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39
조나라의 현도로 돌아온 한제는 시험장 밖 나무 옆에 서 있었다. 대복은 여전히 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
방금 겪은 일이 마치 한바탕 꿈인 듯했다.
‘원인과 결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늘을 올려다본 한제의 눈에 또다시 하얀 새가 들어왔다. 상공을 선회하던 새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한제는 이내 대복을 흔들어 깨워 객잔으로 향했다. 어느새 뜬 밝은 달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시험에 통과한 자들은 며칠 뒤 공표될 예정이었다. 유생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수재의 직위에 오른다. 그리고 수재들은 소성에서의 시험을 치를 자격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하늘로 날아오를 기회를 잡는 셈이다. 소성에서의 시험에 통과하면 조나라의 수도에서 마지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능이 남다른 자는 소성의 대학자 소도영의 눈에 들어 이름을 널리 알리거나 그의 제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이는 조나라 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광이었다.
수재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은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한제의 이름은 명단 위쪽에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명단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에도 한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자신보다 더 뿌듯해 하는 대복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내 관아에서 신분을 확인받고 수재 직위를 증명하는 증서와 조정에서 내려준 상금을 받았다.
지난 한 달여의 경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제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한제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꾸는 꿈에도 그는 점차 적응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역시 이미 변해 있었다. 더는 방황하지도 않았고 시험에 떨어질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붙어도 그만 떨어져도 그만이었다.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잔잔한 물처럼 고요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변화를 맞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대학자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수많은 서생들 틈에서 그는 진주처럼 돋보였다. 선인으로서 수많은 수련자를 호령했듯 일반인으로서도 그는 뛰어난 인재가 되어 있었다.
‘인생은 꿈과 같지. 이런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군.’
한제는 수재가 된 것을 기뻐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낙담한 더 많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봇짐을 멘 대복을 데리고 먼저 길을 나섰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침착하고 덤덤한 모습이었다.
대복은 한제의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돈을 계산했다. 수시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그는 꽤나 골치가 아파 보였다.
“대복, 술을 사 와라!”
현도의 문 앞에서 우뚝 선 한제는 주점 좌판을 보고는 일전에 단 두 잔에도 인사불성이 된 과거를 잊은 듯 돌연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돈도 얼마 없는데 무슨 술!”
대복은 눈을 흘기면서 옷섶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이란 원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아니냐. 얼른 가서 사 와라!”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대복을 떠밀었다.
대복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좌판으로 다가가 한제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운 흥정 실력을 보였다.
진상을 부리는 그에게 질린 좌판 주인이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술을 두 병 건넸음에도 대복은 돈을 내기가 아깝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술병을 기울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현도를 빠져나갔다. 잔뜩 인상을 쓴 대복이 얼른 뒤를 따랐다.
해가 쨍쨍한 오전, 두 사람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말없이 걸었다. 한제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쓸쓸함은 이전보다 옅어졌고 그 대신 해탈과 자유가 느껴졌다.
“공자 어딜 가는 거냐?”
저 멀리서 대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성으로 간다. 그곳의 계화주가 그렇게 훌륭하다지?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
한제는 술을 마시며 호탕한 목소리로 답했다.
조나라 수도에서 남쪽으로 5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소성은 매우 큰 도시였다. 몇 마리의 은색 용 같은 강이 도시를 굽이굽이 돌면서 흐르고 있었다.
소성이 유명해진 것은 소도영 덕분이었고 이후 조나라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또한 젊은 사내가 모인 곳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적지 않게 몰리는 법이었다.
그들은 소성을 맴돌면서 흐르는 강 위에서 놀잇배를 탔고 밤새 노래하고 춤을 췄다. 재자의 시, 가인의 춤, 거기에 더해진 음악이 소성을 가득 채웠다.
한편 소성에는 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한 계화주도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수도의 관원들도 종종 사람을 보내 소성의 계화주를 사가곤 했다. 게다가 소도영이 이 술을 좋아해 공부할 때도 마셨다고 알려지면서 계화주는 더욱 유명해졌다.
두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한제와 대복 둘은 낡아빠진 마차를 타고 소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술을 마시며 밖을 내다보는 한제는 잔뜩 취해 수시로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 그만 좀 마셔라! 그동안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아느냐? 벌써 두 달째다! 돈이 다 술값으로 나가 버렸어!”
대복이 울먹이듯 외쳤다.
“계속 이렇게 마셔대다가는 소성에서 방을 얻지도 못할 거다!”
대복의 잔소리는 두 달 동안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제는 대복에게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괜찮다. 시동이자 시종인 네가 있지 않으냐. 돈이 없으면 네가 어디 가서 좀 벌어오면 되지.”
한제는 술을 마시며 놀리듯 웃었다.
대복의 끊임없는 잔소리가 이어지던 이때, 하늘은 황혼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붉은 빛을 받으며 마차는 느릿하고 여유롭게 소성 앞에 이르렀다.
