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60
눈 깜짝할 사이, 한제 주위의 안개 곳곳은 수많은 혼으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모호했지만 갈수록 또렷해진 혼들은 하나둘 한제에게 익숙한 얼굴들로 바뀌어갔다. 그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고 넷째 작은아버지도 있었으며, 이산도 장호도 류미도 있었다. 또한 이모완도 있었다. 심지어 등력이나 등화원 등 적, 친구, 친척 할 것 없이 한제가 알아 왔던 모든 사람의 형태를 한 채 달려들었다.
한제는 말없이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부모님은 서로에 의지한 채 한 걸음씩 다가왔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려는 듯 비쩍 마르고 거친 손을 뻗어오기도 했다.
모완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으나 그녀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류미는 품에 검은 기운으로 휩싸인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한제의 마음을 후벼 파는 듯했다.
하나하나가 너무도 생생한 광경이었다. 천벌의 환각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각각의 인영들은 거짓이었다가도 진실로 또 진실이었다가도 거짓으로 단숨에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파괴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진실임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조금 전 파괴하려 했던 것은 가족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최후의 혼이었다.
환각의 천벌
점점 많은 인영이 한제를 포위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사방에 가득한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감았다.
진실과 거짓의 본원을 깨달은 한제에게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두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은 거짓이 됐고 눈을 뜨면 모든 것은 진실이 됐다.
한제는 마치 공의 문을 흩어버리듯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진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모든 인영은 그의 손짓 아래 먼지로 흙으로 그리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하늘이란 이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벌일 정도로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존재지. 그렇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눈 똑바로 뜨고 보아라. 이 세상에서 나 이한제 말고 또 누가 하늘을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는지!”
이내 두 눈을 번쩍 뜬 한제는 상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진실과 거짓의 본원으로 이루어진 신통술 진가도가 발휘됐다.
사방을 가득 채운 안개 속에서 수많은 인영이 나타났다. 한제의 진가도로 소환된 이 인영들은 진실이라면 진실이었고 거짓이라면 거짓이었다.
그중에는 여인의 시체를 안은 채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고 있는 주일이, 하늘을 가리키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백범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킨 청수가 고고하고 오만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욕설을 지껄이는 탁삼이,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진가도 아래 허상으로 나타난 이들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특수한 천벌을 형성했다. 하늘이 환각을 이용해 벌을 내렸다면 한제 역시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허상으로 나타난 이들의 분노에 찬 고함과 포효는 형태 없는 힘이 되어 상공의 균열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균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 안에서는 포효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부족해⋯⋯.’
한제는 두 눈을 감고 사방으로 신식을 확산시켰다. 눈 깜짝할 사이 곤허성역을 뒤덮은 그의 신식은 각 수련성과 그 혼, 그리고 그 기억에 녹아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곤허성역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은 일반인이든 수련자든 죽음이나 운명의 곡절을 맞이할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거나 원망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수련성은 그 모습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 순간 한제는 신식으로 파악한 그 기억들을 토대로 진가도를 통해 오직 하늘만을 노리는 천벌을 형성했다. 그러자 천벌을 상징하는 균열이 처음으로 바르르 진동했고 그 안에서 울려 퍼지던 포효도 돌연 뚝 끊겨버렸다.
그 순간, 안개 바깥에 있던 전가 노인의 눈이 전에 없이 번득였다. 그 눈빛에서는 짙은 탐욕이 드러났다.
‘저 녀석이 셋째일 가능성이 있어! 3할의 가능성이!’
전가 노인이 입술을 핥았다.
진가도를 환각의 천벌로 만들어내자 짙은 안개 속에서 나타난 하나하나의 인영이 포효를 내지르며 상공의 균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곤허성역 전역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균열은 한제가 쏘아 보낸 천벌에 격렬하게 진동했다.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균열을 응시하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럴수록 균열의 진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본원이 있다. 오늘 나는 천벌이 왜 존재하는 것인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확인할 것이다!’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점점 균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균열로부터 10만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균열 안에서는 돌연 줄기줄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빛은 사방을 뒤덮어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를 환하게 밝혔다.
그때, 균열 안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특별할 것 없는 총채(말총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먼지떨이)였다. 길이는 7척 정도에 나무 손잡이는 보라색이었고 3천 개의 대도를 상징하는 하얀 털 3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총채는 한제를 향해 가볍게 휘둘러졌다. 3천 가닥의 털은 바람도 없는데 휘날리다가 흩어졌고 보이지 않는 한 갈래 파문을 퍼뜨렸다.
한제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망설임 없이 오른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순식간에 유성처럼 총채를 향해 돌진했다.
확산된 파문이 사방의 안개를 뚫고 나간 그때, 총채의 3천 가닥 털 중 하나가 뽑혀 나와 마치 연기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한 가닥의 털은 하나의 법술이 됐다. 인력술(引力術)이었다.
이어서 두 번째 털이 뽑혀 나오더니 두 번째 법술인 화구술(火球術)이 됐다.
세 번째 털은 살육의 검에서 발산된 무궁무진한 살육의 검기로 변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눈 깜짝할 사이 거의 1백 가닥에 달하는 털이 뽑혀 나와 적멸지, 황천지, 화마지 등 한제가 첫 번째 단계의 수련자였을 때 보았던 모든 신통술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개중에는 한제가 일찍이 파악했던 것도 있었고 다른 사람이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 것도 있었다.
이어서 뽑혀 나온 털들이 만들어낸 법술과 신통술에는 청수의 신통술도 사도환의 신통술도 있었고 백범의 신통술도 주작들의 신통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3천 가닥의 털, 3천 개의 대도 3천 개의 신통술! 한제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신통술 거의 대부분이 나타난 상태였다.
