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9
한제는 모완을 품에 안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던 그날 자신의 마음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빛을 잃은 그에게는 오로지 그녀를 되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말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냐? 너라면 할 수 있겠느냐?’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선회하고 있는 하얀 새를 바라보며 속으로 물었다.
★ ★ ★
조나라를 떠나온 지 31년째 되던 해, 한제와 모완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주위로 반경 수천 리에는 수많은 수련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한제는 모완을 끌어안은 채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함께 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
하지만 한제의 말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한 말마저 간헐적으로 끊어졌다가 이어지를 반복해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끝을 맺곤 했다.
“연기성공,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다. 너희들도 이것을 깨닫는다면 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제가 조나라를 떠나온 지 32년째 되던 해 겨울 눈발이 날리던 날, 한제는 바위 위에 섰다. 너무도 허약해진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면 이곳에서의 생은 끝이 날 터였다. 이 꿈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이 꿈속의 그는 한낱 일반인일 뿐이었다.
죽음이란 일종의 끝이자 꿈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젊은 모습의 모완은 한제를 부축하며 그와 함께 바위 위에 섰다.
저 멀리서 류미가 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들어 그녀의 눈에는 점차 짙은 혼란의 빛이 나타났고 이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우리 집, 아직 기억해?”
한제는 전보다 더 희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모완은 물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으로 데려다 줘.”
한제는 모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2천 년 동안의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모완은 한제를 부축해 허공으로 훌쩍 날아오른 뒤 먼 곳으로 날아갔고 이내 주위를 빽빽이 채운 수련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한제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래로 지나쳐가는 화산과 평원, 숲, 그리고 일반인들의 도시와 검은 점으로 보이는 일반인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발아래로 펼쳐진 대지의 색이 점차 초록빛으로 물들면서 끝없이 이어진 산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산맥에는 골짜기가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에게는 두 번째 고향과도 같은, 그와 모완의 집이었다.
모완은 한제를 부축한 채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텅 빈 산골짜기 곳곳에는 잡초가 가득했고 그 잡초와 함께 자라난 야생화에서는 짙은 향기가 풍겼다.
“집에 도착했군.”
한제는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로 산골짜기를 돌아보았다. 주위를 돌아볼수록 그리움과 슬픔이 더욱 짙어졌다.
모완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게 꿈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여기에서 같이 사는 건 어때?”
“좋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단출한 나무 오두막 안에서는 매일 우아한 칠현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연주를 들으며 지팡이를 쥔 채 한쪽에 앉은 한제의 모습은 전보다 더욱 노쇠해 보였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곳곳에는 검버섯도 피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연주를 감상하며 모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역시 이곳에 왔을 때처럼 젊고 생기가 넘치지 않았다.
어느덧 노부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완이 법술로 꾸며낸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반인 부부가 그러하듯 한제와 같이 늙어가며 그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
한제로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석양 아래, 한제는 모완을 보았고 모완은 칠현금을 연주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을 번갈아 뜨는 해와 달을 스쳐가는 계절을 비롯한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갔다.
하늘을 선회하던 하얀 새는 꿈속을 떠나간 듯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칠현금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소생하는 봄을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는 여름을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가을을 그렇게 보냈다.
또한 그들은 내리는 비와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존재로 인해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을 겨울도 보냈다.
조나라를 떠나온 지 35년째 되는 해, 한제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이 머지않아 눈을 감게 되리라는 것을 그 감은 눈을 다시는 뜨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렇게 이 꿈이 끝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그해 가을 이리저리 휘날리던 노란 낙엽 몇 개가 산골짜기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한제의 몸에 부딪혀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제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 낙엽을 쪼글쪼글하고 얼룩덜룩한 손에 쥐었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게 마련이지. 모완, 난 이제 가야 해. 마지막으로 나를 조나라로 데려다주겠어? 대복과 함께 소성으로 가야 해. 그곳에서 꿈속에서의 삶을 마치고 나와의 만남을 가져야지. 그때는 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올 거야.”
백발이 성성한 모완은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남편을 부축해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내 긴 빛을 그리며 조나라로 향했다.
나 자신과의 만남
한제가 발휘한 신통술로 이루어진 꿈에서의 수십 년은 꿈 밖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수련자 연맹과 4대 성역을 포함한 계내와 계외는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계내와 계외의 전쟁은 매우 격렬해져 있었다. 계외 대군은 봉계 지존이 죽었다는 사실을 퍼뜨리며 전력으로 침략해왔다.
청림이 원고 시대의 힘을 빌려 세운 장벽은 30년 전 이미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무너진 틈으로 밀고 들어온 계외 수련자들과의 전투로 양측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우주 곳곳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지금 계내의 4대 성역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갈수록 잔혹해지는 재난 속에서 계내의 여러 수준 높은 수련자들은 운해성역과 소하성역을 포기하고 나천성역과 곤허성역에서 마지막 저항을 이어나갔다.
