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12
그 감옥을 짓누르고 있는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조각상이 하나 있었다. 선강 대륙의 하늘을 떠받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조각상이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엄숙해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그는 대지를 보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을 경멸하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다. 마치 하늘과 땅, 선인을 비롯한 세상 어떤 것도 눈에 차지 않는 것처럼.
또한 그는 선강 대륙 전역을 장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팔을 펼치고 있었는데 온 세상을 파멸시킬 힘이 담긴 듯한 두 손바닥 중 왼손 위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흑의흑발의 청년은 조각상을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조각상의 미간에서는 며칠 전부터 빛이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응집된 피처럼 새빨간 빛이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순간 곧장 이곳으로 향한 청년은 단 한순간도 조각상의 미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뒤편 허공에는 수천 명의 인영이 떠 있었고 그 뒤로는 또 수천 명이, 다시 뒤로는 수만 수십만 명이 있었다.
“시간이 다 됐나?”
한참 뒤, 흑발의 청년이 적막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 순간, 돌연 저 멀리 하늘에서 키가 10만 척에 달하는 아홉 명의 거인이 허공을 밟으며 다가왔다. 그들 뒤에서는 황포(皇袍) 차림에 조각상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 중이었다. 더욱이 그 뒤로도 그와 똑같이 생긴 아홉 명의 거인이 있어 마치 총 열여덟 거인의 수행을 받는 듯했다.
이 중년 사내의 등장에 이곳에 모여 있던 고국 수련자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고황(古皇)을 뵙습니다!”
조각상 왼손 위에 선 흑발 청년만은 어떤 예도 갖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저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포 차림의 사내는 그런 청년의 모습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지 고국 수련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허공을 밟아 흑발 청년 곁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한 그는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존경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엽소, 현라 대천존을 뵙습니다.”
이 흑의흑발의 청년이 바로 아홉 태양 중 하나인 고국의 현라 대천존이었다.
“시간이 다 됐다. 조금 늦었구나.”
흑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극황과 시황이 저희 쪽 일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그 말에 현라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도고 일맥의 황존인 네가 극황과 도황, 시황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 일은 우리 도고 일맥의 중요한 사건이니 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족숙(族叔)의 말씀이 옳습니다.”
중년 사내가 상대를 이르는 호칭을 바꾸었다. 그러자 현라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족숙, 이번 일은 정말 기이합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엽소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선조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엽막 후계자의 존재는 뜻밖의 일이다. 허나 혈맥을 통한 감응으로 볼 때 그가 고조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구나.”
“그자가 엽막의 후계자라고요? 어찌 그런 일이!”
엽소는 흠칫 놀랐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당시 엽막은⋯⋯.”
그러나 현라가 그의 말을 뚝 끊었다.
“7일 전, 도고 일맥 고조 조각상이 창궁혈의 빛을 발했다. 그 창궁혈의 빛은 7일 동안 응집되고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극히 드문 일이다! 나는 당시 9일 만에 응집을 마쳤지. 하여 고도 일맥을 타고난 사람들을 자세히 살폈지만 고조로 하여금 창궁혈의 빛을 발하게 한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점술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이 사건의 근원을 발견했지! 그자는 엽막의 후계자다!”
현라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그리고 선강 대륙으로 온다면 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내 유일한 제자로! 제한된 동부계에서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면 후에 필히 우리 도고 일맥의 강자로 거듭날 수 있을 터! 내가 환생한 뒤에는 그자가 도고 일맥을 수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자가 성공하기를 바랄 뿐.”
현라는 거대한 조각상의 미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초의 사람
시간이 흘러 어느덧 13일이 지났다.
주위의 도고 일맥 사람들은 지난 며칠간 조각상 미간의 붉은 빛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에서는 점차 기대감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날 황혼이 질 무렵, 변화가 발생했다.
조각상의 미간에서 발산된 붉은 빛은 한계에 달한 듯 하늘의 절반을 비추었다. 이에 사방 모든 것이 이 빛에 뒤덮였다. 뒤이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호흡이 가빠졌고 조각상의 미간에서 한 방울의 피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허나 한참이 지나도록 두 번째 핏방울은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한 방울?”
엽소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고족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드러났다. 기적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푼 채 13일을 기다렸건만 고작 한 방울이라니.
허나 그때, 돌연 휙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각상의 미간에서 두 번째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세 번째, 네 번째 핏방울도 나타났다.
“네 방울!”
“네 방울이다!”
엽소의 두 눈이 번득이며 조각상의 미간을 응시했다. 네 방울의 피는 놀랍긴 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세 번째 손의 첫 번째 겁을 넘긴 대부분의 고국 백성은 한 방울의 피를 얻는다. 허나 두 방울을 얻는 이도 종종 있었다. 엽막을 제외하면 도고 일맥의 황족들도 모두 두 방울의 창궁혈을 얻었다.
