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5
청년은 고개를 숙여 한제를 힐끗 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며 여인과 함께 자리를 떴다.
한제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갈래 빛은 갈수록 약해지더니 결국 검은 구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저 여인은 누구지? 굉장히 낯이 익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한제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통증은 아직 남아 있던 슬픔과 융합해 기이한 힘을 이룬 듯했고 한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됐다.
“크으으…”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난 한제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고 다시 한 줄기 슬픔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은 방금 전 날아가 버린 여인 때문이었다. 마치 한제의 머릿속에 까마득히 오랜 세월 존재하기라도 한 듯한 그녀에게는 복잡한 감정이 따라붙었다.
한참 뒤, 한제는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두 눈을 감았다.
‘정말 선인이 존재했구나. 그럼 내 꿈은⋯⋯ 진짜였단 말인가?’
비에 젖어 축축한 땅 위에 말없이 서 있던 한제는 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뒤에야 묵묵히 걸어 나갔다.
‘그렇다면 내가 꿈에서 선인들을 만난 것인가 아니면⋯⋯ 선인들이 꿈속에서 나를 만난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삶이 며칠 전 술에 잔뜩 취해 꾼 꿈 때문에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시 길에 올라 현도(縣都)로 향한 그에게는 더 이상 이전처럼 주변 경관을 살필 정신이 없었기에 그저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해가 뜨고 또 해가 졌다.
길을 따라 온종일 걸은 한제는 한쪽에 앉아 봇짐에서 마른 식량을 꺼내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말발굽 소리와 마차 소리가 수시로 뒤쪽 멀리서 들려왔고 그때마다 한제는 옆으로 비켜서서 마차나 말들이 지나간 뒤에야 다시 길에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7일이 지났다. 요 며칠간 허약했던 한제의 몸은 천천히 튼튼해지고 있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고 그러다 운 좋게 객잔이라도 발견하면 그제야 휴식다운 휴식을 누렸다.
해가 질 때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을 발견하면 민가에 청해 하룻밤 묵기도 했다. 솔직히 민가에 하루 의탁하는 것이 객잔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럴 때는 길가에 늘어선 나무에 외로이 기대어 앉아 두꺼운 옷을 덮은 채 하늘의 별을 세며 부모님을 그리다 천천히 잠들었다. 곁에서는 모닥불이 타오르다가 점차 꺼져가며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에 섞여들었다.
종종 서늘한 기운을 품은 밤바람에 깨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방이 적막과 어둠에 휩싸여 있음을 깨달았는데 어둠에 익숙한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물처럼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두꺼운 옷에 몸을 폭 감싼 채 다시 잠들 뿐이었다.
조나라에 우기가 찾아온 때라 비가 그친 뒤라도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수시로 천둥이 울렸다. 그렇게 한나절을 머물던 구름은 다시 비를 퍼부었다.
여덟 번째 날 황혼 무렵, 한제는 우산을 받쳐 든 채 쓰게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아직 해질녘인데도 불구하고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루만 더 가면 현도에 도착한다. 한데 비가 갈수록 거세지는군.’
바닥을 강하게 두들기는 빗줄기가 길가에 고여 있던 빗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한제의 옷은 어느새 흠뻑 젖은 채 몸에 착 달라붙었다.
한제는 서서히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특히 축축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한기가 뼛속까지 스몄다.
한제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우산을 등의 봇짐 쪽으로 기울였다. 책과 마른 식량, 갈아입을 옷가지 등이 젖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집 같은 건물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자세히 살필 틈도 없이 냅다 뛰었다.
가까이서 보니 버려진 듯한 사찰이었다.
끼익!
기괴한 소리가 비 오는 밤공기를 가르며 음산함을 더했다.
매우 낡고 작은 사찰이었다. 두 개의 문짝 중 하나는 닫혀 있었는데 그 문의 붉은 칠은 세월이 흐르면서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녹이 잔뜩 슨 문고리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다른 문은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아직 문틀에 붙어 있기는 했지만 닫혀 있지는 않았다. 덜렁거리는 문이 비바람에 흔들리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한제는 재빨리 사찰로 들어갔다. 뜰은 자갈과 잡초로 덮여 있었다.
꽈릉!
“히익!”
천둥번개가 내리치면서 순간적으로 사찰 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기겁하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사찰 가장자리에 놓인 몇 구의 백골 때문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갈수록 거세지는 비를 피하지 않으면 고뿔로 고생을 할지도 모르고 책도 못 쓰게 될 판이었기에 한제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키가 수십 척에 달할 듯한 조각상이 있었으나 곳곳이 망가진 데다가 칠까지 벗겨져 무슨 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 안에도 물이 고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붕의 기와가 몇 개나 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음산한 기운이 건물을 맴돌았다.
한제는 심호흡을 한 후에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각상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물기가 없는 곳에 봇짐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잠시 비가 그쳤을 때마다 모아둔 마른 나뭇가지들을 꺼내 불을 붙이려 했으나 불은 쉬이 붙지 않았다. 점점 심해지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한제는 부싯돌을 부딪쳤다.
