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13
네 번째 핏방울을 내보낸 회오리는 점차 멈추면서 흩어져 사라질 조짐을 보였다. 회오리의 소멸은 고맥창궁혈의 끝을 의미했다. 그럼 한제는 이 겁을 통과하는 셈이지만 더 이상의 핏방울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한제에게는 이미 한계였다. 엽막의 후계자인 그가 당시 엽막보다 더 큰 성과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제는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선강 대륙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동부계 안에서 태어난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애초에 여섯 방울의 피를 얻고 도고 일맥의 황족으로 거듭난 엽소와는 비교도 될 수 없었다.
현라 대천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홉 태양 중 하나, 즉 선강 대륙의 최강자 아홉 명 중 하나인 전설적인 존재, 고조의 피 여덟 방울을 얻었던 그와 감히 어찌 비교를 하겠는가!
한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끈기과 반항심,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좌우되는 삶을 거부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전부였다. 거듭된 위기 속에서 한 걸음씩 성장해 지금의 상태에 이른 그의 삶은 역경 그 자체였다.
반면 선강 대륙의 엽소와 고국 수련자들은 안전하고 편안하게 수련을 해왔고 대천존의 비호 덕분에 죽음의 위기를 겪은 이는 거의 없었다.
한제가 목숨을 걸면서 겨우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 엽소는 수많은 이들의 수호를 받으며 수련을 해왔다.
한제가 모완을 되살리기 위해 어떤 것도 살피지 않고 투쟁하는 동안 엽소는 다른 이들이 바친 기이한 보물들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드는 여인들을 골라 자신의 비로 삼았다.
‘네 방울이 정녕 이 이한제의 한계란 말인가!’
체내 혈맥의 힘이 응집되는 동안 한제는 사라져가는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더 많은 핏방울을 원했다. 자신의 혈맥의 힘이 더 짙어지기를 바랐다.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불굴의 저항심을 위해서였다.
‘고작 네 방울의 핏방울로는 안 된다!’
한제는 의지가 담긴 눈으로 몸을 훌쩍 날려 사라져가는 회오리로 돌진했다.
그는 선강 대륙의 도고 일맥 사람들과 달랐다. 현라 대천존을 포함한 그들 모두는 신비로운 어둠 속 존재인 고조를 누구보다 존경했다.
허나 동부계 출신인 한제에게는 고조에 대한 존경심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맥창궁혈을 통해 얻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회오리로 달려든 최초의 도고 일맥이었다.
선강 대륙 고국 3맥은 대대로 세 대천존의 비호 아래 살았고 세 황존의 통치를 따랐으며, 선조의 빛 안에서 생활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조를 신처럼 추앙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조는 고국 수련자들의 하늘과도 같았다. 이는 현라 대천존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제는 고국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는 긴 빛을 그리듯 몸을 날려 막 흩어져 사라지고 있는 회오리로 돌진했다. 결연한 의지와 패기, 불굴의 기세가 어린 모습이었다.
만약 고맥의 인정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조의 인정을 받은 이상 겨우 네 방울의 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에게 혈맥은 필요치 않았다. 만약 그가 혈맥을 원했더라면 광인으로부터 도고 혈맥과 동등한 선인 혈맥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조가 더 많은 혈맥을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체내에 융합된 네 방울의 피를 밀어내 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선인 혈맥으로 선인이 될 생각이었다.
“넌 나를 인정했지만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를 이 혈맥에 들이고 싶다면 더 많은 피와 힘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이런 언행은 고족이 입장에서는 불경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내 결코 혈맥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터!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면 네 방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회오리에 거의 접근한 한제는 낮게 호통치듯 외쳤다.