허나 엽소는 당시 무려 여섯 방울의 피를 얻었고 이를 통해 도고 일맥 중 현라를 제외한 최강자가 됐다. 또한 도고 일맥의 황존이 된 그는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존경을 받았다. 다만 그럼에도 그는 현라의 제자는 되지 못했다. 감히 말하지는 못했지만 황존은 그게 내내 불만이었다.
그러던 중 현라 대천존이 엽막의 후계자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으니,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 방울의 피라니, 한동안 이런 일은 없었는데…”
“하지만 아마 이게 끝일 거야. 고조 조각상의 빛을 봐, 어두워졌잖아.”
“13일을 들여 네 방울이라… 대단한 건가 실망스러운 건가?”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각상의 미간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은 점점 흩어져 사라졌고 사방을 뒤덮었던 붉은 빛 역시 옅어지기 시작했다. 백만 명에 가까운 도고 일맥 사람들은 이제 마무리됐음을 직감했다.
엽소는 비록 표정은 덤덤했지만 속으로는 냉소했다.
‘겨우 네 방울의 피를 가지고 어찌 우리 도고 일맥을 수호할 자격이 있겠는가!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떤 셈이군. 족숙이 저자를 제자로 들이려 해도 명분이 없겠지. 네 방울의 피를 얻은 이는 이미 몇 명이나 있고 심지어 여섯 방울의 피를 얻은 나도 족숙의 눈에 들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도 족숙이 저자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날 거야.’
엽소는 의식적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고는 곁에 있는 현라 대천존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족숙, 네 방울의 피도 적은 것은 아닙니다. 엽막의 후계자는 우리 도고 일맥 내에서 뛰어난 자로 인정받을 겁니다.”
현라 대천존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는 엽소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여전히 고조 조각상의 미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번득이는 붉은 빛은 점점 미약해져 이제는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현라 대천존이 바라보는 가운데 네 방울의 피가 번쩍이다가 상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허공을 뚫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좀 더 기다려보게.”
현라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엽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도고 일맥에서 족숙을 제외한다면 나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은 없어. 엽막도 그랬건만 그의 후계자라고 다를까!’
★ ★ ★
운해성역 균열 안의 기이한 공간. 한제의 분신은 가장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제단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본체로 응집된 한 방울의 피가 떠 있었다.
한데 그때, 이 기이한 공간에서 돌연 쉭 소리가 들려오더니 돌연 겹겹의 파문이 제단의 허공에서 나타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매우 강력하고 오래된 듯한 기운이 어렴풋이 확산됐다. 동부계 내의 모든 생명을 압도하는 기운이었다. 심지어 이전에 나타났던 대천존의 기운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허나 그토록 무시무시한 이 기운의 존재를 감지한 사람은 한제뿐이었다.
제단 상공에 나타난 파문 속에서는 거대한 회오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회오리 안에서는 붉은 빛이 발산됐는데 이 빛이 제단을 완전히 뒤덮으면서 그 안에 깃든 야만적인 힘에 한제의 분신은 제단 밖으로 밀려났다.
“크윽!”
그 강력한 힘에 한제의 분신은 심신까지 바들바들 떨려왔다.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심지어 칠채도인이라 해도 밀려났을 게 분명했다.
한제는 심신의 감응을 통해 자신의 본체로 이루어진 한 방울의 피가 타오르는 듯 붉은 빛을 발하며 회오리 안에서 발산된 붉은 빛과 서로를 비추고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 방울의 피가 회오리 안에서 휙 하고 튀어나와 한제의 본체로 이루어진 피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방울의 피는 융합되기 시작했다.
한제의 분신은 얼른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심신에서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에 도무지 육신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본체에 집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부좌를 튼 순간, 머릿속에서는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의식이 흘러나오더니 곧장 핏방울에 녹아들었다.
빠드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면서 한제는 육신을 가지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불사르는 듯한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합쳐진 두 방울의 피는 활활 끓어오르는 듯 급속도로 꿈틀거렸다.
그때, 회오리 안에서 두 번째 피가 튀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 한제의 본체로 응집된 피에 녹아들었다. 이에 한제의 의식은 더욱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 그럼에도 한제는 이를 악문 채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참아냈다.
잠시 후에는 고조의 세 번째 핏방울이 회오리 안에서 나타나 한제의 피와 융합했다.
펑!
융합한 핏방울이 순식간에 폭발하더니 그 안에서 전라의 인영이 허상으로 응집됐다. 그 인영은 한제 자신이었다.
그의 온몸은 복잡한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두 눈은 꼭 감긴 상태였고 입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으며, 몸은 허상에서 점차 실체로 응결됐다.
한데 이때, 회오리 안에서 네 번째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이 피는 붉은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며 휙 날아들어 한제의 미간에 떨어졌다.
순간 한제의 온몸이 바르르 경련했고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눈동자는 붉게 변해 있었고 온몸이 떨렸으며, 전신에서 강력한 힘이 피어올랐다. 몸 곳곳에서는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고조의 피 네 방울과 융합되면서 도고의 혈맥을 갖게 됐다. 이제 한제는 진정한 고조의 후예이며 정통성을 띤 고족의 백성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