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01
일곱 번째 선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가 왔군!’
한제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나더니 허공을 움켜쥐어 옥패를 소환했다.
펑!
옥패가 가루로 흩어진 자리에서는 주먹만 한 검은색 구멍이 생겨났다. 이 구멍은 어마어마한 흡입력과 함께 어스름한 빛으로 한제를 뒤덮었다. 그를 구멍 안으로 빨아들이려는 것만 같았다.
그때, 저 멀리 일곱 색채의 빛에서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의 허상이 걸어 나왔다. 그에게서는 선인의 느낌이 풍겼다.
일곱 색채의 빛에 휩싸인 그의 표정은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한제가 옥패를 부수어 검은 구멍을 소환한 순간 두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그 옥패로 이곳을 떠나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중얼거린 칠채도인은 여유롭게 오른손을 들어 한제를 가리켰다. 그러자 일곱 색채의 빛이 돌연 강하게 번득이면서 칠채도인의 앞에 응집해 그의 손가락에 녹아들더니 한 줄기 폭풍으로 변해 한제에게 돌진했다.
폭풍은 눈으로 볼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날아들었고 순식간에 한제로부터 7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이 무렵, 한제의 심신에서 피어오른 서늘한 기운이 전신의 땀구멍으로 확산되며 짙은 위기감이 밀려왔다. 폭풍의 속도로 볼 때 그가 검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한제는 마치 이 상황마저 예견했던 것처럼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일곱 색채의 폭풍이 달려든 순간, 검은 구멍에서 돌연 여인의 고운 손이 쑥 빠져나왔다. 중지에 비취색 반지가 끼워진 그 손은 곧장 폭풍과 충돌했다.
콰쾅!
폭풍은 순식간에 무너져 일곱 색채의 기운으로 변하더니 마치 일곱 마리의 독사처럼 그 고운 손을 뚫고 들어갔다.
“큭!”
검은 구멍 안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손을 바들바들 떨더니 결인을 그리며 일곱 개로 불어났다. 똑같이 생긴 일곱 개의 손이 중첩된 채 원을 이룬 모양새였다.
일곱 개의 손에서는 일곱 색채의 빛이 발산됐다. 이 빛은 한데 모이더니 한제의 곁에서 튀어나와 멀리 떨어진 칠채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훌쩍 날린 한제는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갔고 태고 성신의 우주에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장존은 일곱 개의 고운 손에서 발산된 빛을 본 순간 또 한 번 표정이 급변했다.
“그 여인이군!”
그러나 그가 받은 충격은 일곱 번째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곱 번째 선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큰언니! 살아 있었구나!”
침착한 사람은 오직 칠채도인뿐이었다.
그는 일곱 개의 손에서 발산된 빛이 달려들자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우주에서 일곱 색채의 파문이 일어나 확산되면서 돌진해오던 빛과 충돌했고 잠시 후 모든 것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칠채도인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두 눈을 감고 있다가 한제와 검은 구멍이 사라진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다.
“채옥칠수인(彩玉七手印)이라⋯⋯. 안타깝게도 내가 얻은 것은 신통술일 뿐, 기억은 아니다. 허나 이 정도로 내게서 도망칠 수는 없지. 이광의 활 역시 그 사명을 다했으니 이만 돌려받을 때가 된 것 같군.”
칠채도인은 고개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 우주에 덩그러니 남은 장존과 일곱 번째 선비는 엄청난 충격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들에게 충격을 안긴, 한제가 소환한 검은 구멍에서 나타난 고운 손의 주인은 칠채선존의 첫 번째 비이자 칠채선존 아내의 친동생이었다.
당시의 약속
운해성역 깊은 곳, 요종 밖의 거대한 균열. 어디로 통하는지 아는 사람이 드문 이 통로 안으로는 수많은 흉수가 들끓으며 수시로 난리를 일으켰다.
지금, 그 균열 깊고 어두운 곳에는 몸길이가 수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흉수가 한 마리 있었다. 사자와 닮은 녀석의 머리에는 뿔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뿔 앞에 한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매우 아름다웠지만 그 얼굴은 창백했다.
여인은 가부좌를 튼 채로 끊임없이 결인을 그린 두 손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녀의 앞으로는 주먹만 한 검은 구멍이 있었다. 사방의 어둠을 집어삼키는 듯하던 구멍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 폭이 10척에 달했을 무렵 그 안에서 한제가 걸어 나왔다. 동시에 검은 구멍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빛으로 흩어졌다.
“고맙네!”
한제는 여인에게 포권을 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한제를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본 사이에 이 정도로 강해져 있을 줄은 몰랐군. 나와의 약속은 이미 잊은 줄 알았어. 1년 전 옥패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서야 잊지 않았음을 알게 됐지.”
“그때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준 자네를 내 어찌 잊겠나?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조금 늦었을 뿐.”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인 한제는 어딘가로 돌진하는 거대한 사자를 힐끔 보더니 한쪽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이번 계획에서 그가 미리 정해둔 빠져나올 방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1년 전, 삼원륜의 진에서 한제는 이 여인이 준 옥패를 통해 연락했고 두 사람은 곧 협의를 봤다.
이 여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몇 가지 단서와 실마리를 통한 추측 때문이다. 한제는 이 여인이 실종된 선존의 첫 번째 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그리고 신식을 통해 간단한 의사소통을 나누었을 때, 여인이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한제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알게 됐다.
“내게는 칠도종 칠채선존의 첫 번째 비 외에 또 하나의 신분이 있어. 칠채선존의 아내 반산몽의 동생이기도 하지. 내 이름은 반산로야.”
첫 번째 비, 반산로가 말했다.
