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50
당시의 그는 아직 무지몽매했고 자신의 앞날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지는 전혀 몰랐다. 그저 앞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잘 살면서 친척들에게 다시는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마차에 올라 지금까지의 삶을 되새기던 한제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갔고 그렇게 그가 꿈속에서 지낸 지 74년 되던 해의 봄, 소성에 이르렀다.
만물이 소생하는 때의 소성은 퍽 아름다웠다. 곳곳에 피어난 풀과 꽃 향기가 친숙했다. 처음 소성에 왔을 당시처럼 놀잇배를 빌리고 계화주를 산 한제는 모완과 함께 배에 올라 술을 마시며 남은 삶을 즐겼다.
대복은 언제나처럼 그의 옆에 앉아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올 거야.”
술병을 든 한제는 이미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있었다. 검버섯이 잔뜩 핀 손에 든 술잔을 그는 단숨에 비웠다.
모완의 칠현금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어느덧 소성의 봄은 완전히 지나갔고 6월이 됐다. 한제가 이 꿈속에서의 삶을 보낸 지 75년 하고도 6개월이 되는 때였다. 버드나무 씨앗이 다시 한 번 눈처럼 흩날렸다.
“무릇 세상은 만물의 여관이고⋯⋯ 세월은 영원히 흘러가는 나그네로다. 한바탕 꿈같은 인생⋯⋯ 기쁨을 즐긴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허허허!”
한제의 웃음소리와 함께 놀잇배는 강을 따라 흘러갔다. 돌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하얀 새 한 마리가 상공을 선회했을 뿐이다.
새는 아주 오랜만에 나타났다. 그 새가 돌다리 근처를 배회하자 주변의 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이 흐릿하고 모호해졌다. 오직 돌다리와 놀잇배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놀잇배가 돌다리 근처에 가까워지던 그때, 지금까지 중 가장 밝은 눈빛을 번득이며 일어난 한제는 돌다리를 바라보았다.
“왔군.”
한제가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하얀 새가 휙 날아오더니 돌다리 위에 안착하면서 반짝이는 하얀 빛을 발산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백발의 청년이었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놀잇배 위의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이 흐릿한 세상 속에서 하나로 응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속에서의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칠현금을 타던 모완의 손가락도 옆에 앉아 오른손 손목을 바라보던 대복도 그대로 멎어버렸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흩날리는 버드나무 씨앗도 허공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멈춰버린 순간, 오직 돌다리 위의 청년과 놀잇배 위의 한제만이 그대로였다.
“한잔하겠는가?”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놀잇배 위에 앉았다.
돌다리 위의 백발 청년은 훌쩍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 놀잇배 위에 이르렀다. 이내 한제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비운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노부인이 되어버린 모완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여인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지?”
백발의 청년은 다시 한 번 잔을 비우며 두 눈을 감았다.
“자 이모완이 여기 있다. 그녀와의 연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보시지!”
한제는 술을 병째로 들이마시며 말했다.
백발 청년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나를 원망하는군.”
“너는 나야. 나는 너고. 내가 너를 원망하는 것은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과 같지.”
한제는 조용히 웃었다.
“난 아직 잠들어 있어. 기만술로 이 꿈을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세 개의 도과 안에 들어 있는 혼잡한 도념이 알아서 의지를 발현한 것일 뿐.”
백발의 청년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한제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은 놀잇배 위에 앉아 모든 것이 멈춘 세상 속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이 삶은… 어떻던가?”
한참 뒤, 백발 청년이 물었다.
“나한테 뭘 물어? 내가 느낀 건 너 역시 느꼈을 텐데?”
한제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준비는 됐나?”
백발 청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모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가.”
고개를 돌려 모완을 바라본 한제의 두 눈에 짙은 아쉬움과 미련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아쉬운 마음이 크다 한들 이제는 그만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기다려줘, 모완. 내가 너를 되살릴 때까지⋯⋯.”
백발 청년의 눈에도 미련과 아쉬움의 빛이 나타났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모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아쉬움을 애써 숨기며 몸을 홱 돌렸다. 뒤이어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술병이 하나 나타났다.
술병을 내려놓은 청년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한 마리 하얀 새로 변해 하늘 저 먼 곳으로 날아가다가 사라졌다.
그는 떠났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멎은 채였다. 오직 청년이 두고 간 술병만이 마치 그 안에 든 술을 마셔줄 사람을 기다리듯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깨어나다
한제는 말없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내 모완 곁으로 다가가 앉은 그는 두 손을 칠현금 위에 얹고 두 눈을 감은 채 현을 퉁겼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한제의 마음속에서는 슬픔과 애정이 담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해, 그날, 우리가 우연히 수마해 근처에서 만났을 때, 쫓기고 있던 너는 살려달라고 외쳤고 나는 고개를 숙여 그런 너를 보았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몇 번의 윤회가 지나, 우리는 꿈속에서 다시 만났지만 찰나와 같은 순간 스쳐가듯 지나쳤을 뿐. 그리고 지금에야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어느새 꿈의 끝자락에 닿아 있구나.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연주를 마치고 눈을 뜬 한제는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고 모완을 바라보았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를 상대를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기려는 듯.
