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59
속이 텅 빈 이 돌조각 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에게서는 선인의 풍채가 느껴졌고 미간에는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와 완전히 융합되어 있는 붉은 점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잠시 후 그는 두 눈을 뜨더니 뭔가를 계산하듯 오른손의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이한제 그 녀석이 마침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구나. 수만 년에 걸쳐 세워온 내 계획을 시작할 때가 됐어. 아주 오랫동안 이 날만을 기다려왔지. 제자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노인은 바로 아주 오랫동안 자취를 감춰왔던 천운자였다.
★ ★ ★
곤허성역을 뒤덮은 짙은 안개 속. 한제는 그 가운데에서 침착한 눈빛으로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서는 안개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전하면서 까마득한 번개를 드러냈다. 그러더니 이내 거대한 입과 같은 회오리를 하나 형성했다.
“묻겠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게 천벌을 내리는 것이냐? 오늘 나는 천벌을 맞이할 자임과 동시에 이 세상에 천벌을 내릴 사람이기도 하다!”
한제는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이한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천둥번개의 벌이여, 떨어져라!”
지금 이 순간, 한제는 천벌에 철저히 저항하는 한편 그것을 진압하고 오히려 천벌을 징벌할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천벌과 천벌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지금껏 계내에서는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상황이었다.
한제의 입에서 ‘천둥번개의 벌’이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오른쪽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번개 문양이 밝은 빛을 번득였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오른쪽 눈에서 튀어나온 여러 갈래의 번개가 그의 얼굴과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 순간, 한제는 마치 번개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천둥번개의 왕처럼 보였다.
그러자 상공에 나타난 회오리는 점점 더 격렬하게 회전했고 이에 따라 사방에서 천둥번개가 그 회오리의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회오리의 중심에서 눈부신 푸른 빛이 번득이는가 싶던 이때, 세 번째 단계에 이른 한제가 맞이할 첫 번째 천벌인 천둥번개의 천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경 1백만 리를 뒤덮은 안개를 관통한 푸른 빛 덕분에 밖에서 보면 꼭 그 안개가 푸른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화려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한제는 그 빛에 응집된 번개를 볼 수 있었다. 굵기만 해도 10만 척에 이를 듯한 번개는 회오리 깊은 곳에서 낯선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것이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그것은 회오리에서 튀어나와 고막을 찢을 듯 우렁찬 소리와 함께 돌진해와 마치 푸른 용처럼 포효를 내지르며 한제를 그대로 삼키려 들었다.
한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회오리를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떨어지려 하는 푸른 번개를 향해 두 눈을 번득였다.
“오늘 나는 천벌의 강림에 대항할 것이다. 그 첫 번째 벌의 이름은 천둥번개의 벌이다!”
한제의 말이 떨어진 순간, 그의 온몸에 퍼져 있던 천둥번개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구 확산되던 그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 한제 상공에서 거대한 번개의 낙인이 됐다.
이 낙인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푸른 번개와는 전혀 다르게 마치 피처럼 붉은색을 띠었다. 붉은 번개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강렬한 붉은 빛을 발하며 한제가 내린 천둥번개의 벌이 됐다. 이에 주위를 둘러싼 짙은 안개가 떠밀려 나가면서 곤허성역 전역을 진동하게 했다.
나의 벌
한제가 손을 들어 올려 푸른 번개를 가리키자 붉은 번개의 낙인이 곧장 하늘로 솟아올랐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도 푸른 번개와 붉은 번개가 위아래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는 두 갈래의 번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리를 좁혀 갔다.
대체 어떤 것이 천벌의 번개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두 갈래의 번개가 모두 천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천벌이 한제를 징벌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제가 천벌을 징벌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짙은 안개 안쪽에서 두 갈래 번개는 곧 충돌했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더욱 빠르게 흩어지고 있는 것은 푸른 번개였다. 한 호흡 정도의 짧은 순간에 수만 척까지 줄어든 그것은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고 붉은 번개에 삼켜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상공의 안개 회오리가 돌연 거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한 번 우렁찬 소리와 함께 푸른 번개가 하나 더 나타나더니 앞서 나타났던 푸른 번개와 합쳐져 붉은 번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총 아홉 번째 번개까지 나타나 하나로 융합한 푸른 번개는 세상을 파멸시킬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한제의 붉은 번개는 갑작스레 증폭된 푸른 번개와 충돌하자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천둥번개의 힘을 품은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짙은 안개마저 밀려나자 안개 너머에 있던 수련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전가 노인은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마치 안개 안쪽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셋째는 아닌 모양이군. 만약 녀석이 셋째였다면 저렇게 약하지는 않을 테니까. 휴, 벌써 수만 년째 셋째를 찾고 있건만 이렇게 쉽게 찾아질 리가 없지.’
