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8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시험장 안은 약간 어두워졌다. 시험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반 시진뿐이었다. 한제를 제외한 마지막 서생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떠나기 전 한제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성을 못 하겠다면 얼른 나가라.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 감독관이 인상을 쓰고는 한제 곁으로 다가와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한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감았던 눈을 뜨더니 갈아놓은 먹물에 물을 조금 더부었다. 그리고는 이내 빠르게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오두막을 구하는데 산에는 나무가 없으니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아침에는 가지를 취하고 낮에는 그루를 취하며 저녁에는 뿌리를 취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잊은 듯한 한제의 머릿속에는 그 목소리만 맴돌았고 눈앞에는 그림만이 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의혹들을 끊임없이 적어 나갔다.
“허!”
감독관은 얼빠진 표정으로 한제를 자세히 살폈다. 심지어 다른 감독관들도 하나둘 다가왔다. 그러나 이내 그중 누군가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떠나갔다.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나무를 심는 것이 원인이고 나무를 취하는 것이 결과다. 오두막이 완성될 때 그것은 하나의 인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붓을 내려놓은 한제는 자신의 답안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눈에 드러났던 밝은 빛은 흩어져 사라지고 그 대신 멍하고 혼란스러운 빛만 남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곁에 서 있던 단 한 명의 감독관을 향해 포권을 한 뒤 봇짐을 챙겨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감독관은 한제의 답안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뭔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을 반짝이며 그 답안을 제출한 자의 이름을 기억에 새겼다.
‘어린 소년이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런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니, 동량지재는 못될지언정 대학자가 될 인물임은 분명하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감독관은 이내 붓을 들어 한제의 답안에 원을 하나 그렸다.
★ ★ ★
시험장을 나선 한제는 어느 나무 밑에서 종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대복을 보았다. 한데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 그가 막 대복을 흔들어 깨우려던 그때, 하늘이 돌연 어두워지더니 광풍이 불어닥쳤다. 사방에서 울리는 곡성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바람 한 줄기가 한제와 대복을 감싸더니 이들을 이 현도에서 분리해버렸다.
곧 검은 바람 속에서 검은 도포를 입은 한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냉랭한 기운을 발하는 그 사내가 한제를 응시했다.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다. 내 질문에 답만 하면 된다.”
그는 바로 연혼종 둔천의 사형이었다.
둔천의 사형은 연혼종의 미래를 연혼종이 살길을 찾아내야만 했다.
예측으로 얻어낸 결과는 터무니없고 황당했으나 무려 아홉 차례나 연달아 같은 결과가 나온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과는 매번 조나라를 그 안의 어느 현도를 그중 한 서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에 지난 며칠 동안 이곳에서 시험을 보러 온 서생들을 하나하나 찾아 질문을 던졌고 답을 듣는 대로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고 곧장 다음 사람을 찾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아직누구에게서도 만족스러운 답은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일반인에 불과한 서생들이 어찌 그의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겠는가? 조나라는 물론이고 주작성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변기의 수련자가 던지는 질문에 말이다.
사내가 소매를 걷어붙여 일으킨 검은 바람에서 수많은 혼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렸고 이 바람에 휩싸인 이 공간은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듯 흐릿했다.
그 와중에도 대복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런 대복을 향해 서 있던 한제는 뒤를 돌아 저 멀리 검은 세상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선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렵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눈앞의 사내가 강력해 보이기는 해도 실제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내리치던 밤, 머릿속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나타난 뒤부터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이는 설명하기는 힘든 느낌이었다. 특히 막 시험의 답안을 적고 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선인을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던 한제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죠.”
중년 사내는 살짝 놀란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상대는 분명 수련자가 아니었으나 저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은 범상치 않았다. 지금껏 만난 모든 서생이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에 잔뜩 겁을 먹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런 서생들의 입을 열게 하려면 어르는 달래야 했고 이는 꽤나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제 더 백의의 서생은 침착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자신의 등장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선인인 자신을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대하고 있었다.
일반인 세상에서는 왕이라 해도 자신 앞에서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자신이 풍기는 형태 없는 위압감은 일반인은 커녕 어지간한 수련자라도 기겁하게 할 정도였다.
자신의 앞에서 지금 저 청년처럼 침착하고 덤덤했던 일반인은 평생을 통틀어 딱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주작성에서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대학자들이었다.
세상을 깨닫고 꿰뚫어볼 정도로 깊이가 있는 대학자는 굳세고 도도하며 올바른 기세를 가져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식이 높은 대학자에게서는 수련자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연기기 수련자는 그런 상대에게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말없이 한제를 살피던 중년 사내는 이내 포권을 해 보였다.
