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5
그해 봄, 한제는 홀로 또 한 번 산골 마을을 떠났다. 대복은 집에 남아 묵묵히 한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알 수 없었다.
류미
혼자 마차에 오른 한제는 술병을 기울이며 대산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몇 개월 뒤, 마차는 조나라 변경에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린 한제는 마부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조나라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생에 처음으로 조나라를 벗어난 그는 어디로 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발 닿는 대로 갈 생각이었다.
한데 그가 막 첫걸음을 뗀 그때, 하늘에서 돌연 몇 줄기 빛이 나타나 그의 위쪽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한제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머리 위를 지나친 빛 안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러 갈래의 빛 사이에서 한 여인이 내지른 소리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우뚝 멈춰선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한제를 살폈다.
“무슨 일이야, 류 사매?”
곁에서 다른 수련자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먼저 종파로 돌아가세요. 전 볼일이 좀 있어서요.”
아름다운 여인은 그 말만을 남기고 곧장 몸을 돌려 아래로 향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던 수련자가 흠칫 놀라 뒤를 따르려 하자 여인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사형, 혼자 움직이고 싶어요.”
결국 그녀의 사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먼 곳으로 향했다.
그때, 걸음을 멈춘 한제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내려오던 아름다운 빛 한 줄기가 그로부터 1백 척 떨어진 곳에서 여인으로 변했다.
한제가 평생 봐 온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심지어 주예조차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한제는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만의 사상을 가진 그에게 여인의 아름다움은 눈 감으면 사라질 겉모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인은 1백 척 너머에 서서 늙은 한제를 성성한 백발을 얼굴 가득한 주름을 지혜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절을 했다.
“어르신, 수십 년 전 저는 당신을 봤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네요. 저를 기억하십니까?”
여인을 잠시 바라보던 한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군요.”
“상관없습니다. 어르신, 저는 어째서인지 어르신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번, 처음 봤을 때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함자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이한제라고 합니다.”
한제는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이한제?”
여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민하다가 의혹이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조나라의 대학자 이한제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온 세상을 담은 듯 깊고 짙었다.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요.”
여인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지만 상대로부터 느껴지는 익숙함의,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한제를 보고 있으면 그 고통이 몇 배로 더 강해지는 이유도 특히나 늙어버린 상태의 모습에 고통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혼란과 슬픔이 어린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아가씨의 이름은 어찌 됩니까?”
여인이 떠나기 전에 한제가 물었다.
“류미라 합니다.”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려 단약 한 알을 꺼냈다.
“노쇠한 몸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단약을 넘긴 류미는 발아래에 나타난 구름과 함께 둥실 떠올랐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전생인가 환생인가 꿈인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아닌 걸까? 류미라⋯⋯. 꿈속의 삶에서 내게 끔찍한 고통을 주었던 여인⋯⋯.’
한제는 단약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언제가 되었든, 내생에라도 혹은 꿈속에서라도 절대 이한제라는 이름의 수련자와 가까이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와 접촉하지 마십시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아팠으나 이미 저 먼 곳으로 가버린 류미가 그의 말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제의 눈에 류미가 그리는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제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혼란스러웠다. 한참이 지난 뒤, 땅에 떨어져 있는 단약을 집어 든 그는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품에 챙겨 넣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는 주작성 곳곳을 누볐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세상에 대한 깨달음과 나름의 사상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어느 날, 한제는 류미라는 여인이 준 단약을 삼켰다. 단약은 그에게 무궁무진한 기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대로 각국을 주유할 힘도 주었다.
한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량한 이들도 있었지만 흉악한 이들도 있었고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사리에 어둡고 완고한 이들도 있었다.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마적 떼를 마주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력한 기운을 똑똑히 느꼈기에 감히 어쩌지는 못했다. 선인조차 놀라 물러나게 한 한제를 일반인들이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한제는 점점 늙어갔지만 두 눈은 갈수록 밝아졌다. 무궁무진한 지혜와 깨달음을 품은 듯한 눈빛은 사상적으로 환골탈태하게 하였고 또 한 번 승화가 일어났다.
각 나라의 수도에도 수차례 방문해 귀족과 고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기질과 그의 언변은 점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일반인들의 추앙을 받는 황제도 더러 봐왔지만 한제에게 그들은 모두 똑같아 보일 뿐이었다.
