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4
“여기서 기다려!”
그 한 마디만을 내뱉은 그녀는 몸을 훌쩍 날리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방에서는 행인들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선인이다!”
“선인이야!”
서희는 주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로 떠오른 주예는 강을 따라 신식을 뻗었다. 하지만 소성 곳곳을 살펴도 그녀가 찾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도시 전체를 몇 번이나 뒤졌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떠난 건가⋯⋯?”
자신이 왜 이러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상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두 갈래의 다른 길이 한 번 교차한 뒤에 다시 만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 ★ ★
소성으로부터 수십 리 떨어진 곳. 마차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한제는 마차에 앉아 차창에 드리운 발을 가르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한제는 귀밑머리가 희끗해지고 있었다.
이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상공을 나는 하얀 새가 들어왔다. 그 새 역시 한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을 향해 날고 있는 듯했다.
나이를 먹은 몸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 마차에 앉아 있으려니 뼈 마디마디가 쑤셔왔고 금세 피곤해졌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갔다. 소성에서 출발한 지 4개월 만에 대산 근처에 이른 한제의 머리 위로 파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길을 떠났을 때만 해도 파릇파릇했던 나뭇잎은 어느덧 노랗고 붉은 낙엽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곧 하나둘씩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28년이 지났군.”
주위의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던 한제의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한제에게는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으나, 고향을 떠났을 당시 열여덟 소년이었던 그는 어느덧 반백에 이르렀다.
마차는 좁은 길을 따라 깊은 산골로 향했고 이내 집에 도착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반겨주었지만 강건했던 아버지는 이제는 지팡이 없이는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백발이 성성한 아내의 부축을 받아가며 돌아온 아들을 웃는 낯으로 맞았다.
아들은 조나라의 대학자로 이씨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28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아이일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몇 년 전 소성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한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곧장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 앞으로 다가가 절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대복은 한제의 그런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마차에서 내린 뒤 곧장 꿇어앉았다.
“아버님, 어머님, 대복이도 왔습니다.”
한제의 아버지는 크게 웃더니 한제보다 대복을 먼저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허! 그때와 똑같군. 그동안 우리 한제를 잘 돌봐줘서 정말 고맙네. 하지만 한제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할 필요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부모님의 환대에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이내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축해가며 대복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야, 이번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이냐?”
어머니는 자애로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한제는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한제는 우리 조나라의 대학자야. 황제조차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바쁘고 귀한 몸이 오래 있을 수 있겠어?”
아버지가 꾸짖듯 말했다.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거예요.”
한제는 어머니를 그녀의 성성한 백발을 주름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이 산골 마을은 며칠 내내 떠들썩했다. 여러 이웃이 찾아와 마을의 자랑인 대학자 한제를 만나고 갔다. 심지어 현 내의 서생과 관원들도 곧장 달려왔다. 이씨 가문의 먼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자 한제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뿌듯함, 그리고 기특함으로 굽었던 허리가 다 꼿꼿해졌을 정도였다.
의기양양해진 아버지는 마을 광장에서 잔치를 열었다. 산골 마을의 잔치라고 해봐야 보통은 간단하고 소박하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일손을 거든 덕분에 무척 호화로운 잔치가 됐다. 심지어 도시에서 요리사를 초빙해온 사람도 있었다.
한제는 본디 이렇게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잔치에는 이가 친척들도 참석해 모두 한제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한제가 살짝 고개만 끄덕여줘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다.
친척 중에는 한제와 동년배인 이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친척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한제는 이 광경을 꿈속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꿈속의 장면과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 한제는 부모님이 조금 지친 것을 보고는 그들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간 이어진 잔치가 끝나자 산골 마음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한제야, 너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찌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냐?”
약간의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중얼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제는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자신이 자란 마을에서 시간을 보냈다.
5년 뒤, 한제가 과거를 보러 떠났던 열여덟 이후로 서른세 번째로 맞는 가을이 찾아왔다. 낙엽들이 제 뿌리를 찾듯 길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이때, 한제의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들을 향한 그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뿌듯함, 그리고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한제야, 이 아비는 네 덕분에 행복했다. 난 글도 모르지만 글을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네가 쓴 책을 읽어달라고 한 적도 있단다. 넌 어느 책에선가 생로병사란 춘하추동과 같다고 했지⋯⋯.”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빛나는 미소 아래 숨겨진 강한 두려움을 한제는 읽어낼 수 있었다.