이내 소리 없이 웃던 그는 70여 년을 살아온 세상을 바라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은 알싸하지 않았지만 마치 화염처럼 뱃속에서는 홧홧한 느낌이 났다.
“원인과 결과란 무엇인가? 손을 펼치는 것이 원인이고 펼친 손을 움켜쥐는 것이 결과다.”
그때 콰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제가 탄 배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 아래 강물도 돌다리도 수많은 놀잇배도 사방을 떠다니던 버드나무 씨앗도.
마치 한제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파문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파문이 퍼져 나감에 따라 소성의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흩어져 버렸다.
소성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의 산봉우리도 강줄기도 종파도 산골 마을도 길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스러져 버렸다.
연혼종, 설역국을 비롯한 다른 종파와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바다도 몰아치는 파도도 바다 건너 다른 대륙도 모완의 고향도 화분국도 선무국도 수마해도 한제와 모완이 함께 지내던 산골짜기 안의 집도… 전부 재가 되듯 무너져 내렸다.
세상 모든 것이 와해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그대로 멎어 있던 일반인들과 수련자들뿐이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떠 있었다.
한제 곁의 모완과 대복도 그대로였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내 왼손은 삶이고 오른손은 죽음이다.”
한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에서 콰르릉 소리와 함께 떨어진 번개가 주작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한제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모완의 몸이 바람에 날리듯 재로 부스스 흩어졌다. 사라져버린 강 위의 수많은 일반인과 소성에서 살아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나라 전역의 사람들 역시 흩어져 버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류미 역시 바람에 날려 사라져갔다.
서희와 주예도 대산 위에 서 있던 이산도 황룡 진인도 등가의 선조도 그 외의 수많은 조나라 수련자들도 그랬으며, 주무태와 그 앞에 서 있던 제자도 그랬다.
운작자도 연혼종의 염천과 둔천도 주작자도 바다 건너 대륙의 모든 이들도…
이 세상에는 이제 대륙도 없었고 생명도 없었다. 남은 것은 하늘뿐이었다.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은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제와 그 옆의 대복뿐이었다. 이 세상에 둘만 남은 것이다.
허공으로 떨어진 한제의 눈물이 어디로 가버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늘을 채운 천둥번개는 요란하게 울리며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그 안의 백발 청년 역시 두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나 아쉽고 미련이 남았지만 꿈은 언젠가 깨게 마련이다. 오늘, 자신과의 만남을 마치고 술을 마신 한제의 꿈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진실과 거짓이란 무엇인가? 내가 눈을 뜨면 진실이고 감으면 거짓이다.”
그 한 마디를 외치며 한제는 대복의 오른손을 덥석 쥐었다. 금빛 손자국이 남은 바로 그 부분에 자신의 손이 겹치도록 잡은 한제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눈앞으로 하나하나의 화면이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장 미련이 남는 장면들이었다.
그중에는 자신과 모완, 그리고 대복이 놀잇배 위에 앉아 있는 장면도 있었다. 눈 내리는 길 위에서 산골 마을을 향해 달리고 있는 마차도 보였다. 자신과 모완이 산골짜기 집에서 칠현금 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때도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하염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한제 자신이 산봉우리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사방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수천 명의 수련자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류미도 있었다.
죽은화산 옆에서 하늘을 가리키며 분노의 고함을 내지르는 한제의 모습도 보였다. 자신을 속여 꾸며낸 다른 모든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모완과의 연을 끊어낼 수는 없던 그가 하늘 높은 곳의 하얀 새를 향해 포효하는 모습이었다.
“넌 네가 이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겠느냔 말이다!”
바다 위, 세찬 풍랑이 몰아치는 가운데 이리저리 휩쓸리는 상선도 보였다. 선원들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노래를 부르며 죽음 앞에 저항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 정자 안에 서 있던 그가 아이를 안은 서늘한 여인과 마주한 모습도 보였다.
조나라 변방, 혼란한 눈빛의 류미가 웃음을 머금은 채 단약을 넘겨주는 장면도 아버지가 자신의 품에서 눈을 감는 모습도 지붕에 떨어진 낙엽이 아버지의 혼을 싣고 날아가는 모습도 보였으며, 어머니가 웃음을 머금은 채 숨을 거둔 모습도 보였다.
소도영이 무덤 앞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버드나무 씨앗을 바라보던 장면도 아직 청년이었던 자신이 대복과 함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본 화면에 나타난 것은 길가의 허름한 객잔이었다. 한 청년이 잔뜩 취한 채 식탁에 엎드려 있었고 점원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청년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형씨, 형씨! 좀 일어나봐요!”
“어휴, 얼마나 마셔댄 거야. 난 객잔을 청소해야 하니까 네가 좀 깨워.”
인사불성이 된 청년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바보처럼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하, 내가 뭣 좀 하나 알려주지. 내 방금 꿈을 하나 꾸었다네. 내가 글쎄, 선인이 되는 꿈이었지.”
그리고 모든 화면은 청년이 ‘선인’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한제의 두 눈은 완전히 감겼고 그와 동시에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