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14
“대체 누굴까? 고맥창궁혈에서 혼혈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세 번째 손에는 세 개의 겁이 따르지. 첫 번째 겁인 고맥창궁혈에서 아홉 방울의 피와 혼혈 한 방울을 얻은 자라면 다음 겁인 고도삼분신에서는…?”
“더욱이 마지막 겁인 고조의 은혜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는 상상할 수도 없군. 고국에서 여태 고조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없었어! 저자라면 혹시…”
혼혈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도고 혈맥의 수련자들은 참지 못하고 웅성거렸었다. 현라 대천존이 이곳을 봉인하고 거역 불가한 위엄으로 이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선강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을 터였다. 그랬다면 극고(極古) 일맥과 시고(始古) 일맥 모두 이 일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몰려들었을 테고 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국 입장에서 열 번째 혼혈의 등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만약 한제가 남은 두 번의 겁에서 두 방울의 혼혈마저 손에 넣는다면 그는 당시 고조의 세 아들처럼 새로운 고족을 창조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는 선족에게도 작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 역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을 보내 이 사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혼혈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여섯 방울의 피가 하늘에 나타난 회오리 안으로 사라지자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조각상의 미간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과 모든 기운은 흩어져 사라졌다.
현라 대천존은 빛으로 이곳을 뒤덮고 있는 붉은 태양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태양은 전보다 더 강한 빛을 발하며 백만여 갈래로 나뉘어 각각이 모든 고족 수련자들의 체내로 녹아들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 후에야 태양은 사라졌고 하늘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이곳을 뒤흔들었던 충격과 긴장감을 흩어버리려는 듯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던 현라는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사라졌다. 그는 선족이 점유하고 있는 곳 칠도종의 그 동굴로 찾아가 도고 일맥을 가진 ‘그 사람’을 찾아 데려올 생각이었다.
현라 대천존이 떠나자 도시는 침묵에 잠겼다.
엽소는 매우 어두워진 얼굴로 떠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떨리는 심신을 안은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현라 대천존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부러움과 질투, 의아함 등 각양각색이었지만 대부분은 기대감을 품은 모습이었다. 현라 대천존이 돌아올 때 이 충격적인 사건의 주인공과 함께일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우리 도고 일맥은 고족 3맥 중 가장 약했지. 이 상황이 바뀌었으면 좋겠군.”
한편, 엽소는 도시의 깊은 곳, 자신의 황궁으로 돌아왔다. 끝이 시야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황궁은 곳곳이 옥으로 장식되어 있어 매우 화려했다.
궁 안의 수많은 시종은 하얗게 질려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황궁 동쪽 도고 황존의 행궁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분노가 담긴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이었다.
콰르릉! 콰쾅!
끊임없이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황존의 행궁이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돌조각을 휘감은 강력한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가까이 있던 시종과 호위병들은 반응할 틈도 없이 그 기운에 휘말려 소멸해 버렸다. 뒤이어 짙은 피비린내가 퍼지면서 무너진 행궁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엽소였다.
기쁨도 분노도 찾아볼 수 없는 덤덤한 눈으로 폐허가 된 행궁을 나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쑥 내뱉었다.
“정리해라. 사흘 안에 새로운 행궁을 보고 싶구나.”
그러자 사방에서 수백 갈래의 연기 같은 인영들이 나타나 일제히 엽소를 향해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소매를 휘두르며 그곳에서 사라진 엽소는 황궁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그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거대한 고조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나야말로 도고 황존이자 고조의 진정한 후예다. 내 몸에는 고조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데 고작 엽막의 후계자 따위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현라에게 그토록 인정받는단 말인가! 혼혈? 혼혈 때문인가?”
엽소는 차게 내뱉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좋아, 재밌겠군. 혼혈을 가진 자가 내 앞에 무릎 꿇게 해주겠다!”
엽소의 비릿한 미소는 점점 깊어졌다.
고도(古道)의 저항
먼 곳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 엽소는 손을 휘둘러 주먹만 한 붉은 구슬을 소환했다. 이 구슬 안에서는 짙은 안개가 회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짙은 안개 속에서는 한 줄기 혼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드러난 모습으로 보건대 여인의 혼인 듯했고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일부분만 존재했다.
“엽도!”