“난 연혼종의 종주, 염천이라 하네.”
“멋진 이름입니다!”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대학자 같은 기운이 더욱 짙어졌고 이에 주위를 맴돌던 검은 바람 속의 혼은 감히 더 다가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심지어 울부짖던 소리 역시 천천히 잦아들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광경에 깜짝 놀란 염천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두 눈은 기대감으로 번득였다. 자신이 찾던 답이 어쩌면 눈앞의 청년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연혼종이 살아날 길을 묻고 싶네. 내가 지난 백 년간 고민해왔던 이 일을 부디 해결해주길 바라네.”
염천은 진지하게 다시 한 번 포권을 했다.
종파의 전승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일개 일반인에게 묻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염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홉 번이나 같은 결과를 얻은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한제는 그에게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희망을 엿본 한제는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한제는 멍한 얼굴로 침묵에 잠겼다.
“모르겠습니다.”
한참 뒤,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연혼종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선인들의 어느 종파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염천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행동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종파의 전승에 대해 묻다니!
“실례가 많았네. 자네는 훌륭한 유생이니 이 기억은 지워줌세.”
염천은 쓰게 웃으며 소매를 휘두르더니 풀 죽은 모습으로 몸을 홱 돌려 떠나가려 했다.
그런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제는 어디선가 상대를 봤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짊어진 듯한 사내는 매우 지쳐 보였다.
“저를 연혼종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한제는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연이어 꾸었던 꿈을 그리고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에 멀어져가던 염천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참이나 한제를 살피다가 신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한제를 가리켰다. 그러자 검은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 한제의 주위로 응집되더니 이내 중년 사내와 함께 사라졌다.
★ ★ ★
주작성 연혼종. 드넓은 하늘에 나타난 한제는 비록 안색이 창백했지만 표정만큼은 침착했다. 주위를 감싼 검은 바람은 그의 몸을 지탱해 하늘 위에 안정적으로 서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곁에는 염천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우리 연혼종이라네.”
염천은 연혼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연혼종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연혼종을 본 순간, 한제는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그 안의 모든 것이 꿈속에서 본 듯했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좀 걷고 싶군요.”
잠시 후, 한제가 조용히 말했다.
“좋네.”
염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제를 이끌고 연혼종으로 내려갔다. 연혼종 각 산봉우리의 수많은 수련자들은 종파의 대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분분히 나와 염천을 맞이했다.
“종주를 뵙습니다.”
같은 인사말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동안 연혼종 수련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종주와 어째서 일반인과 함께 온단 말인가?
한제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연혼종을 거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이 눈에 익었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위험에 처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익숙함은 점점 커졌다.
한제는 이내 어느 산봉우리 아래에 섰다. 이곳은 더욱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언젠가 여기 머무른 적이 있는 것처럼…
시종일관 말없이 한제의 뒤를 따르던 염천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만남
어둑해질 무렵, 한제의 발걸음은 마침내 연혼종의 주봉(主峰)에 이르렀다.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주봉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제는 이곳에서도 익숙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도 받았다.
그때 주봉에서 콰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꼭대기에서 나타난 한 줄기 검은 인영이 한달음에 달려와 한제와 염천 앞에 섰다.
“사형, 이자는 누굽니까?”
거친 목소리와 함께 한 중년 사내가 한제를 훑어보았다.
“사제, 이자는 내가 데려온 유생이다. 너는 번령(幡靈)과 융합하는 중 아니냐.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돌아가 폐관수련을 이어가거라.”
염천은 애정 어린 눈으로 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사제인 둔천은 씩 웃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한편 한제는 둔천을 본 순간 머릿속이 쾅 하고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생각날 것도 같았다. 이내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떠나가는 둔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바로 이때, 한 마리 하얀 새가 연혼종 상공을 선회하며 울었다.
“수백 년 후, 당신이 입적할 때 한 사람이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연혼종의 살길입니다!”
둔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제가 눈물을 쏟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온몸을 바르르 떤 염천은 한참이나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포권을 했다.
한제가 한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새겨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어느 날, 자신의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을 때 그는 오래 전 만난 한 유생의 말을 떠올렸다.
죽기 직전 침상 위에서 떠올린 그 이름 모를 유생의 말은 그때까지도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어서 숨이 다하는 순간 염천은 자신을 혼번에 내던져 그 안의 주혼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으로 신식을 펼쳐 저 멀리 연혼종 제자들에 뒤섞여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한 평범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본 순간 염천의 신식에는 어마어마한 파문이 일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수백 년 전의 바로 그 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혼란과 불신 속에 그의 신식은 흩어졌고 그의 원영은 십만대혼번의 주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