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84
한제가 다시 입을 다문 가운데 서자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녀는 유약한 여인이었지만 평생 눈물을 흘린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한제 때문에 흘린 것이었다.
“단 1년도 안 되는 건가요? 저는 당신이 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니 1년만 시간을 달라는 건데 1년이라는 시간이 그리도 무리인가요?”
한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눈도 뜨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서자봉은 누군가가 심장을 칼로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물러났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했던 모든 말이 가시가 되어 심장을 깊이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때, 한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뜨더니 서자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다.”
한제는 자신이 모완을 되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이 동부에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그로서는 단지 1년만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여인의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저 여인은 비쩍 말라가다가 결국 그에게 한 줄기 기억으로만 남은 채 죽게 되리라. 어쩌면 그로 인해 서자봉이라는 여인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자봉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물이었다. 이내 그녀는 묵묵히 한제의 옆에 앉았다.
“1년이면 충분해요. 절대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절대로…”
서자봉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는 모은미와 분홍 옷의 여인이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녀들은 함께 이곳으로 오는 동안 각자 1년이라는 시간만을 갖겠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한 상태였다.
1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특히 수련자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서자봉은 이 1년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제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여자 앞에서는 더욱 과묵했다. 심지어 이모완과 함께 있을 때도 그저 부드러운 눈으로 묵묵히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세 달이 지나갔다.
이 세 달 동안 한제가 입을 연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서자봉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한제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작은 도가니를 띄워 술을 데웠다.
한데 아직 술이 다 데워지기도 전에 원래라면 불지 말아야 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도가니 위에 물결을 일으켰다.
한제는 서늘한 눈으로 계외 태고 성신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시야에 빽빽하게 몰려드는 긴 빛이 들어왔다. 갈래갈래의 빛 안에는 계외의 새로운 수련자 대군이 있었다.
그중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자는 총 다섯 명으로 이들은 다섯 개의 화살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이들은 태고 성신에 남은 몇몇을 제외하면 계외의 마지막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십만 명 규모의 수련자 대군과 높이가 만 척에 달하는 전차들도 돌진해왔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고요하고 평온했던 이곳의 분위기를 어지럽혔고 점점 높아지던 소리는 결국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왔군!”
한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 ★ ★
각각의 전차는 어떤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피로 덮여 있어서 언뜻 보면 원고 시대의 흉수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모피에는 피와 같은 붉은색의 복잡한 낙인들이 붉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 빛에 어두컴컴한 우주는 기이하게 번쩍거렸다.
한편 저 멀리서는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10만 명의 수련자 대군 뒤에서 거대한 비석을 짊어진 채 날아오고 있는 수천 명의 계외 수련자들의 포효였다.
길이가 수만 척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비석에서는 아주 오래된 기운이 발산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비석을 둘러싸고 있는 아홉 개의 쇠사슬이었다.
각 쇠사슬에는 거대한 관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사슬에 매인 수천 척 길이의 관들은 비석에 매달려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문어 같기도 했다.
이들은 계외에서 새로 모은 병력으로 한제가 만든 진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전의 전쟁으로 계외의 수련자도 상당히 많은 수가 죽어나간 터라 지금 몰려들고 있는 저들이 사실상 계외의 마지막 병력이었다.
거친 모습으로 돌진하는 계외 수련자들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이 점점 서늘하게 변해갔다. 곁에 있던 서자봉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심신 역시 바르르 진동했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황로 위에 우뚝 섰다.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다녀올 테니 술을 데워놓고 기다려. 다 데워지기 전에 돌아올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떨리던 서자봉의 심신은 한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곧장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은 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말을 마친 한제는 곧장 몸을 날렸다. 하얀 옷자락이 나부끼는 모습에서 강력한 기세가 느껴졌다.
콰르릉!
진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10만 명의 계외 수련자 대군은 10만 척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한제와 그가 설치한 진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가부좌를 튼 채 결인을 그린 두 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십만 수련자의 원신이 일제히 떠올라 빛을 번득이며 어둡고 컴컴한 우주를 환하게 밝혔다.
장존회의 명령 아래 계외의 모든 수련자는 목숨을 걸고 이 전쟁에 힘을 보태야 했다. 이에 다섯 명의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은 일자 대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모두 협공해도 봉계 지존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0만 개의 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장존회에서 하사한 원고 시대의 비술을 함께 사용한다면 충분히 붙어볼 만했다.
다섯 명의 세 번째 단계 수련자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동시에 앞 사람의 등 복판을 꾹 눌렀다.
꽝!
