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0
마음이 급해진 대복이 한제를 향해 마구 잔소리를 해댔다.
그의 그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곁에서 춤을 추다가 잠시 쉬고 있던 여인이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이에 대복은 그 여인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투덜거리더니 이내 술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디 한 모금에 은자 반 개나 되는 술은 어떤 맛인지 나도 좀 마셔보자!’
그때 배 한쪽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한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음악이 아니다.”
한참 뒤, 약간 취기가 올라온 한제는 연주를 하던 여인 곁으로 다가가 칠현금 위에 손을 얹었다. 연주하던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얼른 악기에서 손을 뗐다.
“기억하고 있는 곡이 하나 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들어봤지. 그녀는 분명 이렇게 연주를 했는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고 악기에 얹은 오른손을 퉁겼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고 뚝뚝 끊겼지만 한제의 심신이 녹아듦에 따라 점점 하나의 음악이 되어갔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는 이 음악은 널리 퍼져 나갔다.
배 위에서 쉬고 있던 두 무희는 놀란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연주에 스며든 슬픔은 아주 옅었지만 사람의 영혼을 적시고 심신을 떨리게 했다.
언제부턴가 한제는 악기 앞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연주를 하던 여인은 한제의 연주에 푹 빠져 있는 듯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복조차 멍하니 술을 홀짝이며 아쉬움과 불만을 모조리 잊은 채 자신의 오른손 손목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제가 연주하는 곡은 모완이 연주했던 곡이었다. 요령의 땅에서 눈 먼 여인이 연주했던 곡은 이 곡과는 달랐지만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만큼은 똑같았다.
한제의 감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칠현금 위로 떨어졌다. 마치 그 눈물까지도 연주에 녹아드는 듯했다.
꿈은 매일 밤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한제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렇다고 꿈에서 본 모든 사람이 또렷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 몇몇은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 모호함에 한제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어느덧 황혼이 찾아왔고 곧 날이 저물었다.
한제가 누군가를 기다린 지도 한 달이 넘은 상태였지만 꿈속의 그 사람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놀잇배가 어느 돌다리 밑을 지나가던 때였다. 돌다리 위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두 사람이 슬픈 곡조가 흘러나오는 한제의 놀잇배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중 한 명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소나무 같았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그의 두 눈은 지혜로 반짝여 가만히 있는데도 대학자의 풍모가 넘쳤다.
그는 소도영이었다.
“슬픈 곡이구나! 아무나 연주할 수 없는 곡이야. 게다가 이 슬픔에는 오직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이 담겨 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잊히지 않고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슬픔인 게지. 소삼동, 내가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소도영은 감동한 눈으로 다리 아래를 천천히 지나가는 놀잇배를 그리고 그 위에서 연주 중인 한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노인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한제가 보았다면 단박에 알아차렸을 그는 지난번 시험장에서 한제의 답안을 살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감독관이었다.
“연주까지 할 줄 아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지난번에 제출한 시험 답안이 범상치 않았을 뿐이지요. 스승님을 뵈러 왔다가 저자를 다시 보게 되어 스승님을 모셔온 겁니다.”
감독관 노인은 공손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놀잇배는 점점 먼 곳으로 나아갔고 연주 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소도영은 빙긋 웃더니 다리의 난간을 잡고 아래쪽의 놀잇배를 향해 외쳤다.
“젊은이, 혹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내게 답해줄 수 있겠는가?”
한제의 두 손이 우뚝 멎었다. 연주를 멈춘 그는 멍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위치에서는 다리 위에 선 푸른 옷의 노인만 볼 수 있었을 뿐 그 뒤의 감독관 노인은 볼 수 없었다.
어둑한 밤, 밝은 달빛 아래 약간은 흐릿한 노인과 둥근 다리는 몽환적이었다.
“원인과 결과라⋯⋯.”
한제는 멍하니 다리 위의 노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아니야. 만약 이 모든 것이 되풀이되는 상황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라면 내가 만났어야 하는 건 꿈속의 나여야 하는데⋯⋯ 어째서 저 노인을 만난 거지? 어째서⋯⋯?’
한 달을 넘게 기다려왔다. 내내 술에 취해 있었던 것도 한순간 술을 번쩍 깨게 했던 꿈속의 상황을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꿈속에서 그는 이 강 위에서, 저 돌다리 위에 서 있던 또 다른 자신을 만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만난 것은 또 다른 그가 아니라 한 노인이었다.
‘이해가 안 돼. 난 연혼종에 대해 알고 있고 심지어 그곳에서 수백 년 뒤에 나타날 사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이 꿈속의 나라는 것도⋯⋯. 한데 그 모든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마주한 것은 어째서 저 노인인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제가 멍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 그를 태운 놀잇배는 점점 먼 곳으로 흘러갔다.