작게 한숨을 내쉰 전가 노인은 시선을 거두고는 흥미를 잃은 듯 돌아섰다.
하지만 막 떠나려던 바로 그때, 그는 흠칫 놀라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고 다시 홱 돌아섰다. 실망의 빛이 담겼던 두 눈은 전에 없이 밝게 번득였다.
안개 깊은 곳, 붉은 번개가 흩어져 사라진 그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파멸적인 기운이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한참 위쪽의 상공, 강림하고 있는 푸른 번개 바로 아래였다.
그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푸른 번개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한제는 천둥번개의 본원을 깨달은 세상 모든 천둥번개의 주인이다. 내게 굴복하라. 그러지 않으면⋯⋯ 파괴해버릴 것이다!”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한제의 머리카락은 뒤로 흩날렸고 그의 손은 아홉 개에서 하나로 융합돼 내리 떨어지던 푸른 번개를 막아서고 있었다.
거대한 푸른 번개 앞의 한제는 모래알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순식간에 푸른 번개의 혼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하염없이 덤덤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푸른 번개의 저항을 몸부림을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좋다. 그렇다면 파괴해주지.”
이내 눈을 뜬 한제는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번개는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셀 수 없이 많은 푸른 빛이 되어 바깥으로 퍼져 나가더니 반딧불처럼 흩어져 곧 천천히 사라졌다.
흩어지고 있는 푸른 빛에 감싸인 한제의 모습은 흐릿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회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의지로 천둥번개의 천벌을 일으켜 하늘을 벌할 것이다!”
한제의 왼쪽 허공에서 한 줄기 붉은 번개가 나타나더니 상공의 회오리를 향해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세 번째, 뒤를 이어 수많은 붉은 번개가 한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그곳은 번개로 가득 찼다. 번개는 수십 갈래에서 수백, 수천, 수만 갈래로 불어나 포효하듯 콰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천벌을 징벌할 수만 갈래의 붉은 번개였다.
이 붉은 번개들은 허공을 가르며 돌진하더니 이내 회오리를 뚫고 들어갔다.
꽈르릉!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가 소환한 번개들이 끊임없이 가격함에 따라 회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조금씩 흐릿해지다가 결국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 회오리가 있던 곳에 거대한 균열이 나타났다. 그 균열 안에서는 먹먹하고 음울한 포효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거대한 제단과 같은 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먹먹했던 포효는 더욱 또렷해졌다.
잠시 후, 누각이 절반 정도 비집고 나왔고 한제는 그 정중앙에 흐릿한 인영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는 것과 그의 주위로 네 자루 검이 꽂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의지로 화염의 천벌을 일으켜 하늘을 불사를 것이다!”
한제의 왼쪽 눈에서 화염 문양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불길이 튀어나와 주위를 맴돌며 활활 타올랐다. 뒤이어 왼손으로 상공을 가리키자 온몸을 뒤덮었던 화염이 맹렬하게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확산된 화염은 한제를 중심으로 반경 수만 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불바다는 한제의 손짓 아래 온 하늘을 불태울 기세로 솟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사방의 안개까지 타오르기 시작했고 상공에 나타난 균열 역시 화염에 삼켜졌다. 번개와는 다른,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가 뜨거운 열기와 함께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한제는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균열을 비집고 반쯤 드러난 제단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장 제단 위에 가부좌를 튼 흐릿한 인영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인영과 닿은 순간, 한제는 손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인과인!”
펼친 손바닥은 인, 움켜쥔 주먹은 과였다. 인과인을 발휘하자 균열 안에서 나타난 네모난 제단이 바르르 진동했고 균열 밖으로 나온 두 개의 모퉁이에는 대량의 균열이 일어났다. 곧이어 산산조각이 난 모서리는 한 줄기 파문을 사방으로 퍼뜨리면서 화염에 불살라져 검은 연기로 변해갔다.
