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91
태산 같은 그의 모습에 누구도 감히 나설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공현기 절정에 이른 체내의 힘을 모두 폭발시킨 상태였다. 아직 공격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 기운에 우주가 바들바들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온 우주가 그의 발아래 굴복하려는 것만 같았다.
받아들여라
대번에 안색이 변한 묘음도존과 구천마존, 대황상인은 두려운 눈으로 서로를 살폈다.
태고오존의 수준은 서로 달랐다. 계외 태고 성신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장존이었지만 온 힘을 다한다면 남몽도존 역시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존재였다. 지난 오랜 시간, 아내의 일로 도심에 상처를 입지만 않았더라면 여태 공현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장존마저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제는 삼원륜의 진 안에 가부좌를 튼 채 진 밖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쾅, 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 밖의 우주는 진동했다.
세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셋이 힘을 합치면 남몽도존을 당해낼 수 있을 거라 여긴 듯했다.
이천매는 세 명의 강자와 맞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허나 혼자서 세 사람과 맞서면서도 남몽도존의 여유로운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상대를 향해 공격할 때마다 그의 손에서 발산된 신통술이 푸른 빛을 번득이며 휙 뻗어 나갔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한제는 이내 눈을 감았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도 그가 두 눈을 감은 순간 차단됐다. 다시금 좌선을 시작한 그는 원신 한 줄기만을 근처에 둘러놓았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
지난 2년 동안 한제의 상태는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이에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미간에 녹아든 여덟 방울의 핏속에 담긴 시천술을 연구하는 데 썼다. 이 신통술이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겪었기에 어떻게든 익힐 생각이었다.
여덟 방울의 피와 융합해 고신의 반점을 늘이는 일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 일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잠시 미뤄두었다.
사흘이 지났을 때, 뭔가를 느낀 듯 두 눈을 뜬 한제는 진 밖 우주 곳곳에 널린 파편과 무너져 내린 우주의 수많은 검은 구멍들을 살폈다. 우주 곳곳에서는 죽어버린 향불의 혼도 수없이 표류했다.
그것들만 보고도 한제는 지난 사흘 동안 이곳에서 진행된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남몽도존과 태고 오존의 세 사람이 맞붙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남몽도존이 타원형의 빛을 통해 한제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 사람과의 전투는 그에게도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묘음도존은 중상을 입어 1백 년은 원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네. 공령기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다음번에 또 마주친다면 어렵지 않게 그자를 죽일 수 있을 거야. 구천은 그보다 상태가 낫지만 향불의 세계가 파괴되고 심신이 훼손됐으니 더는 자네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지. 대황상인은 가장 심각하게 다친 채 비술을 이용해 도망쳤네. 허나 10년 이상 목숨을 부지하지는 못할 게야.”
말을 마친 남몽도존은 한쪽에 가부좌를 틀더니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했다.
이천매의 표정이 복잡하게 번했다. 지난 사흘 동안의 전투를 지켜본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얼마나 큰 위험을 맞닥뜨렸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한제가 입을 열었다.
“제게는 이미 아내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던 남몽도존은 다시 눈을 뜨더니 가라앉은 표정으로 한제를 응시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건가? 아내를 저버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내 딸에게 약속만 해주면 되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나! 내 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공령기 수준에 이르렀다 해도 도고의 후계자라 해도 공현기 초기 수련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네는 내 눈에 차지 않았을 걸세! 그래, 자네가 이광의 활로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허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사족을 데리고 계내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게야!”
남몽도존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기 시작했다.
“난 태고 오존의 한 명이네. 그런 내가 한참 후배인 자네를 속이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보이는가? 자네를 속여서 내가 얻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설사 뭔가 이득이 있다 한들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왔겠는가? 자네가 가진 천역주가 탐이 났더라면 그 당시에 앗았겟지! 자네를 죽이고 싶었다면 자네가 세 번째 단계에 이르기 전에 벌써 죽였을 거라고! 자네와 천매 사이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여태까지 그 일을 끌고 왔을 것 같은가?”
남몽도존은 보기 드물게도 격앙된 모습이었다.
“자네와 장존 사이의 일, 계외와 계내의 전쟁, 칠채와 전가 노인 사이의 일에 참여하기를 끝까지 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저 우리 남사족만 지키며 어느 쪽이 이기든 무사히 살아갈 수 있네. 승리를 거둔 쪽에서 날 포섭하기 위해 온갖 이득을 약속할지도 모르지! 허나 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자네가 내 딸을 받아주기를 원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곳에 왔네. 한데 이토록 완강하게 나온단 말인가! 대체 내가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것인가!”
남몽도존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의 말대로 그가 여태까지 해온 모든 일은 딸을 위한 것이었다.
그제야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했음을 깨달은 이천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몽도존을 향해 절을 한 번 올렸다.
“선배님께서 그간 해오신 일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는 이야기하지 말게. 자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남몽도존이 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원래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내 한 발 물러나겠네.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만약 자네의 아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자네와 내 딸아이는 남매처럼 지내는 거야. 허나 만약 자네의 아내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 딸아이와 부부의 연을 맺는 거지.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이한제, 선택하게!”