번번이 이어지는 절망 속에서 봉계 지존이 죽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한제로 변신한 청수가 있긴 했지만 그도 십여 년 전의 전투에서 허신천존에게 거의 죽음에 가까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에 봉계 지존이 죽었다는 소식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 나가 계내 수련자들의 마음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한 달 전, 곤허성역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곳을 포기하고 나천성역으로 가서 최후의 저항을 할 것인가 아니면 봉계 지존의 고향인 주작성에서 필사의 각오로 끝까지 싸울 것인가?
화분국의 가을바람이 드넓은 바다를 건너고 대지를 훑어 조나라에 이르렀을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펑펑 내려 조나라는 하얗고 두꺼운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마차가 눈이 쌓인 길 위로 두 줄의 바퀴 자국을 내면서 점차 멀어져 갔다.
길 저 위에는 객잔이 하나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는 객잔은 스산했고 인적조차 없어 보였다.
이 객잔은 십여 년 전 이미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려 손님들이 크게 다친 바 있었다. 객잔 주인은 관아로 끌려가 처형을 당했고 당시 객잔에서 일을 하던 점원은 몰래 도주해 그 뒤로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 조나라의 대학자가 인사불성이 되었던 적이 있던 객잔은 그렇게 비와 바람에 스러지면서 폐허가 되어 갔다.
마차 안에서 백의의 노인이 폐허가 된 채 눈으로 뒤덮인 객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한참 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일전에 객잔이었어. 난 이곳에서 깨어났지.”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노인의 목소리는 다시 나아가는 마차와 함께 멀어져 갔다.
그렇게 점차 약해지던 그의 목소리는 결국 내리는 눈과 함께 대지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결국 남은 소리는 피곤함 따위는 모르는 듯 쉴 새 없이 부는 서늘한 바람소리뿐이었다.
노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편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하기도 했다. 수많은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다 보면 죽음까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황혼 무렵, 갈수록 눈발이 굵어졌다. 그럼에도 마차는 빠르지 않게 이동해 대산 아래 어느 작은 산골 마을로 향했다.
노을이 다 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을 때,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서 유난히 더 고요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따뜻함 덕분에 일반인들은 해마다 겨울을 보내면서도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산골 마을의 여러 집 중 어느 한 집의 뜰에는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뒤얽혀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그 개들이 있는 곳을 제외한 뜰의 나머지 공간은 전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뜰 안의 집에서는 미약한 불빛이 창호지를 통해 흘러나와 뜰에 쌓인 눈을 노랗게 물들였다. 그 불빛 아래, 창호지 뒤로 누군가의 굽은 몸도 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손에 얇은 막대를 들고 있는 그는 불을 더 환하게 밝히려는 듯 막대로 촛불을 건드리고 있었다.
주름지고 늘어진 피부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촛불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 옷을 여미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손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대복이었다.
“벌써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군. 돌아올 때가 됐는데⋯⋯.”
대복이 바라보고 있는 오른손 손목에는 금빛 손자국이 있었다. 그 손자국을 조심스레 매만지던 대복의 두 눈에 기억을 더듬는 듯한 빛이 어렸다.
그가 이곳에서 한제를 기다린 지도 벌써 35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제가 반드시 돌아올 테니 이곳을 지켜달라고 했던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에 두 번째 38년은 없을 거라고 했으니 이제 곧 돌아올 텐데⋯⋯.”
대복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데 그때, 뜰 안에서 서로 기대어 있던 두 마리의 개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쌓인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마차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오다가 뜰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제는 눈과 바람을 맞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완연한 노부인이 된 모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한제와 함께 선 그녀는 눈앞의 뜰과 미약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끼익!
문이 열리고 대복이 멍한 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한제를 바라보다가 바보처럼 씨익 웃었다.
“돌아왔다.”
한제 역시 그런 대복을 바라보며 웃었다.
눈과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한제의 집에서는 35년 만의 재회를 축하하듯 빛이 더욱 밝아졌다.
이날 밤, 찬바람이 휘휘 불고 더욱 굵어진 눈발이 날렸지만 집 안의 세 사람은 조금의 추위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따뜻했다.
이른 아침이 되자 눈발은 조금씩 약해졌고 아침 햇살은 비록 쌓인 눈을 녹이지는 못했으나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한제는 모완, 대복과 함께 마을 뒤편 부모님의 무덤으로 향했다.
한제와 모완은 한참 동안 말없이 무덤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여인은 이모완이라고 합니다. 두 분의 며느리에요.”
한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모완과 함께 절을 올릴 뿐이었다.
며칠 뒤, 내리는 눈을 맞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는 소성으로 향했다.
마차에 오른 한제는 발을 걷고 고개를 돌려 점점 작아져 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73년 전, 봇짐을 메고 집을 떠나던 자신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배웅해주던 부모님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