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4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비는 갈수록 거세졌고 세상에는 빗소리뿐이었다. 축축한 공기가 천막 안까지 스며들면서 촛불이 휘청였다.
한제는 으슬으슬 추워졌지만 두 여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제는 문득 얼떨떨해졌다. 어두운 밤, 고요한 강 위,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듯한 이 배에 아름다운 두 여인과 함께 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두 아가씨께서는 서로를 사매, 사저라고 칭하시고 아까 전 주 아가씨께서는 날아오르듯 뛰어오르셨지요. 제 생각에는 엄청난 무림 고수이신 듯하군요.”
점점 추위에 떨리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한제는 억지로 잠을 이겨내며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중얼거렸다.
“뭐? 무림 고수? 참내! 농담하는 거야? 우리는 수련자야. 선인이라고!”
잠결에 들려온 흐릿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한제는 누군가가 대산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또 꿈인가⋯⋯?’
그는 이내 두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배가 흔들리며 촛불도 가볍게 일렁였다.
서희는 의아한 눈으로 곁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저, 저자는 일개 일반인일 뿐인데 왜 신통술을 부려 잠들게 한 거예요?”
주예는 잠든 한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 분명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이름도 익숙해.”
“이한제⋯⋯ 이한제⋯⋯.”
서희는 예쁜 눈썹을 구긴 채 고민에 잠겼다.
잠시 후, 주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군. 어쩌면 전생에 만난 사람일지도 모르지.”
“전생이요? 오호홋!”
서희는 까르르 웃더니 일어나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저, 시간 다 됐어요. 이산을 만나러 갈 시간이에요. 장문인이 동쪽에서 금빛을 느끼셨다 하니 아마 그쪽에 법보가 나타난 모양이에요. 어쩌면 다른 문파에서도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저희 수준으로 그 쟁탈전에 참여하긴 힘들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주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배를 떠나기 전에 한제의 모습을 기억 속에 깊이 새기려는 듯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사저, 가야 해요!”
서희의 목소리가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잠시 망설이던 주예는 천막 안에 잠들어 있는 한제에게 다가가 저물대에서 두꺼운 피풍의를 꺼내 덮어주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전생의 연일까?”
여인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비는 점점 거세어졌다. 어두운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빗속에서 홀로 떠가는 배는 쓸쓸해 보였다.
점점 더 먼 곳으로 나아가는 이 고독한 배는 하늘에 녹아들 것만 같았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촛불의 빛만이 외로이 일렁였다. 마치 꿈속을 떠가는 조각배처럼, 촛불은 꿈의 끝으로 향하는 듯했다.
한제의 몸을 덮은 피풍의에서 풍기는 옅은 향이 천막 안에서 달게 잠들어 있는 그의 꿈속으로 흘러들었다.
“서희⋯⋯ 주 사저⋯⋯ 이산⋯⋯ 이현⋯⋯ 장호⋯⋯.”
한제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만약 두 여인이 이곳을 떠나기 전이었다면 방금 한제가 중얼거린 말에 대경실색했을 터. 허나 그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한제의 꿈은 또 하나의 삶이었다. 꿈속의 그는 대산파에서 서희를 보았고 주씨 사저를 보았다. 대산파의 대산에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한참 뒤, 어둠 속의 유일한 빛이었던 촛불마저 꺼지자 배는 곧 어두운 밤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 ★
비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하늘 끄트머리가 점차 밝아오고 있었지만 아직 모든 어둠을 다 몰아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밤새 내린 비에 강은 불어나 있었다. 언뜻 봐서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지만 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흙으로 스며든 빗물은 땅을 질퍽하게 만들었다. 강 위를 떠가던 배는 머지않아 진흙탕이 된 둑에 부딪히더니 멈추어 섰다.
쿵!
“컥! 으으…”
배가 멎으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친 한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뜨고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중의 일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여인은 온데간데없었으나 아름다운 그녀들의 모습은 한제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꿈이었나?”
한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몸을 덮은 여인의 피풍의를 발견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두 여인만이 아니라 진짜 꿈속의 일들도 남아 있었다.