소성은 매우 큰 도시답게 멀리서도 그 웅장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곳곳에 강이 흐르는 그 도시는 보기보다 아기자기했다.
찻값을 지불한 대복은 남은 돈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쓴 돈은 대부분 한제의 뱃속으로 흘러든 술값이었다. 이 무렵 한제는 주량이 늘어 더 이상 이전처럼 두 잔으로 인사불성이 되지도 않았다.
차에서 내린 한제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백의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한 손에 술병을 쥔 그에게서는 학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탈속적인 느낌이었다.
소성의 길가에서 본 사람은 대부분 서생이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한제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느낌에 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여인들의 시선도 섞여 있었지만 한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술을 들이키며 걸었다.
대복은 지난 두 달간 한결같았던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뒤를 따랐다.
어느새 달빛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강 위를 떠가는 놀잇배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제는 어느 다리 위에 서서 강 위의 놀잇배를 바라보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공자 대체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냐?”
대복은 놀잇배 위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을 힐끔거리고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꿈속의 사람. 그 사람은 와서 내게 술을 대접할 거야. 만약 정말 그 사람이 나타난다면 내 추측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겠지.”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겠다고? 우선 싼 방이라도 찾아놓는 게⋯⋯.”
대복은 한제가 들고 있는 술병이 이미 빈 것을 보고 전전긍긍했다. 한제가 또 자신에게 술심부름을 시킬까 걱정이 된 것이다.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지나가듯이 말했다.
“돈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험 합격 상금이 적지 않았지, 아마?”
“그래? 음⋯⋯ 난 잘 모르겠는데⋯⋯?”
대복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몰래 숨겨놓은 돈 있는 거 알아. 가서 계화주를 사 와. 놀잇배도 하나 빌리고. 앞으로 며칠은 배 위에서 지내자고.”
씩 웃으며 돌아선 한제는 대복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수면에는 파문이 일었고 한제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람에는 악기 소리도 실려 있었다.
“⋯⋯정말 올까?”
한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6월의 소성,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를 지나 만발하는 때였다.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한 사위로 바람이 불며 버드나무 씨앗이 눈처럼 흩날리는 광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마치 한여름의 눈꽃 같았다.
허나 아름다운 광경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집이 없는, 혹은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 같은 버드나무 씨앗들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바람에 따라 흩날릴 뿐이었다. 어쩌면 강 위에 떨어져 물들다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바닥에 떨어져 흙먼지와 뒹굴 수도 있었다.
바람이 곧 그들의 운명이었다. 서로 다른 바람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삶을 선사했다.
하얀 버드나무 씨앗 하나가 허공을 가볍게 떠다니다가 크지 않은 놀잇배의 뱃머리에 서 있는 청년의 오른손 손바닥에 떨어졌다.
“무릇 세상은 만물의 여관이고⋯⋯ 세월은 영원히 흘러가는 나그네로다. 한바탕 꿈같은 인생⋯⋯ 기쁨을 즐긴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백의의 청년은 술병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호탕한 기개로 시구를 읊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시원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청년의 뒤로는 시동 복장의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의 씁쓸한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청년이 술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계화주 한 병에 은자를 일곱 개나 내야 하다니, 너무 비싸잖아!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은자 반 개를 마시는 꼴이라니⋯⋯.’
청년의 손에 떨어진 버드나무 씨앗은 잠시 멈칫했다가 슬쩍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다시 날아올라 더 먼 곳으로 향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모습에서는 자신이 결국 허무로 돌아갈 것을 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둑에는 복숭아나무로 이루어진 숲도 있었다. 버드나무 씨앗이 저 멀리 날아가는 동안 복숭아 꽃잎이 강물로 떨어져 수면 위를 떠다녔다.
“광기 어린 버드나무 씨앗은 춤추고 가벼운 꽃잎은 강 위를 떠가는구나!”
한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싹 비운 뒤 씩 웃었다.
이 놀잇배에는 그와 시동 외에도 아름다운 세 여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악기를 연주했고 다른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배는 강 위를 둥실 떠가며 돌다리 아래를 하나하나 지났다.
소도영
“대복, 술을 더 가져와라! 취해보자꾸나!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돌아선 한제가 시동에게 말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대복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술병을 하나 건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공자 이번에는 진짜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놀잇배도 빌리고 술도 사고 저 여인들까지 초빙하지 않았느냐! 매일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하단 말이다! 이제 좀 싼 객잔에 머물면서 돈을 아끼는 것이 어떻겠느냐!”
“뭐 그리 급하게 굴어?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도 않았거늘…”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웃더니 다시 술을 다시 마시며 아름다운 여인의 연주를 음미했다. 경쾌한 연주였지만 그저 귓가에만 스칠 뿐 마음에 닿지는 못했다.
“공자 이제 숨겨두었던 돈까지 다 썼단 말이다! 이⋯⋯ 젠장할! 이대로는 일주일 후면 우리는 당장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고!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대체 누굴 기다리는 것이냐? 그리고 왜 그자는 여태 나타나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