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62
한제가 몽도에서 깨어난 후 처음으로 발휘하는 역령인의 위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온 우주가 바르르 진동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의 역령인이 나타나자 고요들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이내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관통당해 곧장 무너져 내려 소멸했다. 물론 줄기줄기 피어오른 요기는 한제의 왼쪽 눈으로 흡수됐다.
“이제 너희 넷만 남았다. 너희들은 본디 전장에서 죽음을 맞아야 마땅하나 누군가에 의해 이성을 잃고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구나. 너희들이 느끼는 슬픔을 왕족인 나는 느낄 수 있다.”
한제는 다시 자신에 달려들고 있는 네 고신을 슬픔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네 고요를 무너뜨린 역령인이 방향을 틀더니 네 고신을 향해 돌진했다. 한제는 고신들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았다.
콰르릉!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네 고신이 연기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그들의 얼굴에서는 자유를 찾은 자의 해방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천벌… 이제 끝이다!’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뜬 한제는 10만 척 길이의 균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그 안을 들여다본 순간, 그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다.
그 균열 안쪽에 존재하는 것은 그가 언젠가 보았던 세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세상의 하늘은 어두웠고 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거대한 석상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고신과 고마, 고요의 석상들이었다.
또한 그 세상에는 짙지는 않아도 진정한 선기가 채워져 있어 균열의 밖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선기는 선강 대륙의 기운이었다.
어느 고요의 조각상 위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하얀 머리와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청년은 뒷짐을 진 채 서늘한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제의 눈동자가 수축한 것은 바로 그 청년 때문이다. 외모와 표정, 기운을 비롯한 모든 것이 자신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던 것이다.
“넌 누구냐!”
이내 원래의 표정을 되찾은 한제가 물었다.
“나는 너다.”
백발 청년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드리운 채 한제를 바라보았다.
“헛소리!”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한제는 마치 유성처럼 날아올라 광활하고 기이한 대륙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1천 척도 채 이동하기 전에 그는 두 눈을 번득이며 우뚝 멈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오른손으로 전방을 후려쳤다.
전방에는 파문이 일어나 퍼져 나가면서 물로 이루어진 듯한 장막이 드러났다.
짙은 선기를 품은 장막은 한제가 가한 힘을 흩어버림과 동시에 그의 체내로 반동을 일으켰다.
“넌 들어올 수 없다.”
장막 안, 고요의 조각상 위에 선 기이한 백발 청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천벌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천벌의 본원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를 쓰러뜨려라. 원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내가 네 생각을 알고 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 말했다시피 나는 너니까.”
백발 청년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하얀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날리는 모습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역수는 네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천벌 아래 살아남지는 못했지. 과연 네가 이 난관을 넘길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백발 청년은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읊조렸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장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백여 척 떨어진 곳에서 한제를 손으로 가리켰다.
“해볼 테냐?”
한제는 쓸데없는 말 따위 필요 없다는 듯 훌쩍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 백발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쫙 펼친 오른손을 힘껏 뻗었다.
“자신의 천벌이라⋯⋯ 재미있군.”
백발 청년 역시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달려들며 오른손을 뻗었다. 한제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생김새부터 표정, 옷차림까지 모든 것이 똑같은 두 사람이 같은 신통술을 발휘하며 서로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쾅!
충돌의 순간, 거대한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온 세상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른 것만 같은 소리의 여음(餘音)은 길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 한제와 백발 청년은 서로 손바닥을 맞댄 상태에서 동시에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또다시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맹렬한 폭풍이 사방으로 확산됐다. 둘의 옷자락은 마구 나부꼈고 둘 다 똑같은 모습으로 어두운 살기를 드러냈다.
두 사람 다 말아 쥔 주먹을 홱 잡아당겼다. 그 순간, 백발 청년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칠규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왼쪽 눈의 화염과 오른쪽 눈의 번개 문양, 체내의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의 본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내의 칠규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결국 한 덩어리의 혼란한 기운이 된 그 본원들은 한제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한제 역시 청년과 상태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칠규에서 흘러나온 본원은 백발 청년의 오른손 안에 쥐어진 상태였다. 심지어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난 거리 역시 똑같은 1천여 척이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동시에 인과인으로 뽑아낸 상대의 본원을 미간에 녹여 넣음으로써 잃어버린 본원을 그대로 채웠다.
“더는 검증할 필요 없다. 네 생각은 곧 내 생각이고 네 신통술은 곧 내 신통술이다! 나는 너다! 그런 신통술을 이용해 떠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어!”
백발 청년은 입가의 피를 훔쳐내며 기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도 못 믿겠다면 믿게 해주지.”
곧이어 앞으로 한 걸음 나선 그는 긴 빛을 그리며 한제에게로 달려들었고 동시에 하얀 연기로 휩싸인 왼손과 검은 연기로 휩싸인 오른손을 동시에 들어 올려 쭉 뻗었다.
“생사인!”