소도영은 생각에 잠긴 한제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신 한 번 외쳤다.
“젊은이, 말해보게.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 내가 곧 원인이고 내가 곧 결과다⋯⋯.”
이 목소리는 둥둥 떠가는 놀잇배를 따라 흩어져 사라졌다.
소도영은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놀잇배를 바라보다가 제자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한제라고 합니다.”
소삼동이 얼른 답했다.
“저자의 답안을 다오.”
소도영이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삼동은 그런 상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가 이곳까지 스승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 답안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도영은 이 다리로 오기 전까지 답안을 보지 않은 상태였다.
한제의 시험 답안지를 펼쳐 자세히 읽던 소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내 마지막 제자가 될 것이다.”
소도영은 웃음을 머금은 채 이미 먼 곳으로 떠나간 놀잇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버드나무 씨앗이 사방으로 날려 소도영이 그 씨앗을 보는 건지 아니면 한제가 탄 놀잇배를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소도영은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 ★ ★
며칠 후, 뭍에 오른 한제는 한 달 넘는 시간을 보낸 놀잇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반 시진이나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어떤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익숙한 하얀 새가 눈에 들어왔다. 상공을 선회하던 새는 이내 멀리 떨어진 돌다리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한제를 마주 보다가 다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너냐?”
한제가 중얼거렸다.
★ ★ ★
소성에서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한제는 놀잇배에서 내린 그날 소성의 대학자 소도영의 초대를 받았다. 그를 안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현도에서 시험을 봤을 당시 그의 곁에 붙어 있었던 감독관이었다.
소도영의 집은 크지 않았지만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원에 이른 한제는 일전에 돌다리 위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했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한제는 대복을 정원에 남겨둔 채 소도영과 함께 정원의 정자에 앉아 계화주를 마셨다. 한 젊은이와 한 노인은 마주앉아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다.
달이 휘영청 떠올랐을 무렵, 한제가 소도영을 향해 절을 올렸다.
“내 평생 거둔 제자는 아주 많으나 진정한 제자는 세 명뿐이다. 이제 너는 내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난 네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길은 네게 어울리지도 않지. 난 네가 내 사후에 우리 조나라의 대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니, 조나라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지. 주작성의 대학자가 되어라!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하겠지만 세상에 대한 깨달음과 너만의 사상을 갖게 될 것이다!”
한제는 머리를 조아린 채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는 수련자들도 있다. 그간 여러 수련자가 나를 찾아와 수련자가 될 것을 청했지만 난 응하지 않았어. 내게는 나만의 꿈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도가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육신은 나약하지만 내 사상은 오래도록 이어져 세상이라는 철창을 깨부술 터! 손짓 한 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박멸할 수 있는 수련자들도 그런 사상과 깨달음을 가진 대학자 앞에서는 그 고귀한 머리를 숙이기 마련이지.”
노인의 목소리에서는 올곧은 기개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수련자는 하늘에 거역하는 삶을 살지만 우리 유생들은 하늘을 이해한다. 허나 이 역시 하늘에 반항하는 일! 하늘에 영혼이 있다면 그 눈에는 수련자도 일반인과 같은 존재로 보일 게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산을 무너뜨리고 땅을 갈라버릴 힘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 결국 두 가지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대학자는 자신의 마지막 제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간 거둔 제자들 중에는 수련자도 적지 않다. 그들은 화신기라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 날 스승으로 모시며 경지에 대해 물었지. 심지어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한제야, 너는 수련자의 삶을 살고 싶으냐?”
소도영은 달빛 아래 산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지만 그에게서 한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을 똑똑히 느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만의 사상을 가졌을 때 자연히 갖게 되는 기운. 소도영을 지금과 같은 최고의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한 덩어리 화염처럼 체내에서 타오르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유생, 대학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사(君師)!”
소도영은 뒷짐을 진 채 한제를 응시했다.
한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한 번 소도영에게 절을 했다.
한제의 나이 열아홉, 소도영은 여든세 살이었다.
소도영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소년 시절 입신양명하여 관직에 오른 나는 중년이 되어 사직한 뒤 수많은 나라를 유랑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보았다. 그리고 내 나이 쉰이 되어 아내가 죽었을 때 묘 앞에서 슬피 울며 이 세상을 인생을 깨달았지. 삶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내와 함께한 날들이 떠올랐다. 그 후 나는 인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어째서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순환하는가!”
10년
이날 밤, 한제의 인생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자신의 삶과 꿈을 생각했다. 그는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싶기도 했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목소리를 쫓고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