그 목소리는 회오리 안으로 전달되어 가장 깊은 곳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 안에서는 메아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제가 회오리 안으로 들어선 순간,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줄기줄기의 신식 같은 기운이 안쪽으로부터 확산되면서 눈 깜짝할 사이 그를 뒤덮었다. 오래된 느낌만 날 뿐 감정적인 파동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마치 죽은 것만 같은 이 기운은 한제의 진입을 저지하고 그를 회오리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한제는 서늘한 눈으로 회오리를 응시하다가 미간을 두드리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유백색의 빛이 한 줄기 흘러나오면서 바로 옆의 허공이 왜곡되더니 허상의 화면들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첫 번째 화면에 나타난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결단기 수준에 불과한 그가 있는 곳은 주작성 내 고신의 땅이었다.
화면이 전환되면서 이 흑의의 청년이 고신의 땅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갖은 고초를 겪은 청년은 마침내 고신 서사의 기억의 유산을 손에 넣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고신의 유산을 얻었던 순간이다!”
한제는 낮게 내뱉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어 그가 지금껏 고신의 유산을 얻었던 순간들을 보여주었다. 가장 마지막은 태고 성신의 오래된 무덤이었다.
이 화면들은 한제의 기억이기도 했다.
“이런 내가 네 혈맥을 선택하게 하려면 얼마만큼의 피가 필요할지 생각해봐라. 싫다면 나를 포기해! 그럼 나는 고족의 혈맥을 포기하고 선인이 되겠다!”
한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끝나자 그를 뒤덮었던 신식 같은 기운이 휙 하고 그의 곁에서 떨어져 회오리 안으로 되돌아갔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한제는 여유작작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그때, 우렁찬 소리와 함께 회오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다시금 점차 또렷해졌고 붉은 빛까지 발산했다.
황존의 질투
선강 대륙, 도고 일맥이 모인 허공의 도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엽소는 불쑥 치미는 짜증을 참기가 힘들었다.
한데 그때, 조각상의 미간에서 거의 꺼져 가던 붉은 빛이 돌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곳곳에서는 놀란 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지금껏 한 번 끝난 고맥창궁혈이 다시 시작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엽소의 표정도 급변했다. 그는 조각상의 미간을 응시하며 놀란 듯 웅얼거렸다.
“이럴 수가! 분명 끝이 날 참이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오직 현라 대천존만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채 기이하게 번득이는 눈으로 말없이 조각상의 미간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모인 백만여 명의 고맥 일족이 충격에 빠져 있던 그때, 조각상의 미간에서 발산된 붉은 빛이 순식간에 응집해 다섯 번째 핏방울을 내보냈다.
“오옷! 다섯 번째 핏방울!”
“정말 다시 시작되려는 것인가!”
다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지만 이번데도 한참이 지나도록 이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 다섯 방울? 별거 아니로군. 난 여섯 방울을 얻어 도고 황존이 됐다!’
엽소는 내심 안도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조각상의 미간에서 붉은 빛이 다시 한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섯 방울! 여섯 방울이다! 황존과 같아!”
“아, 아니야! 여섯 방울이 아니야! 일곱 방울이야!”
핏빛이 응집됨에 따라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지만 황존 엽소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일곱 번째 핏방울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덟 번째 핏방울 역시 그 뒤를 이어 나타났다.
그 순간, 현라 대천존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당시 얻었던 핏방울도 여덟 개가 아니었던가.
이 광경에 모든 이들은 환호마저 멈추고 충격에 빠진 눈빛으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황존도 잠시 멍해 있었으나 이내 두 눈을 기묘하게 번득였다.
‘엽막의 후계자가 어찌 여덟 개의 핏방울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야말로 고조의 진정한 후예이자 황족의 혈맥이며 족숙 다음가는 도고 혈맥이거늘!’
