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6
중년 사내는 물을 마시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러더냐? 넌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를 거다. 흥! 난 꿈이든 아니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상관없다.”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다. 상대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그였다.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상관없다? 내 꿈은 입신양명해서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분들이 더 이상 친척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요? 당신의 꿈은 뭐죠?”
한제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조금 더 밀어 넣으며 물었다.
하품을 쩍 하던 중년 사내는 그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러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흥분한 듯 말했다.
“나? 나는 꿈이 아주 많다. 많은 영석을 가지고 싶기도 하고 많은 돈을 가지고 싶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배 터지게 먹고 싶기도 하고⋯⋯.”
말을 잇던 그가 군침을 꼴깍 삼켰다.
“영석이 뭐죠?”
한제가 물었다.
“영석? 글쎄, 영석이 뭐지? 내가 말해 놓고도 모르겠네.”
사내 역시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제는 피식 웃고는 광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졸린 듯했던 광인도 한제가 이야기를 들어주자 흥분하는 눈치였다. 그 자신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한제를 보자마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수시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이 모닥불을 휘청거리게 했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두 사람 뒤에 선 거대한 조각상의 알 수 없는 미소가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었고 사찰을 뒤덮었던 서늘함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밤은 깊어졌지만 비는 점점 거세어지며 사찰을 때렸다. 더 이상 마른 가지가 없어 모닥불도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여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이지.”
중년 사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한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사내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뻗었다.
“자 여길 봐라. 뭐가 보이냐?”
중년 사내는 주먹을 가리키며 전보다 더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더럽고 꾀죄죄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기에 한제는 잠시 후에 고개를 저었다.
“응? 아무것도 안 보여? 그럴 리가! 기다려라, 좀 씻고 올 테니까.”
빗물이 고인 곳으로 달려가 손을 씻은 중년 사내는 다시 한제 곁으로 돌아와서는 속삭였다.
“이제는 보일 거다.”
그러나 한제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화가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세히 좀 봐라! 눈을 크게 뜨고! 어, 어떻게 이게 안 보인단 말이냐! 거짓말 하지 말고 제대로 봐!”
머리를 긁적이던 한제는 사내의 오른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입니다. 분명 보입니다.”
“하하, 어떠냐! 대단하지? 흥, 난 이 사람을 찾아갈 것이다. 그자라면 날 알고 있을 거야.”
중년 사내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한데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던 그의 표정은 점차 멍하게 바뀌었다.
“난 이자를 찾아야 해. 그가 나를 잘 돌봐주겠다고 나와 함께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떠나가 버렸지. 누구도 내게 관심이 없어. 나는 홀로 남았어. 그러니 내가 이자를 찾아갈 거다.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는 잔뜩 웅크려 앉아 오른팔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한제는 두꺼운 옷을 꺼내 사내를 덮어주었다. 사내는 잠든 와중에도 오른손으로 옷을 꽉 쥐고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한제를 향해 있었다.
한제는 모닥불 곁에 앉아 조금씩 꺼져가는 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꿈은 꿈일 뿐이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이 삶이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면 그는 이 꿈을 즐기면서 가던 길을 마저 걸을 것이다.
‘꿈은 나의 또 다른 삶이라 생각하자! 그 삶은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슬픔은… 너무도 크니까.’
그는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때, 모닥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고 사찰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한데 사찰 기둥에 기대어 앉은 채 막 잠에 들려던 순간, 한제는 돌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몸을 홱 돌려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오른팔은 이 어두운 사찰 안에서 흐릿한 손바닥 모양의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어 자국을 남긴 것처럼.
한제는 손바닥 자국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손바닥 자국이 너무 흐릿해 지문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비는 날이 밝아올 때가 돼서야 멎었다. 젖은 흙 내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간밤에 한제는 모처럼 꿈을 꾸지 않았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뻐근한 몸을 움직여 근육을 풀어주던 아직 깨지 않은 중년 사내를 보았지만 그의 오른손에서는 더 이상 금빛 손자국을 볼 수 없었다.
의혹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은 한제는 짐을 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뒤이어 길을 나서기 전 중년 사내를 몇 번 흔들어 깨우고는 비몽사몽인 상대에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요. 저는 이한제라고 합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현도로 가는 길이죠. 혹 또다시 연이 닿는다면⋯⋯.”
그러나 한제는 하려던 말을 맺지 못했다. 광인이 풀죽은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잠시 상대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남은 하루치 식량을 그에게 건넸다.