굉음과 함께 다섯 명의 힘이 순식간에 완전히 융합해 가장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진중한 표정의 백발노인이었다.
“내 수준과 혈맥으로 원고 비술을 소환한다. 개천도(開天道)!”
노인이 낮게 외치며 오른손으로 상공을 가리키자 한 줄기 강력한 빛이 손끝에서 발산돼 10만 척 길이의 거대한 검이 됐다.
이 검이 등장하자 10만 계외 수련자들의 원신이 일제히 몰려들어 그 안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검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죽어라!”
백발노인은 낮게 기합을 넣으며 삼원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급격히 부풀어 올라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배로 늘어나더니 거대한 바퀴 위에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한제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뒷짐을 지고 선 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술이 데워지기 전에…
콰쾅!
충돌의 순간,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며 줄기줄기 형태 없는 파문이 진을 따라 확산되더니 곧 진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자 진은 바르르 진동하면서 웅웅 소리를 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오히려 바퀴를 돌리고 있던 백만 계외 수련자의 잔혼들만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에 녹아들었던 계내 수련자의 잔혼들이 하나둘 날아오르더니 각자 쥐고 있는 채찍으로 노예와 같은 계외 수련자들의 잔혼을 매섭게 후려쳤다. 이에 노예 잔혼들은 더욱 구슬프고 비참하게 울부짖었고 더욱 힘차게 바퀴를 돌렸다.
콰르릉!
이윽고 바퀴가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았다. 그러자 진은 상상을 초월하는 반동으로 거대한 검을 공격했고 검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날렸으며, 검에 스며들었던 10만 개의 원신도 흩어져 버렸다.
이 원신들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어두워진 채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가부좌를 튼 다섯 명의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 역시 창백하게 질리며 피를 토해냈다.
선두의 노인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결인을 그려 하늘을 가리키더니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10만 개의 원신, 10만 명의 수련자 생기와 수명을 응집하라! 우리는 오늘 모든 수명을 바쳐서라도 저 진을 파괴하고 저자를 죽일 것이다!”
말을 마친 노인이 피를 뿜어내자 뒤의 네 명 역시 일제히 피를 뿜어내며 험악한 표정으로 포효했다.
원신을 내보낸 10만명 수련자의 육신도 분분히 피를 뱉어냈다. 동시에 그들은 순식간에 늙어갔고 본래 백발노인이었던 이들은 급기야 육신이 썩어가는 듯한 기운을 풍겼다.
10만 수련자의 수명을 바친 대가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세상이 처음 열렸을 당시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에는 빛도 생명도 없었다. 원고 선존께서 강림하시어 중생을 탄생시키시고 원고의 빛을 가져와 세상을 밝히셨다. 우리 10만 수련자의 수명으로 선존께서 당시 가져오셨던 원고의 빛을 소환할 것이다! 이 빛은 세상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생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백발노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따라 10만 명의 수련자가 내보낸 원신은 하나로 융합해 짙은 안개가 되더니 진 밖의 우주를 뒤덮었다. 동시에 이 안개는 꿈틀거리다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더니 이내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이 회오리의 끝에는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검은 구멍이 있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회오리의 구멍에서는 한 줄기 빛이 튀어나왔다. 금색을 띤 이 빛은 눈부시게 번쩍였다.
순식간에 우주 전체가 금빛으로 뒤덮였고 삼원륜의 움직임 또한 금방이라도 멈출 듯 둔해졌다.
진 안의 수많은 원혼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고 검은 기운을 발산했다. 마치 진 안에서 흩어져 사라지려고 하는 듯했다.
★ ★ ★
태고 성신. 삼원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장존은 전방을 응시했다. 진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는 그곳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동부 수련자들의 생명 따위는 관심 없다! 10만 수련자의 수명으로 이루어진 신통술은 나라고 해도 전력을 다해야만 저항할 수 있지. 네가 과연 화살을 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 ★ ★
한제는 사방을 채운 금빛을 보았고 회오리의 검은 구멍에서 선강 대륙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일찍이 느껴본 적 있는 기운이었다.
그는 침착한 눈빛으로 손을 들어 올려 계외를 가리켰다.
“분계고산!”
순식간에 계외 우주에 거대한 우산이 나타나더니 금빛을 바깥으로 밀어냈고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듯 강력한 화염을 발산했다.
“칠채도!”
한제가 다시 한번 침착하게 외치자 일곱 색채의 빛이 나타났다. 허공에 나타난 그 빛은 순식간에 하나로 응집해 일곱 빛깔의 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