“잠깐! 이번에도 나는 꿈속에서 대산파에 있었어! 그리고 거기서… 분명 그 두 아가씨를 봤고…”
한제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한참 후에야 한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아직 어둑어둑해 먼 곳까지 내다볼 수는 없었으나 촉촉한 흙냄새를 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란 말인가⋯⋯?”
한제는 뱃전에 섰다. 사방은 고요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은 것만 같았다.
그 적막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한제는 어째서인지 외로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밝아오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도 외로움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
바람이 불어 그의 검은 머리를 날렸다.
‘조금 춥네.’
한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왜 갑자기 이렇게 깊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집과 부모님,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는 한 여인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왜⋯⋯ 내가 왜 우는 거지?’
한제는 눈물을 훔쳐내고는 손에 묻은 빗방울 같은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자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숨겨진 슬픔이 어려 있었다.
‘이게 대체⋯⋯?’
비 오는 밤 사찰에 돌아온 혼
한제는 고개를 숙이더니 갑판이 젖은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닥에 앉았다. 고요한 새벽,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뱃전에 고인 비에 섞여들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이전에도 종종 혼자서 이렇게 풍경을 바라봤던 것처럼.
그때 한제의 눈앞에 거대한 심연이 나타났다.
“헉!”
한제는 엄청한 흡입력으로 하늘까지 끌어들이려는 듯한 심연 너머 벽에 일어난 줄기줄기의 균열과 그 균열에 가부좌를 튼 한 사람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그곳 역시 매우 고요했다. 강한 흡입력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뿐이었다. 균열 안에 앉은 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한제는 그 뒷모습에서 깊은 고독과 슬픔을 읽어냈다.
또한 한제는 백의에 백발을 기른 인영이 묵묵히 우주 속을 걷는 모습도 보았다. 그 뒷모습에서도 고독함이 느껴졌다.
점점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제는 점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마치 영혼 깊은 곳에서 기인한 듯한 슬픔, 세상이 곧 그의 혼이고 그의 꿈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익숙한 고독함과 슬픔을 찾아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뱃전에 선 한제는 한참이나 수면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가 느껴지자 한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촛대를 가리켰다. 순간, 초에 불씨가 일어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제 자신조차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저 어디에서 기인했을지 모를 슬픔에 파묻힌 채 멍한 눈으로 수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던 불씨가 커지더니 이내 초에 불이 붙었다. 서늘한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미약한 빛이었지만 불이 몸부림을 치듯 타오르는 동안 그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촛불 아래 홀로 뱃전에 앉은 한제의 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하늘이 점차 밝아졌다. 어둠은 하늘과 땅, 강 그리고 배 위에서 흩어져 사라졌고 모든 것은 빛을 찾아갔다. 저 멀리 산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러나 먹구름은 흩어지지 않은 채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 새 한 마리가 작은 점처럼 산 중턱에서 날아와 검은 구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내 그 구름을 뚫고 나온 새는 날개를 몇 번 퍼덕이다가 한제 쪽으로 날아왔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빠르게 다가오는 하얀 새를 보았다. 근처를 맴돌던 새가 고개를 숙였고 눈이 마주친 순간 한제는 그 새의 눈빛에 깃든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에 흠칫 놀란 순간, 새는 다시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제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슬픔도 점차 흩어져 사라졌고 천막 안의 촛불도 점점 약해지다가 꺼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제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의 손가락에 맺힌 눈물을 바라보았다. 이내 눈물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한참 뒤에야 일어난 한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슬픔을 안은 채 주예가 남긴 피풍의와 봇짐을 챙겨 배에서 내렸다.
한데 그때, 하늘의 검은 구름 속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한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됐다.
구름에서 두 갈래 빛이 튀어나오더니 그중 하나가 한제의 상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빛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색 옷의 여인은 고개를 숙여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
여인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류 사매?”
또 하나의 빛이 흩어지면서 잘생긴 청년이 나타나 부드러운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저 서생,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여인은 다시금 빛을 그리며 먼 곳으로 떠나갔다.
“잘못 봤겠지. 얼른 스승님께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