엽소가 손에 든 구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의 뒤 허공에서 왜곡된 빛의 장막이 나타나 번득이더니 검은 도포 차림의 노인이 나타나 엽소를 향해 포권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여인을 찾아라.”
중년 사내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존, 소인은 이미 고국 전역을 돌아보았지만 그 여인의 소재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선족이 점유한 구역에 사람을 보내놓았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국사(國師)에게서도 소식은 없나?”
엽소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으나 엽도라 불린 노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여인의 혼을 황존께 드린 것은 분명 국사지만 그도 여인의 소재를 알아내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여인이 후에 황존께 큰 쓰임이 될 거라고 했지요. 그 여인을 손에 넣으면 황존께서는 완전한 고국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도고의 미래를 점치다가 심신이 저승에 녹아들었고 그때 천도의 분혼에서 그 여인의 혼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황존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붉은 구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은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만약 국사의 말처럼 이 여인이 큰 쓰임이 된다면 난 그녀를 황후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넌 계속해서 선족 구역을 탐색하도록 해라. 그래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도고의 땅에 있는 모든 여인을 대상으로 이 혼과 융합되는 사람이 있는지 하나하나 찾아볼 것이다.”
“예!”
엽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 물러나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포권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황존, 국사가 폐관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뭐지?”
붉은 구슬을 바라보고 있는 황존의 두 눈에서는 짙은 위엄이 드러났다.
“자신이 예측한 미래는 진실일 수도 있지만 거짓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의 혼을 저승에서 건져왔을 때 두 가지의 다른 화면을 보았는데 그중 하나에는 황존께서 온 고국을 통치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으나 다른 화면에서는… 황존의 죽음을 보았노라 했습니다. 또한 그 두 가지 다른 화면에는 황존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도 했지요. 그 모습은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자의 머리가 백발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군. 물러가봐라.”
황존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손에 든 구슬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넌 누구냐? 국사가 보았다는 백발의 인영과는 또 무슨 관계지?”
붉은 구슬 안의 여인은 마치 아무 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안개에 뒤덮인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살짝 불어온 바람이 황존의 황포 자락과 구슬에 닿았다. 그러자 구슬 안의 안개가 살짝 밀려나면서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 ★ ★
동부계, 운해성역의 균열 안. 제단 위에 나타난 거대한 회오리는 콰쾅 소리와 함께 번득이는 붉은 빛으로 한제를 뒤덮었다.
한제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회오리 깊은 곳의 붉은 빛을 응시했다. 뒤이어 그 안에서 몇 방울의 피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아홉 번째 핏방울까지 빠른 속도로 한제의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피하지 않고 이를 바라보았다. 이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핏방울이 연달아 그의 미간에 떨어져 곧장 체내에 녹아들어 융합됐고 그 순간 한제 전신의 피에서는 줄기줄기 강력한 힘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크아아!”
한제는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온몸으로 밀려드는 고통은 이전의 네 방울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치 온몸이 찢겨나가고 새살이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일곱 번째 핏방울이 달려들어 융합되기 시작했다. 순간 한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고 온몸에서는 푸른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났다. 체내의 피는 세차게 온몸을 돌았고 육신이 기이하게 꿈틀거렸으며, 뼈는 순식간에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에 깃든 고조 혈맥의 힘도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혈맥은 처음에는 희박했지만 빠른 속도로 진해지고 있었다.
고국 백성들은 선인과 마찬가지로 혈맥의 힘이 짙을수록 신분이 높았고 그 힘도 강력했다.
피 일곱 방울과의 융합으로 인해 한제의 혈맥은 도고 일족 중에서도 황존에 버금가게 됐다. 고조의 직계 후예인 황존은 태생적으로 고조의 혈맥을 이었고 이후 여섯 방울의 피와 융합해 도고 황존의 자리에 등극했다.
하지만 한제는 고조 혈맥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방금 전까지는 인정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그의 혈맥은 감히 황존과 비교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황족과 백성만큼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다.
허나 이 차이는 얼마든지 없앨 수도 있었다.
여덟 번째 핏방울이 미간에 닿으며 융합을 시작한 순간, 한제 체내 혈맥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고 더불어 체내에서 울리는 쾅 소리도 갈수록 강렬해졌다.
골수에서부터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에 한제는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경련했다.