오나라 황궁에서는 수많은 금군이 정렬해 있었다. 황제의 명만 떨어진다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이들이었다. 오나라의 황제는 한제가 이곳에 머물면서 오나라의 대학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뒤 돌아 떠나갔다. 그 순간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바람과 구름의 기색도 변하는 바람에 궁 안에 정렬해 있던 금군은 감히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손나라에서는 황제와 수많은 신하가 한제를 천 리 밖까지 배웅했다.
그런가 하면 천구국(天狗國)의 차고 넘치던 악한 백성들은 한제가 떠날 무렵 대부분 교화되어 있었다.
대학자 이한제의 이름은 폭풍처럼 주작성을 휘감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그러는 동안 한제는 수많은 산들을 봐왔다. 그중 어느 산 위에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그 드넓음을 실감했다. 선인들을 만나기도 했고 수많은 백성들도 만났으며, 익숙한 이들도 만났다.
주작성의 여러 수련국에는 수많은 종파가 있었고 각 종파는 대부분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위험하고 험준한 곳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산을 오르고 들을 돌아다니는 동안 한제는 가끔 여러 산봉우리에 자리 잡은 종파들을 방문했다.
종파를 보호하는 진의 강약은 서로 달랐지만 한제의 발걸음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저 한제가 발을 들이기만 하면 됐다. 그때마다 각 종파의 수련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심지어 오랜 시간 폐관수련만을 해오던 수준 높은 수련자들도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력한 기운에 퍼뜩 깨어 찾아왔다.
한제는 여유로운 얼굴로 들어가 풍광을 즐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수련계에서도 일반인 대학자 이한제의 이름이 서서히 퍼져 나갔고 수련자들은 자신들마저 두렵게 만들 수 있다는 일반인 대학자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상이었다.
“수련자도 일반인도 그저 중생일 뿐⋯⋯.”
한제는 어디를 가든 이런 말을 남기곤 했다.
수련자 중에는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깨달음을 얻고 경지를 얻게 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미 화신기에 이른 이들도 한제와의 대화에서 종종 심신이 진동하는 충격을 받곤 했다.
1년, 그리고 또 1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눈 깜짝할 사이 12년이 지났다.
12년 전, 홀로 조나라를 떠나왔던 그는 아직까지도 홀로 주작성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눈발이 내리던 어느 날, 한제는 이름 모를 어느 나라의 도시에 이르렀다. 조나라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매우 넓은 나라였다.
한제는 꿈속에서 방문한 적이 있던 도시의 성문 밖에 서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 속 늙은 그의 모습에서는 한 줄기 슬픔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는 몸을 덮은 가죽 피풍의를 더욱 단단히 여민 뒤 성안으로 들어섰다.
뽀드득, 뽀드득.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 한제 앞으로 펼쳐진 길은 매우 조용했고 행인들도 많지 않았다. 길 양옆의 가게에도 손님은 적었다.
익숙한 이곳을 살피고 있노라니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이 점차 또렷해졌고 한제의 눈빛은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탕! 탕!
어디선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제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대장간이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한 중년 사내가 상의를 벗은 채 건장한 몸을 자랑하며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눈발이 날렸지만 사내는 조금의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사내 곁의 작은 걸상에는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두꺼운 솜옷을 입은 아이는 두 뺨이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대우⋯⋯.”
한제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눈앞의 사내아이는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대우가 아니었다.
“어르신, 그렇게 서 계시면 춥습니다. 이리 들어오셔서 몸이나 좀 녹이시죠.”
중년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더니 한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한제 역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훅 끼쳐오는 열기에 몸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내렸다.
“여보, 따뜻한 술을 좀 가져다주시오.”
사내는 옷을 걸쳐 입으며 한제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는 자신도 옆에 앉았다.
“이곳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뒤이어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이전에 한 번 들러본 적이 있네. 이번에 지나게 되어 다시 좀 들러보았지.”
한제는 대장간을 둘러보며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사내아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엄마가 부르자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는 손에 술주전자를 든 중년 여인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순박해 보이는 여인은 한제의 잔에 데운 술을 따라주었다.
“어르신, 날씨가 차니 얼른 몸을 덥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