매우 강력한 삶과 죽음의 기운이 청년의 체내에서 뿜어져 나왔다. 왼손에는 세상의 모든 생령을 살게 하는 삶의 기운이, 오른손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듯한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왼손에서 피어오른 하얀 연기가 한제를 집어삼킬 듯 몰려들었다. 이 하얀 연기 속 삶의 기운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한제는 그 기운이 생사인의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기운이 체내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후에 달려들 죽음의 기운과 만남으로써 생사인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한제는 차게 코웃음을 치며 상대와 마찬가지로 왼손을 들어 삶의 기운을 피워올렸다. 그렇게 피어오른 하얀 연기 속 삶의 기운이 백발 청년이 발휘한 삶의 기운과 충돌했다.
쾅!
폭발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경련을 일으켰고 각자의 체내로 스며든 삶의 기운이 체내의 기운을 어지럽혔다. 이에 한제와 백발 청년은 피를 뿜어냈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고 동시에 오른손을 상대를 향해 뻗었다.
꽈릉!
다시 한번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름과 바람의 기색이 변하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 한제와 백발 청년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나다가 동시에 외쳤다.
“생사인!”
“생사인!”
콰르릉! 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땅에 내려선 한제는 끊임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가 땅을 한 번 디딜 때마다 땅이 강하게 진동했다. 그렇게 1백 걸음이나 밀려나고 나서야 멈춘 한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금 그의 체내는 생사인의 폭발로 인해 엉망이 된 상태였다. 만약 그가 삶과 죽음을 깨달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한편 백발 청년 역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물로 이루어진 듯한 장막 너머로 들어가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고요의 석상 머리 위에 착지했다. 한데 그의 발이 닿은 순간 수많은 균열이 일어나더니 이내 석상은 무너져 내렸고 이를 통해 충격을 완화한 백발 청년은 피를 흘리며 일그러진 얼굴로도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네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신통술을 나 역시 발휘할 수 있다! 날 어찌 죽일 셈이냐? 무엇으로 날 죽일 생각이냔 말이다! 크하하!”
백발 청년의 웃음은 광기에 가까웠다.
이렇게 장막으로 상대와 분리된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백발 청년을 응시하다가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백발 청년 역시 흠칫 놀라더니 얼른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진가도를 발휘했다. 세상 모든 것은 거짓이 되고 생각만으로도 진실과 거짓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눈을 감은 순간 한제와 백발 청년의 심신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 허상이 됐다. 허상이 됐다고 해서 온 세상이 흐릿하고 모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허상이 된 세상의 본원을 간파하고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둘은 동시에 눈을 뜨더니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진가도 아래, 눈을 뜨면 온 세상은 진실이 된다. 이전까지 거짓이었던 모든 것이 진실로 전환되는 순간 한제는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던 두 사람은 또 곧장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진가도 아래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내 의지에 따라 먼지는 먼지로 흙은 흙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백발 청년도 오른손을 휘두르며 한제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를 벌하다
두 사람은 진가도를 이용해 세상의 모든 것을 흩어 없앴다. 만약 한 사람만 이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위력은 굉장히 막강했겠지만 동시에 같은 신통술을 발휘한 두 사람의 몸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콰쾅!
우렁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세 걸음 정도 물러난 한제는 억지로 몸을 멈춰 세우더니 백발 청년을 향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물론 이번에도 백발 청년 역시 한제와 똑같이 달려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좁혀지다가 순식간에 물로 이루어진 듯한 장막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그 순간, 그들은 동시에 오른손을 뻗어 상대를 가리키며 똑같이 외쳤다.
“정신술(定神術)!”
한제의 오른손 검지가 백발 청년의 오른손 검지와 닿은 그때, 두 사람의 몸은 또 한 번 동시에 경련을 일으켰다.
정신술(定身術)이 아닌 정신술(定神術)이었다. 그들이 멈추려고 한 것은 서로의 육체만이 아니라 원신과 체내의 모든 작용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한제와 백발 청년은 그대로 멎어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한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역시…’
사실 백발 청년과의 첫 합을 겨룬 이후 한제가 취한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분석이라도 하려 들면 상대가 속내를 들여다본 듯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미 몇 번의 검증을 마친 한제는 정신술을 발휘해 서로의 신식을 봉쇄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틈을 타 그는 머리를 굴렸고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렇다고 한 가지 생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또 상대에게 읽힐지도 모르기에 그는 결론을 얻자마자 머리를 비워버렸다.
한없이 추락하던 두 사람이 막 땅에 처박히려는 순간,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정신술이 동시에 깨져버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공격을 퍼부었다.
쾅! 콰쾅!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열 개가 넘는 신통술을 발휘했다. 그중에는 백범의 선술도 있었고 청수의 신통술도 있었으며, 한제가 창조해낸 도술도 있었다.
온 세상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두 사람은 심지어 화염과 천둥번개의 본원까지 사용했고 둘 다 제법 큰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다.
“쿨럭!”
“크윽!”
연거푸 몇 번이나 피를 토해낸 그들은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고 이제 약간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한제 역시 무척 힘들어하고 있었다. 자신과 싸웠던 다른 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