3천 개의 신통술은 서로 완벽하게 융합해 총채의 움직임에 따라 곧장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3천 개의 신통술은 그 자체로도 문제였지만 그 안에 담긴 선력으로 인해 그 위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졌다.
이 선기는 4대 선계에 존재하는 선옥의 기운이 아니라 진정한 선인의 기운이었다. 혈맥의 금빛에서 기인한 기운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광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제의 미간에 선인의 불멸체로 이루어진 금색 피가 깃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한제는 이 3천 개의 신통술을 발휘한 힘의 존재조차 판별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 기운을 곧바로 알아차린 한제는 자신을 압박해오는 3천 개의 신통술을 바라보며 번득이는 살기를 드러냈다.
“이미 천벌이라는 것이 원고 선역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오고 있었다. 저 균열 밖의 세상은 바로 원고 선역이겠군. 이 순수한 선기를 통해 원고 선역이 선강 대륙과 큰 관련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됐어!”
연한 금빛을 발산하는 3천 개의 신통술이 곧 한제의 사방에 떨어졌다.
쾅! 쾅!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며 온 우주가 진동했다. 각 신통술에서 발산된 연한 금빛에 뒤덮여 한제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균열에서는 무언가가 또 하나 나타났다. 9층짜리 보탑이었다. 전체적으로 금빛을 띤 보탑은 막강한 위압감을 발산하는 한편 빠르게 불어나기 시작해 순식간에 수십만 척에 이르렀다. 그렇게 거대해진 보탑은 한제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3천 가닥의 털로 이루어진 신통술도 보탑도 역시 천벌이었다.
만약 한제의 수준이 보통의 공령기 중기 수준이었다면 보통의 수련자처럼 한 가지의 본원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이 천벌에서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9층짜리 금색 보탑이 3천 개의 대도로 둘러싸인 곳을 짓누르자 격렬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멈추자 온 우주가 고요해졌다.
이때 짙은 안개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듯한 9층짜리 금색 보탑뿐이었다.
남운자 등은 이 갑작스러운 적막에 불길함과 초조함을 느꼈다.
사도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장 안개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남운자가 그를 막아섰다.
“남운자! 나를 막으려는 겐가!”
사도환은 살기에 가까운 광기가 담긴 눈으로 남운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남운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제에게 위기가 닥친 것 같다는 불길한 직감 앞에서 그런 것은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설사 막아선 사람이 청림이었다 해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항했을 터였다.
그러나 남운자는 사도환의 언사에 언짢아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봉계 지존은 천벌에 맞서고 있네. 우리가 간섭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돼. 자네가 억지로 들어간다 한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될 걸세.”
안개 안쪽을 바라보던 사도환은 잠시 후 이를 악물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1각. 딱 1각만 더 기다려보지. 그 뒤로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가 뭐라 해도 난 가겠다!”
남운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전가 노인은 한층 더 흥분한 눈으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삼구불진(三九佛塵)에 진선보탑(鎭仙寶塔)이라… 봉명환(封命環)이 남았군. 당시 그가 부내에서 천벌을 설정했을 때 그 세 개의 법보를 투입했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전가 노인은 점점 더 기이한 눈으로 안개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사도환에게는 말 그대로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였다. 다른 계내 수련자들도 하나같이 긴장감과 불길함에 휩싸여 있었다.
“설마 봉계 지존께서 천벌을 넘기지 못하신 건가?”
“그럴 리가 봉계 지존께서는 실패하실 리가⋯⋯.”
“조용해진 지 한참 지났잖아.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사도환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안개 속으로 달려들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짙은 적막에 싸여 있던 짙은 안개 속에서 돌연 격렬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콰르릉!
동시에 보탑이 바르르 진동했다. 요란한 소리는 그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제는 3천 가닥의 하얀 총채 털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 총채의 털이 발휘한 3천 개의 신통술은 한제의 몸에 떨어졌다가 다시 총채의 털로 돌아가 한제를 봉인하듯 주위를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다.
또한 보탑 안은 금빛으로 가득했다. 빛에서 느껴지는 강력하고 거친 의지가 그 빛과 선력으로 한제를 제련하고 녹여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벌은 한제의 미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선인의 혈맥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천벌이 고작 이런 신통술이나 쓴다는 것이냐? 정말 그런 거라면 천벌은⋯⋯ 너무도 약하군!”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순간,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고신의 힘을 가동했고 이에 한제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 거대해졌다.
그의 몸이 커져감에 따라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하얀 털 일부가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완전한 고신의 모습을 갖추면서 고신의 기운이 확산되자 남아 있던 총채의 털 역시 전부 소멸되어 버렸다.
“별것도 아니군.”
한제의 뒤로는 도고의 머리 허상이 상당히 또렷한 모습으로 나타난 채 하늘을 뒤흔들 듯 요란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이 포효는 사방을 진동하게 하면서 한제에게 엄청난 위엄을 더해주었다.
한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보탑의 꼭대기에 이른 순간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도고의 머리는 더욱 격렬하게 포효했다. 심지어 그 머리는 한제의 몸을 뛰어넘어 주먹에 녹아들었다.
콰르릉!
한제의 주먹이 보탑의 꼭대기를 강타한 순간 우렁찬 소리와 함께 보탑이 바르르 진동했다.
봉명환(封命環)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한제는 낮은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몸을 날렸고 두 번째 주먹을 휘둘렀다.
펑! 펑!
경련을 일으킨 보탑에 몇 갈래의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겨우 이런 보탑으로 이 이한제를 가두려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