엽소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런 감정에 휩싸인 모습을 현라 대천존에게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거워진 마음을 감추며 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현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족숙. 보아하니 저자는 족숙의 유일한 제자가 될 것 같군요. 심지어 족숙을 넘어 우리 도고 일족의 새로운 대천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존의 이 말은 무척 좋은 말 같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많은 뜻이 감춰져 있었다. 다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표정 때문에 그 속내가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을 뿐. 그의 음흉한 심산을 알아볼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라는 몸을 살짝 틀더니 의미심장한 눈으로 엽소를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 황존의 심신은 바르르 진동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또다시 우렁찬 환호성이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황존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돌렸을 때, 조각상의 미간에서는 아홉 번째 핏방울이 응집되고 있었다.
그 순간, 현라 대천존의 두 눈이 밝게 번득였다. 모든 이들은 그 눈에 담긴 기쁨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붉은 빛은 다시 번득이며 응집하더니 모든 고족 수련자들을 질식시킬 듯한 기운과 함께 열 번째 핏방울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열 번째! 황족 중에서도 열 방울의 피를 얻은 사람은 없었는데…!”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그야말로 진정한 도고 황존이라는 뜻 아닌가!”
“후에 우리 도고 혈맥의 황존에 등극하게 될지도 몰라!”
엽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음속에서 꾸역꾸역 치미는 광기 어린 질투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던 그는 조각상을 그 미간에서 번득이는 붉은 빛을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와중에 사방의 붉은 빛이 몰려들어 흡수되면서 한 방울의 피를 응집하고 있었다.
한데 이 피는 붉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피가 응집된 순간, 황존은 마치 무너져 내린 듯한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의 두 눈에는 이제 충격이 아닌 불신의 빛이 어려 있었다.
“저, 저것은 혼혈… 고조의 혼혈(魂血) 아닌가! 이, 이럴 수는⋯⋯.”
현라 대천존의 표정에도 처음으로 놀라움과 충격의 빛이 드러났다. 열 번째 핏방울이 응집되기 시작할 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던 그가 보라색 핏방울을 확인한 순간 충격을 금치 못했다.
‘고조⋯⋯ 이 한 방울의 혼혈은 뭔가를 암시하시는 겁니까? 혼혈이라⋯⋯. 역대로 혼혈은 단 아홉 방울만 나타났을 뿐. 세 방울에 하나씩, 총 세 개의 고족 혈맥은 그렇게 형성됐지. 그렇다면…?’
현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면서 거대한 붉은 태양 하나가 나타나 이곳의 모든 기운을 뒤덮었다. 덕분에 이 안에서의 일은 외부의 누구도 볼 수 없게 됐다.
“현양(玄陽)의 힘으로 이곳을 봉한다! 도고 일맥의 자손들은 결코 이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 이를 위반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처형하겠다!”
현라 대천존은 우렁차게 외친 뒤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으로 엽소를 바라보며 조용하고도 싸늘하게 덧붙였다.
“알겠느냐?”
“예⋯⋯.”
황존은 얼른 고개를 숙여 답했지만 그의 질투심은 이미 절정에 이른 상태였다.
“난 선족의 땅에 다녀와야겠다. 그 아이를 데려와야겠어.”
현라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선족의 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처음 나타난 네 방울을 제외한 다섯 방울의 피와 한 방울의 보라색 혼혈이 조각상 미간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현라 대천존이 발휘한 힘으로 나타난 붉은 태양이 도시를 봉쇄한 순간, 이 여섯 방울의 피는 휙 하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허공에 파문들이 일며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하더니 여섯 방울의 피를 삼켰고 핏방울들은 회오리의 중앙을 통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진 것은 보라색 혼혈이었다.
혼혈까지 회오리 안쪽으로 사라진 뒤에야 고족 수련자들은 분분히 정신을 차렸으나, 방금 목격한 일은 거대한 충격이 되어 그들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었다.
“보라색 혼혈이라니⋯⋯ 우리 고국에는 여태 단 아홉 개의 혼혈뿐이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조는 아홉 방울의 혼혈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세 아들은 하사받은 혼혈로 각각 하나의 혈맥을 조성했다. 도고 일맥은 그중 셋째 아들이 창조한 혈맥이었다. 그리고 지금, 열 번째 혼혈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