남몽도존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저 먼 우주를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이천매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눈빛을 피하는 이천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당장 답을 하라는 건 아니네. 더 생각해보고 남사족으로 나를 찾아오게!”
말을 마친 남몽도존은 부상도 치료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픈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한제가 자신의 제안에 응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찾아왔건만 결말은 기대와 달랐다.
“아버지, 가요.”
이천매는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며 남몽도존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저도 이제 알겠어요. 집으로 돌아가요. 이번에 집에 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천매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함이 마음속까지 느껴졌다.
이내 한제를 향해 돌아선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게 주었던 산수도를 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당시 필요 없다며 돌려주었던 그림이었지만 다시 가지고 싶어졌다.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이천매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고통과 갈등의 눈빛이 드러났다. 그의 아내는 이모완이었다.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죽은 뒤 혼으로나마 2천 년을 함께해왔다.
허나 이천매는 모은미나 서자봉과는 달랐다. 그녀는 한제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그 모든 일을 한제는 잊을 수 없었다. 이천매의 집착과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와 눈빛에 그의 마음이라고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돌려주세요.”
이천매는 입술을 깨문 채 말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미소는 여전했다. 한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림⋯⋯ 돌려주세요. 그리고 이모완이 깨어나면 그때 그녀와 함께 저를 보러 오세요.”
한제는 멍하니 이천매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저물공간에서 한 폭의 그림을 소환했다.
그는 산수도 두루마리를 손에 쥐었지만 당시와 같은 해방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처럼 평온하고 침착하게 이 그림을 눈앞의 여인에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남몽도존의 눈빛은 분노에서 슬픔으로 바뀌었다. 다시 딸아이를 바라본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 아이의 마음은⋯⋯ 이미 죽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모은미 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평의 어미인 그녀에게도 한제를 설득할 권리는 없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의 아비가 다른 여인과 이별하는 광경을 보며 모은미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돌려주세요.”
이천매는 미소를 띤 채 다가와 한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운 손을 들어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웃는 얼굴에 숨겨져 있던 눈물이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제를 조심스레 끌어안았고 그런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한제의 옷섶을 적셨다.
“저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운해성역에서 왜 저를 구하셨어요? 희망을 품은 채 죽게 내버려 뒀다면 당신의 기억 속에라도 깊게 남았을 텐데⋯⋯. 감사와 미안함은 사랑이 아니에요.”
이천매는 조용히 속삭인 뒤 한제의 품을 떠났다. 그리고는 한제의 손에 쥐어진 산수도를 잡았다.
하지만 산수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제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그림의 반대쪽 끝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이천매는 고개를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때, 한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 네게 이 그림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 순간, 산수도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바스러졌다.
“앞으로 넌 이 이한제의 여인이다!”
한제는 고개를 숙여 이천매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굳건했고 눈빛은 부드러웠다.
“내 아내 모완이 깨어나면 함께 혼인하자.”
이천매는 흠칫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니 한참 뒤에야 눈물을 터뜨리며 한제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한제는 그런 이천매를 끌어안았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모완을 떠나보낸 지 2천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받아들인 여인은 바로 이천매였다.
기억은 손아귀 안의 물처럼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물의 온기만큼은 그 손바닥을 통해 기억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물을 움켜쥐었을 때 손바닥은 물의 온기를 물은 손바닥의 온기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천매는 결국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다섯 번째 선비 역시 남몽도존이 데리고 떠났다. 그들은 남사족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 계내의 새로운 세력이 될 터였다.
남몽도존의 수준이라면 제아무리 부상을 입은 상태라 해도 장존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무사할 터였다. 게다가 장존과 맞닥뜨린다 해도 도심이 완전해진 공현기 절정 수준의 남몽도존이 쉽게 열세에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남몽도존은 곧장 공겁기 수준에 발을 들임으로써 현겁을 강림하게 할 수 있을 테고 그 재난 아래에서는 장존이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곳을 떠날 때 이천매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수시로 한제를 돌아보는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이전에도 후회한 적 없었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설령 이 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이천매였다.
이제 삼원륜의 진에는 한제와 모은미만이 남게 됐다. 좀 전의 일들에 모은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도 없었고 한제는 두 눈을 감으며 시천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흡혈마수와 다시 만나다
반년 중 다섯 달이 또 빠르게 지나 이제 마지막 한 달만 남은 때였다.
이제 더 이상 모은미의 눈빛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맑고 또렷한 눈으로 한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몸 조심하고 잘 지내.”
이는 그녀가 한제와 함께 1년을 지내면서 한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돌아서더니 곤허성역으로 향했다. 곤허의 성녀로서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치 지난 열한 달 동안 한제의 곁에 있었던 것이 오직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듯,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홀로 떠나가는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이모완이, 그리고 이천매가 무척 부러웠다. 이천매에게는 아비가 있고 이모완에게는 한제가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집도 스승도 벗도 없고 함께 자랐던 이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굳이 남은 것을 찾아내자면 이평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이평의 어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으니까.
“내가 죽는다 해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평 역시 나를 미워할 테니까⋯⋯.”
어두운 표정의 모은미는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제는 말없이 모은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