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3
한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온 세상을 뒤흔들 법했다.
비검을 쥐고 있던 청년은 그 호령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축기기 초기에 불과한 수련자인 그에게 한제는 매우 강력하고 거대해 보였다.
한제가 풍기는 위압감에 청년은 창백하게 질리더니 왈칵 피를 토해냈다. 검에서 발산되던 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그는 덜덜 떨며 비검을 떨어뜨리더니 다급하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일반인 따위가…”
청년은 거의 발광하듯 외치며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생들 역시 경악했다.
놀란 청년 수련자가 다급하게 도망치던 순간, 술집 안의 다른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나타난 청년보다 수준이 높은 축기기 중기의 수련자였다.
한 발 앞으로 나온 그는 동료의 등에 한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들어, 수많은 이들이 꿇어앉아 있는 가운데 꼿꼿이 서 있는 한제와 대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덜덜 떨릴 정도의 기운이 상공에 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보기만 해도 심신이 진동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에 수많은 잡생각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깨질 듯했고 청년은 결국 피를 토해냈다.
“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너희 수련자를 미물로 보는 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느냐? 너희만이 아니라 주작성 모든 선인이 몰려든다 해도 상관없다!”
한제는 형형한 눈을 번득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청년 수련자는 머리가 저릿해왔다. 한제는 허약해 보였지만 그런 상대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두 수련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신을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움을 안기기에도 충분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일반인이 저런 기운을… 저, 저자는 건드릴 수 없어!’
감히 떠나가지도 못한 채 그는 공손한 표정으로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대학자께서 괘념치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희는 이만 떠나 소성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해 긴 빛을 그리며 먼 곳으로 나아갔다.
주위는 적막에 잠겼다.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이어서 입가에 흐른 술을 훔쳐내고는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소일동을 바라보았다.
소일동은 한참 뒤에야 발버둥 치듯 일어나더니 한제를 향해 절을 했다.
“소일동, 조나라의 대학자를 뵙습니다.”
“조나라의 대학자를 뵙습니다.”
주위의 다른 서생들도 포권을 했다. 바르르 떨리는 두 눈에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숭배심이 어려 있었다. 오늘 본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심지어는 집 밖의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러 노인들도 분분히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진심으로 한제에게 설복된 것이다.
일반인이 선인을 두렵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방금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이 솟구쳐 올랐다. ‘온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을 넓혀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선인을 보더라도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온 조나라에 퍼지게 될 터였다.
“피곤하군.”
술병을 쥔 한제는 집 너머의 술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 감히 한제와 눈을 맞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제를 향해 절을 했고 계단에서 내려온 한제는 대복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뜰 안의 수많은 서생들은 한제를 향해 연거푸 절을 하고는 하나둘 떠나갔다. 저마다의 목표를 가지고 모여든 이들이 흩어지자 소성은 천천히 평소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후로 더는 누구도 감히 한제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한제의 명성은 더욱 커졌고 그렇게 그는 스승인 서도영을 대체하는 조나라의 대학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더욱이 전례 없이 선인을 놀라게 한 대학자이기도 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한제가 약속한 10년 동안의 강연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그저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봄이 가고 가을이 오기를 반복한 끝에 눈 깜짝할 사이 8년이 지났다.
한제의 나이는 쉰에 가까워졌고 머리카락도 절반은 하얗게 센 상태였다.
지난 8년 동안 한제는 매달 며칠씩 늙은 대복과 함께 놀잇배에 올라 계화주를 마셨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총 28년의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돌다리 위에 나타나야 할 그 사람은 여태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냐⋯⋯?”
아직 정정하지만 여전히 인색한, 심지어는 전보다 더 짠돌이가 된 것 같은 대복은 놀잇배 위에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그는 수시로 오른팔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뭔가를 떠올려내려 노력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나를 기다린다. 나와의 만남을⋯⋯.”
전보다 더 늙고 목소리도 거칠어진 한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에서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지난 28년 동안 내내 한제의 곁에 머물러 있던 그 새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새를 바라보던 한제는 피곤해졌는지 뱃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연주 소리는 그의 꿈에 녹아든 듯 꿈속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대복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자신의 오른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에 한제는 더 달게 잠이 들었다. 한데 그때 바람에 실려 온 버드나무 씨앗이 뺨을 훑고 지나갔고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배는 아직도 강 위를 떠가고 있었다.
