간 기울어져 있어서 한제는 둑에 이르렀을 때 그만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 순간, 매혹적인 향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한제를 부축했다. 보라색 옷의 여인이었다. 한제를 안은 그녀는 진흙탕이 된 바닥에 발을 살짝 굴러 가볍게 붕 떠오르더니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강 위에 뜬 배에 이르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배에 오른 한제는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예를 갖추시지 않아도 됩니다. 앉으시죠.”
보라색 옷의 여인은 가볍게 웃으며 먼저 옆자리에 앉았다. 비취색 옷의 소녀도 우산을 거둔 뒤 여인 옆에 앉아 한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제는 심장이 터질 듯 쿵쾅쿵쾅 뛰었다. 태어나서 이 정도로 긴장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봇짐을 내려놓은 한제는 두 여인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보라색 옷의 여인은 한제의 긴장한 모습을 보고는 부드럽게 웃더니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이 일렁이며 배 위에 마련된 천막을 밝혔다.
비취색 옷의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한제의 표정을 살폈고 한제는 더욱 난감해졌다.
“이한제라고 합니다. 두 아가씨의 호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여인에게 포권을 했다.
배는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빗물은 세 사람이 들어앉은 천막을 두들겼다. 갑판과 천막, 강물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름다운 가락을 이루었다. 천막 벽에 그림자를 일렁이는 촛불의 미약한 빛이 빗소리 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기를 느끼게 했다.
‘이한제라⋯⋯. 어째서 이토록 낯익은 느낌이 드는 걸까? 심지어 이름도⋯⋯.’
보라색 옷의 여인은 여전히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한제라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비취색 옷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제를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상하네, 분명 처음 본 사람인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소녀는 웃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서희고 이쪽은 주 사저야. 사저의 이름은 네가 직접 물어봐.”
서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주예라 합니다.”
인사를 건네는 동안에도 보라색 옷의 여인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특히 한제의 이름이 낯익다는 사매의 말에 더욱 혼란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