“저는 가야 합니다. 반드시 그분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어째서인지 상대를 이렇게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뒤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흑흑. 누구도 나를 보살피지 않아. 그자도 가버렸고 너도 가버리고… 누구도 나를 보살피지 않아⋯⋯. 엉엉.”
한제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비가 그친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던 그는 결국 다시 돌아서 엉엉 울고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 제게는 시동(侍童)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동을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요.”
한제는 몰랐지만 이 말은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가 광인을 본 순간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고 느낀 것은 주작 시험을 치렀을 때 인의 환계에서 또 다른 삶을 사는 자신의 곁에서 집사 같은 시동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소성의 계화주를 든 채 끊임없이 그 비싼 술값을 걱정하고 있었다.
연혼종의 인(因)
조나라 곳곳에서는 과거를 보기 위해 이동하는 서생이 많았다. 그들은 한제처럼 홀로 움직이거나 삼삼오오 떼를 이루어 조나라에 총 49개가 있는 각 현도로 향했다. 현도에서의 시험에 통과해야만 수재(秀才)가 되어 소성에서 진행되는 두 번째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소성이 유명해진 것은 한 사람 때문이었다. 소도영이라는 이름의 그는 조나라의 대학자로 소성이 조나라에서 지식인의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소성에서의 시험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소거(蘇擧)라고 불리는데 정해진 시간 동안 모든 소거들은 조나라 수도에서 큰 성과를 쌓거나 조용히 떠나게 되었다.
한제는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품은 채 길을 나섰다. 그의 뒤로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중년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봇짐을 멘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하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늘은 먹먹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군데군데 물이 고인 길은 질퍽질퍽하고 미끄러웠다. 원래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한제와 중년 사내는 해가 다 질 무렵에야 저 멀리서 현도를 볼 수 있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뒤덮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한제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이하고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대복, 저 현도에서 며칠 머물 게다.”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시동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중년 사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아주 마음에 들어. 하하핫!”
한제는 껄껄 웃으며 대복과 함께 성문에 이르렀다. 마을에서 가져온 통행증을 꺼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여준 뒤에야 두 사람은 성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비 온 후의 해질녘이었지만 현도 안은 왁자지껄했고 행인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은 한제 같은 서생인 듯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인지 객잔을 네댓 군데나 돌아다녀도 방을 얻지는 못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한제는 점점 초조해졌다. 가까스로 찾은 방은 꽤 비쌌지만 또다시 비가 쏟아질 기미를 보였기에 결국 방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대복은 품에 가지고 있던 한제의 돈을 꺼내 값을 치르면서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많지도 않은 돈인데⋯⋯ 아까워라. 언젠가 무슨 일을 겪으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그 투덜거림에 경멸의 시선으로 한제와 대복을 훑어보던 점원은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방으로 안내했다. 지난 며칠간 서생을 수없이 맞았는데 개중에는 씀씀이가 시원시원한 사람도 있었지만 한제처럼 형편이 좋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순박한 한제는 점원의 안색을 보고 그가 불만스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방을 열자마자 훅 느껴지는 곰팡이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한제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에 덜렁 드러누워 책상 위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이미 잠든 대복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축한 이불에 누워 있으려니 여간 찝찝하고 불쾌한 게 아니라 한참을 뒤척이던 한제는 결국 잠들지 못하고 일어났다. 대복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한제는 책상 앞에 앉아 봇짐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창밖에서는 천둥번개가 끊임없이 내리쳤고 이에 수많은 사람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마치 현도의 하늘이 갈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세찬 바람은 불어닥치면서 빗방울이 창문을 마구 때렸다.
창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내자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 없어진 한제는 미간을 찌푸린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데 그때, 세찬 바람에 창문이 양쪽으로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바람에 마구 흔들리면서 열린 창문이 바깥의 벽에 부딪혔고 굵은 빗방울이 미친 듯이 들이쳤다.
촛불은 그대로 꺼져버렸고 방은 어둠에 잠겼다.
한제의 머리카락과 옷자락도 마구 날렸고 심지어 창문을 통해 들이닥친 빗방울에 책도 젖기 시작했다.
한제는 얼른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천둥번개가 콰르릉 내리치는 바람에 한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굵디굵은 번개는 요란한 날씨에 휘둘리고 있는 현도를 순간적으로 밝게 비추었고 덕분에 한제는 어둠에 잠겨 있던 창문 너머의 도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인지 길 위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여기에 오는 동안 보았던 하얀 새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현도의 하늘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