죽음을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죽음 이후의 고독과 아득함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 아버지의 눈빛이 흐려졌다. 무력함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아버지, 두려워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잖아요.”
한제의 머리카락도 이미 반 이상이 세어 있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허약한 아버지의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아버지, 제가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주셨던 생일선물, 기억하세요? 작은 목마였죠. 며칠 전에 집에서 찾았는데⋯⋯.”
뜰 밖의 수령이 백 년도 넘은 큰 나무는 잎이 다 떨어지고 이제는 단 하나만 매달려 있었다. 바람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잎을 사정없이 때렸고 흔들거리던 잎은 결국 휙 날아 한제의 집 지붕에 떨어졌다.
“⋯⋯아버지.”
아들의 품에 안긴 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두려움을 잊은 그의 아버지는 결국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지붕에 떨어진 낙엽은 한 줄기 혼이 실린 듯 다시 날아올라 저 먼 곳으로 떠나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어머니 역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치 잠든 듯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속에서 남편과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갓난아이였던 시절,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건 한제가 울음을 그치고 다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속삭여주었던 사람. 한제가 잠을 자다가 종종 이불에 오줌을 싸던 시절, 아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몇 차례나 일어나 이불을 확인했던 사람.
조금 더 자란 후로는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차려주었던 사람. 생선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항상 생선의 머리와 꼬리만 먹었던 사람. 왜 몸통은 먹지 않느냐는 아들의 순진한 물음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는 당신은 머리와 꼬리가 더 맛있다고 답했던 사람.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던 사람.
성인이 된 후에도 한결같은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미소 짓던 사람.
그 사람이 어머니였다.
갓난아이였던 시절, 두 손으로 한제를 안아 높이 들어 올렸던 사람.
두 손을 잡고 걸음마를 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
어린 한제의 손을 잡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과 강을 구경시켜준 사람. 한제에게는 산처럼, 하늘처럼 보였던 사람.
생선의 머리와 꼬리를 좋아한다는 엄마에게 아들이 정말로 생선의 머리와 꼬리를 넘겨주자 아내를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던 사람.
한제가 자란 후로는 더없이 엄격해 조금씩 어려워졌던 사람. 하지만 그 엄한 눈빛 아래 언제나 사랑을 숨겨놓고 있었던 사람.
늙어 병상에 누운 채 천천히 감기는 두 눈이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잠식됐다가도 아들이 꼭 안아주자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안심하며 평화롭게 숨을 거둔 사람.
그 사람은 아버지였다.
한제는 부모님의 무덤 앞에 앉아 눈물을 쏟으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부모님과의 기억 하나하나가 마음을 찌르는 듯했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취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꿈속에서 보았던 또 다른 삶 속의 그는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의 몸을 안아주지도 못했고 어머니의 얼굴에 입을 맞춰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었다.
만약 아내가 있었더라면 아이가 있었더라면 부모님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더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평생을 홀로 지내온 한제는 슬픔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이제는 지치고 힘들 때 안아줄 따뜻한 품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우울할 때 부드러운 미소로 다독여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뜨고 지는 해를 오직 그 혼자서 보게 될 것이다.
삼년상을 치른 한제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게 세어 있었다. 몸도 더 이상 이전처럼 꼿꼿하지 않고 약간 굽어 있었다. 그에게서는 세월의 흐름이 남긴 흔적이 여실히 느껴졌다.
“38년이 되었군⋯⋯.”
얼굴 곳곳에도 주름이 있었다. 지금의 그는 벌써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다.
그보다 더 늙은 대복은 지팡이를 짚은 채 뒤에 서서 묵묵히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쪽 팔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태껏 지나 보낸 38년이라는 세월이 인생에 몇 번이나 더 존재할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게 다음 38년은 없을 거야.”
중얼거리며 꿇어앉은 한제는 부모님의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 오래된 사찰을 기억하나?”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가 고개를 돌려 삶의 끝에 이르러 있는 듯한 대복에게 물었다.
“그 오래된 사찰에서 내게 시동이 없으니 함께 가자고 했었지.”
상념에 잠긴 채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지난 38년을 자신과 함께해온 대복을 바라보았다.
“난 아직도 시동으로 일할 수 있어.”
대복은 눈을 굴리며 씨익 웃었다.
“넌 늙었어. 나도 그렇고⋯⋯. 하지만 내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대복, 나 대신 이 집을 지켜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높이 하얀 새가 날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 아직 부족해. 주작성의 수많은 나라를 돌아볼 거야. 정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더라도 혹은 그러지 못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