“이곳이 동부 속 세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겠지. 칠채선존은 아홉 개의 태양 중 두 개가 서로 싸우고 있었을 당시 보물을 얻기 위해 잔인하게도 내 언니를 미끼로 삼았어. 그렇게 보물을 손에 넣고는 칠도종을 봉쇄했지. 나는 선강 대륙에서 온 사람 중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어. 게다가 칠채선존 때문에 부상을 입고 본래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네가 나타났고 서로 묵은 원한이 없으니 거래할 수 있었던 거야.”
여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넌 동부 안의 수련자들을 이끌고 이곳을 나가 선강 대륙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 분명 내가 도울 수 있어. 선강 대륙은 기이한 곳이야. 매우 넓고 곳곳에서는 언제나 전란이 일어나고 있지.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종파는 드물어. 그런 곳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종파를 하나 가져야 하지.”
반산로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빛이 조금씩 침잠했다.
“괜찮다 싶은 지역은 이미 누군가가 점거했다고 보면 돼. 솔직히 지금 네 수준으로는 그 어떤 종파도 앗을 수 없고. 동부계는 조작되고 만들어진 곳으로 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도 엄밀히 말하면 전부 거짓이니까. 동부계 안의 어느 종파에서 나와 선강 대륙에서 살아간 사람은 거의 없어.”
한제는 ‘거의’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다만 선강 대륙으로 가려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선강 대륙에 난입한 죗값도 받게 되겠지.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도 들은 적이 있긴 해. 어쨌든 선강 대륙에 들어가서도 버티려면 최소한 공겁기에는 이르러야 해. 나는 이 부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말을 마친 여인은 한제를 바라보았다.
“계속하게.”
한제는 말없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반산로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내 언니는 죽지 않았어! 언니는 이곳이 아니라 선강 대륙에 있지.”
여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을 때, 한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선강 대륙에서 종파를 얻는 건 매우 어려워. 허나 칠채선존을 죽인다면 칠도종을 차지할 수 있지. 나와 내 언니는 칠도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우리는 칠도종이 아니라 선강 대륙 동부 9종 13문에 속한 대혼문(大魂門)의 핵심제자니까. 당시에는 그저 눈이 멀어 칠채선존을 따라 나왔을 뿐.”
여인의 목소리에서는 한이 느껴졌다.
“칠도종을 얻은 뒤, 원한다면 나와 내 언니가 도우를 대혼문에 추천해주지. 선강 대륙에 들어가 받게 될 처벌도 언니에게 말해 스승님께 도움을 청해 달라고 부탁하겠어. 스승님께서 받아주신다면 벌도 줄어들 거야.”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나와 함께 갈 동부계의 다른 수련자들은?”
반산로는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돌연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한제 역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태운 사자 흉수도 겁에 질린 눈으로 몸을 떨었고 우뚝 멈춰 섰다.
우주에서는 일곱 색채의 빛 한 줄기가 번득였다. 마치 억지로 우주를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한제는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더니 곧장 돌진하며 나이법을 사용했다. 반산로 역시 망설임 없이 한 마리 나비처럼 몸을 날려 한제를 뒤따랐다.
그녀는 도주하는 와중에 뒤로 손을 뻗어 휘둘렀다. 그러자 사자 흉수가 포효하며 일곱 색채의 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제(血祭)!”
반산로의 눈이 번득였다.
순간 핏빛이 번득이는가 싶던 사자 흉수의 몸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터져버렸다. 피범벅이 된 살점과 붉은 안개로 뭉개진 녀석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곧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흉수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한제는 전력을 다해 한 줄기 빛이 되어 이동했고 수시로 우주에 녹아들면서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여기!”
수준이 매우 높은 반산로는 한제보다 조금 더 빨랐다. 아직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어느 정도 억누르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반산로는 한제보다 앞서 가다가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제는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데 바로 그때, 두 사람 뒤쪽의 허공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와 함께 강력한 위압감과 음파가 전해졌다.
두 사람 뒤로는 백 마리 이상의 흉수가 몰려들어 있었다. 희생된 사자 흉수의 피 안개에 이끌려온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코웃음 소리에 녀석들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면서 나가떨어지더니 순식간에 폭발해버렸다.
핏방울과 살조각이 곁을 휙 스쳐가자 한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백 마리가 넘는 흉수를 무너뜨린 일곱 색채의 빛 안에서 침착한 표정의 칠채도인이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이한제, 이광의 활과 화살을 넘겨라.”
칠채도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귀를 통해 흘러든 그 목소리는 한제의 심신을 때렸다.
“쿨럭!
한제는 바르르 떨면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창백한 얼굴의 반산로는 한제의 팔을 움켜쥐고는 다급하게 몸을 옮겼다.
“나의 첫 번째 비여, 어찌하여 나를 보고도 도망치느냐?”
칠채도인은 반산로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손을 휘둘러 붉은 불새의 허상 아홉 마리를 소환했다. 이 불새들은 주작은 아니었지만 주작 못지않은 열기를 발산했다. 게다가 이들에게서는 수련성 혼의 기운까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동부계 내의 매우 드문 타오르는 수련성, 즉 아홉 개의 태양을 제련해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불새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아홉 갈래의 빛을 그리며 한제와 반산로를 향해 돌진했다.
“자네가 막게!”
위기의 순간, 실력을 숨길 생각 따위 하지 않고 낮게 고함을 내지른 한제는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그 힘을 빌려 뒤로 훌쩍 뛰어오르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린 반산로는 한 움큼 피를 토해냄과 동시에 날카롭게 외쳤다.
“대혼도(大魂道), 내 혼을 바쳐 계를 가른다!”
반산로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움켜쥐자 내뱉었던 피는 곧장 피 안개가 되어 그녀의 오른손에 녹아들어 붉은 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