뒤이어 인과인 아래 제단 중앙의 흐릿한 인영 주위를 둘러싼 네 자루 검도 바들바들 진동했다.
웅- 웅-!
네 자루의 검이 울리며 곧 각각 한 갈래씩 총 네 갈래의 기운을 피워올렸다. 한제의 손짓에 의해 뽑혀 나온 그 기운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신식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네 갈래의 기운은 곧 검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제의 오른손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한제가 꽉 움켜쥔 순간, 이 기운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자 당시 한제를 두렵게 했던 네 자루의 검은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고 보통의 쇳조각처럼 아무런 영기도 발산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강력하고 포악한 인과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본원은 없었다. 일반적인 수련자라면 심지어 피할 수조차 없었다.
격렬하게 진동하던 제단에서도 이내 한 갈래 기운이 뽑혀 나왔다. 그러자 제단은 더욱 격하게 떨리면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파멸!”
한제가 짧게 외치며 주먹을 움켜쥐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제단의 나머지 절반은 균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크아아!”
무너진 제단에서 낮은 고함이 터져 나오더니 가부좌를 틀고 있던 흐릿한 인영이 고개를 쳐들었다. 뒤이어 인영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한제를 향해 불바다 속으로 달려들었다.
인영은 불바다 안에서 튀어나온 뒤에도 여전히 그 생김새를 확인할 수가 없을 만큼 흐릿했다. 그저 오른손을 든 채 낮게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곧 그의 오른손에서는 노란색 빛이 발산됐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 손을 크게 후려쳤다.
그러나 한제는 피하기는커녕 차게 코웃음을 치며 소매를 휘둘렀다.
“생!”
한제는 하얀 연기에 휩싸인 왼손의 어마어마한 생기를 뻗어 달려드는 인영에 맞섰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허공을 사이에 두고 부딪쳤다. 그러자 달려오던 인영은 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사실 생기만으로는 실질적인 위해를 가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제는 삶과 죽음을 깨달은 사람이었고 그가 방금 피워올린 생기는 생사인의 일부였다. 가장 먼저 상대에게 생기를 주입한 것은 이를 통해 죽음을 생성하기 위함이었다.
“겨우 그런 수준으로 이 이한제에게 맞서려 하느냐!”
한제는 몸을 휙 날려 인영에게 달려들었고 동시에 오른손을 들었다. 검은 연기로 휩싸인 그의 오른손이 인영의 가슴팍에 찍혔다.
“사!”
상대의 가슴에 손바닥이 닿은 순간, 그 손을 휩싸고 있던 검은 연기는 상대의 체내로 밀려들며 미리 심어놓은 생기를 건드렸다. 그렇게 흐릿한 인영의 체내에 공존하게 된 삶과 죽음이 생사인을 형성했다.
콰쾅!
생사인이 형성되자 흐릿한 인영의 체내에서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르르 떨던 인영은 연거푸 몇 움큼의 금빛 숨을 토해내더니 뒤로 나가떨어졌고 전보다 더욱 흐릿해졌다. 그리고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한제를 도탄에 빠뜨렸던 천벌의 사자는 오늘 그의 앞에서 제대로 된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게 천벌을 내린다는 것이냐!”
한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사방으로 우렁차게 퍼져 나가 남운자와 사도환 등의 귀에도 닿았다. 그 말에 계내 수련자들의 피는 끓어올랐다. 더없이 오만한 말이었지만 누구도 그렇게 여기는 자가 없었다.
또한 그 말은 한제가 지난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참아왔던 말이기도 했다. 요령의 땅에서 문정기에 이르면서 첫 번째 천벌을 맞이했을 때부터 내내 참아왔다가 오늘에서야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놓은 것이다.
누가 그에게 모완을 데려갈 자격을 주었는지 묻고 싶었다.
누가 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벌을 내릴 자격을 주었는지 묻고 싶었다.
누가 그에게 하늘이 될 자격을 주었는지 묻고 싶었다.
짙은 안개는 마치 폭주하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또한 균열 안에서는 심신을 뒤흔드는 낮은 고함도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격렬해짐에 따라 반경 1백만 리를 뒤덮은 안개가 회전했고 강력한 위압감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이윽고 회전하던 안개 속에서 까마득히 많은 인영이 나타났다. 혼 같은 인영들은 찢어질 듯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끼야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