고조의 혈맥은 선인의 혈맥과 마찬가지로 그의 골수를 변화시켰다. 골수가 변하면 그 안에서 생성되는 피도 자연히 변하게 됐고 그렇게 혈맥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골수를 내부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변화시키기는 매우 힘들기에 외부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외부의 힘이란 바로 체내에 흐르는 피다.
고조의 기운이 깃든 피는 끊임없이 전신의 뼛속으로 흐르면서 스며들어 빠른 속도로 골수를 변화시켰다. 동시에 한제의 평범한 혈맥을 고귀한 혈맥으로 잡스러운 것에서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바꾸어갔다.
여덟 방울의 피와 융합을 마친 뒤에도 한제의 혈맥은 황존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거의 비슷한 정도는 됐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아홉 번째 핏방울과의 융합을 통해 뒤집어졌다.
아홉 번째 핏방울은 뼈에 녹아들면서 골수를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이제 한제는 황존을 능가할, 도고 일맥 중 가장 진한 혈맥을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나타난 한 방울의 혼혈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방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그 빛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힘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한제는 그 순간 혈맥으로부터 기인한 짙은 갈망을 느꼈다. 이 갈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 순간, 보랏빛 핏방울은 짙은 빛을 번득이며 한제의 낙인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 핏방울은 곧장 융합하는 대신 한제의 혼에 녹아들었다.
혈맥의 농도가 짙어짐으로써 한제는 도고의 힘을 폭발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혼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는 도고 혈맥의 일개 백성에 불과한 셈이었다. 허나 혼혈은 그의 혼을 도고의 혼으로 모든 도고 혈맥 수련자들 위에 자리한 존재로 황존보다도 훨씬 고귀한 존재인 고조의 네 번째 아들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혼혈과 융합된 순간, 한제는 멍한 눈으로 서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둥실 떠밀려가다가 제단에 떨어진 몸은 엽막의 팔에 기댄 채 쓰러졌다.
상공의 회오리는 점차 흩어져 잠시 후에는 자취를 감췄고 우주는 고요한 상태로 돌아갔다. 무서울 정도의 적막이 온 우주를 뒤덮었다.
한제는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의 몸에서 발산된 위압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주위의 마수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와들와들 떨었다. 만약 한제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이곳은 앞으로 만 년 동안은 이런 적막에 휩싸여 있을 터였다.
한제의 본체는 잠들었고 제단 밖으로 밀려나 허공에 둥둥 뜬 그의 분신도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없었다.
의식이 잠들어 있는 가운데 한제는 꿈을 꾸었다.
아주 흐릿하고 모호한 이 꿈속에서 한제는 한 사람을 보았다. 외모는 평범했으나 체구가 매우 컸고 꼿꼿하게 선 채 경멸의 눈빛으로 대지를 내려다보는 사내였다.
“내가 하늘에게 무너지라 명하면 하늘은 무너질 것이다. 땅에게 부서지라 명하면 땅 역시 부서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죽으라 명하면 그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선인들에게 소멸하라 명하면 모든 선인은 소멸하리라! 나는 고족이다. 이 세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태어났으며, 우주가 열리기도 전에 존재했다. 허나 나보다 먼저 태어난 선인들은 나를 노예로 부리려 했다. 나는 그들을 멸하려 한다!”
사내의 목소리는 오만방자하면서도 원한이 깃들어 있었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나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선인을 주적으로 삼아 그들을 소멸할 것이다! 허나 내가 어찌 실패하겠는가! 내게 실패란 없다! 아홉 방울의 혼혈을 받은 세 아들아, 너희는 우리 고족의 백성을 통솔하며 나의 부활을 나의 후계자를 기다려라! 순종은 곧 일반인을 저항은 곧 선인을 뜻하며, 그런 선인들에 대한 저항이 곧 우리 고족이다!”
이내 꿈은 끝났지만 제단 위에서 눈을 뜬 한제의 귓가에는 아직도 방금 전 들었던 말이 맴돌았다. 그 말은 한제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제의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 여덟 개가 보랏빛을 띤 채 회전했다. 그의 두 눈에서 번득이는 고요와 고마의 반점 역시 보랏빛이었다. 혼혈에서 기인하는, 한제가 가진 도고의 혼에서 기인하는 색이었다.
일어나 앉은 한제는 한참을 말없이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하늘과 땅마저 깔보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천지가 소멸하더라도 나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고 창궁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나는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패기가 느껴졌다. 바로 고족의 저항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