눈앞을 스쳐가는 버드나무 씨앗을 바라보던 한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복아, 20여 년 전을 기억하느냐? 우리가 막 소성에 도착했을 때 말이다. 그때도 버드나무 씨앗이 날렸지. 우린 이렇게 뱃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때, 멀리서 다른 놀잇배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배가 스치듯 지나갈 무렵, 두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저, 이곳에는 버드나무 씨앗이 짜증 날 정도로 많네요. 귀찮아 죽겠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그러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한제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번쩍 들자 건너편 배에 앉은 두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버드나무 씨앗 아래의 젊고 아름다운 두 여인은 마치 선녀 같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옷자락이 더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저 여인들은⋯⋯?”
한제는 멍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20여 년 전 그날 밤, 비를 피하기 위해 여인들의 배에 올랐던 그때가 떠올랐다.
한제의 얼굴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날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당시 보았던 검은 산과 어두운 구름을 당시 느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희라는 여인이 선의를 담아 해주었던 질책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비 오던 밤, 배 위의 천막, 붉게 상기된 얼굴, 쿵쾅대는 뛰었던 심장, 아름다운 두 여인… 그리고 잠든 자신의 몸을 덮은 피풍의… 그는 여전히 피풍의를 보관하고 있었다.
한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흰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건너편 배 위의 두 여인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술을 마셨다.
지난 28년 동안 그는 고독 속에서 살아왔다. 그의 곁에 늘 함께했던 것은 술과 대복, 그리고 하늘을 맴도는 하얀 새뿐이었다. 평생 그의 마음을 떨리게 했던 유일한 여인은 소년 시절 만난 주예라는 이름의 여인뿐이었다. 피풍의를 덮어주었던 바로 그 여인.
뱃머리에 기대어 앉은 채 술을 마시던 한제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늙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여인을 태운 배는 점점 멀어져 갔다. 마치 한 번의 접점 이후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생의 궤적이 그러하듯.
“사저. 저 늙은이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서희가 점점 멀어져 가는 배 위에 앉은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놀잇배는 어느 돌다리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예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한제의 배는 이미 돌다리에 가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신식까지 이용해 상대를 확인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배는 점점 멀어져 갔다.
뱃머리에 앉은 한제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복에게 말했다.
“대복, 소성을 떠나자. 이곳에서 기다린 세월이 벌써 28년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집? 무슨 집?”
대복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대산 아래의 집.”
★ ★ ★
배에서 내린 한제와 대복은 고개를 돌려 강을 그리고 지난 28년 동안 머문 소성을 바라보았다.
버드나무 씨앗이 눈처럼 내리던 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한제가 가진 거라곤 몇 동이의 술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는 지금도 버드나무 씨앗은 눈처럼 내리고 있었고 그에게는 여전히 몇 동이의 술밖에 없었다.
★ ★ ★
마차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제와 대복 그리고 몇 동이의 술을 싣고 천천히 소성을 빠져나갔다.
해가 질 무렵, 소성의 강 위에 뜬 놀잇배에 탔던 두 여인은 배에서 내려 시내로 향했다. 어느덧 그들의 용모는 평범하게 변해 있었다.
“사저는 어렸을 때 이곳에서 자라셨다고 했죠? 소성에는 놀잇배 말고 다른 놀잇거리가 없나요? 오랫동안 폐관수련만 하다가 드디어 나왔으니 신나게 놀고 싶어요.”
“난 부모님을 뵈러 갈 거야. 사매는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소성은 놀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거든. 그리고 내일은 대학자 소도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야. 그분과 우리 가족은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냈지. 그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스승님도 그분 앞에서는 공손하게 구실 정도니까.”
임종
두 여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곁을 지나던 서생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두 아가씨께서는 조나라를 오랫동안 떠나계셨나 봅니다. 소도영 대학자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가 10년은 됐습니다. 현재 조나라 대학자의 이름은 이한제예요. 소도영 대학자의 제자였죠.”
그 순간 깜짝 놀란 두 여인은 서생이 떠나가는 것도 몰랐다.
“이한제⋯⋯ 이한제라⋯⋯ 아, 사저! 생각났어요! 아까 낮에 놀잇배에서 우리를 봤던 늙은이… 많이 늙긴 했지만 분명 그때 봤던 서생 이한제였어요!”
걸음을 우뚝 멈춘 주예가 고개를 홱 돌려 노을 아래 흐릿해지는 강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그 당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소년 이한제가 떠오르는 듯했다.
“사저, 왜 그래요?”
서희는 주예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내저은 주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열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뭔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