한데 그때, 한 줄기 천둥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꽈르릉!
“헉!”
요란한 소리에 놀란 한제는 두 손을 벌벌 떨었다. 번개가 번득이던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자신의 주위를 뒤덮었음을 똑똑히 느꼈기 때문이다.
“누구시오?”
한제는 사찰의 대문 쪽을 바라보며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고 외쳤다. 그러자 사찰 안으로 들어서려던 상대도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누, 누구냐!”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온몸이 흠뻑 젖은 중년 사내가 사찰 대문 앞에서 창백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건물 안에 있는 한제를 힐끔 보고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얼른 사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마치 호통이라도 치듯 말했다.
“너 때문에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한제는 잠시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포권을 했다.
“저도 그저 놀라서 그랬을 뿐이니 괘념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뭔가 중얼거리더니 한쪽에 걸터앉아 손을 품에 넣어 흠뻑 젖은 닭다리를 하나 꺼냈다. 한데 닭다리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비 오는 밤중의 곡성에 소름이 쫙 끼친 한제는 조금 더 옆으로 비켜서서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종이를 불쏘시개로 이용한 끝에야 겨우 모닥불이 생겨났고 덕분에 사찰 안은 조금 밝아졌다.
엉엉 울던 중년 사내는 젖은 닭다리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씩 웃더니 언제 곡을 했냐는 듯 껄껄 웃기 시작했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한제는 흠칫 놀랐다.
‘광인이로군.’
돌아보다
한제는 사내와의 거리를 벌렸다. 비가 쏟아져 내리지만 않았다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터였다. 비 오는 깊은 밤, 느닷없이 나타난 광인과 함께 있자니 불안했다.
박장대소를 하듯 웃던 중년 사내는 이내 또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어. 난 내가 누군지 생각도 안 나는데⋯⋯. 흑흑.”
울음소리가 왕왕 울렸고 사내가 조금씩 불쌍해지기 시작한 한제는 고개를 돌려 광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깨기 전의 꿈은 삶 같고 삶은 연극과 같아 내가 누구인가 싶은 법. 꿈이 삶이고 깨어나는 것이 죽음일까요, 아니면 꿈이 죽음이고 깨어나는 것이 삶일까요? 눈을 감고 뜨는 순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일까요, 아니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때일까요? 인생은 하나의 윤회이자 원인과 결과입니다.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는⋯⋯.”
한제는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며칠 동안의 꿈은 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었고 지난 7일 동안 이어온 침묵 속에서 뭔가를 느끼게 했다.
한숨을 내쉰 한제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봇짐에서 마른 식량을 꺼내 말없이 먹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산과 땅, 사찰을 뒤덮었다. 그리고 사찰 안의 모닥불 곁에는 이 꿈에 속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었다.
모닥불을 바라보는 한 사람과 닭다리를 씹고 있는 한 사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조각상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꼴깍!
한제의 상념은 침 삼키는 소리에 끊겨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중년 사내가 한제의 손에 들린 마른 식량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풋!”
그 모습에 한제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 상대가 두렵기는커녕 그저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받으세요.”
한제는 봇짐에서 마른 식량을 꺼내 중년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침을 꼴깍 삼키며 헐레벌떡 달려와 한제가 건넨 식량을 단 두 입 만에 먹어치웠다.
“맛있다, 맛있어! 이 몸은 벌써 며칠을 쫄쫄 굶은 터⋯⋯ 응? 이 몸? 내가 왜 나를 이 몸이라고 하는 거지?”
그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처량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뭡니까? 여기에는 왜 온 거죠? 가족은요?”
한제는 상대에게 식량을 조금 더 건네며 물었다. 그는 중년 사내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 감정은 갈수록 깊어져갔다. 마치 예전에 상대와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느낌이었고 어째서인지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사내는 음식을 건네받아 냅다 입에 털어 넣으려다가 한제의 질문에 멍해졌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는 음식을 바라보며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름… 흑흑, 모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깊은 산에 있었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금빛…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에 온통 금빛이 가득했던 것만 기억난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붙잡으려 했어. 허나 그들은 날 잡지 못했지. 흥! 그런데… 난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흑흑. 엉엉!”
사내는 흐느끼며 말했다.
한제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그가 얼마 남지 않은 마른 식량을 단숨에 먹어치우자 실소하며 물통을 꺼내 건넸다.
사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꺼억 하고 트림까지 하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내내 들고 있던 닭다리를 건넸다.
“받아라. 맛은 없지만.”
한제는 웃으며 닭다리를 받아 들어 잘 싸서 봇짐에 넣어두었다.
비는 더욱 거세졌고 천둥번개도 수시로 내리쳤다. 비바람에 사찰의 문은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벽과 부딪혔다. 끼익, 쿵, 끼익, 쿵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 아래 모닥불만이 미약하게 빛났다.
한제와 중년 사내는 모닥불 옆에 앉아 몸을 녹였다.
“어쩌면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스스로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최근에 자꾸 꿈을 꿉니다. 굉장히 생생해 그게 진짜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더군요.”
한제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