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19
한제의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요령의 땅에서 난 잔야술로 천운자의 분신을 죽이고 그 혼을 손에 넣었다. 진정 그 역시 천운자의 의도였단 말인가? 말도 안 돼!’
한제의 머릿속에 당시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허나 돌이켜봐도 천운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흔적은 없었다.
천운자의 혼을 응시하는 한제의 표정은 복잡했고 매우 어두웠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선계의 남쪽,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은 산맥이었다. 꼭대기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서늘한 바람에 뒤섞인 눈송이가 반짝 빛났다. 뼛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한제는 산봉우리로 향했다.
산허리 근처에는 청상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견 혼란스러워 보였고 또 일견 쓸쓸해 보였다.
그녀의 뒤에 선 주일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청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러운 애정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한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듯했고 한제 역시 그들을 방해하지 않은 채 곧장 지나쳐 산봉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얀 누각이 하나 있었다. 누각을 둘러싼 짙은 선기는 하늘에서 거대한 회오리를 하나 형성한 채 사방을 휩쓸고 있었는데 워낙 거대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누각 근처의 허공에 한제가 나타났다.
누각의 문이 열리더니 남색 옷을 입은 청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인처럼 보이는 그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 형께서 이곳까지 오다니.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청림은 당시 한제를 제자로 받아들인 바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는 한제를 제자로 여길 수 없는 상황이 됐기에 자연스레 호칭도 바뀌었다.
“선배님이 예측에 능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한제는 포권을 하며 진지한 얼굴로 청림을 바라보았다.
“좋아, 내 최선을 다해 돕지.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말해보게!”
청림은 한제의 진지한 표정에 웃음기를 거두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제는 좀 전에 겪었던 기이한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손을 휘둘러 천운자 분신의 혼을 소환했다.
청림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번득이면서 천운자 분신의 혼을 응시했다.
“분명 뭔가가 있군! 일단 이 혼을 좀 살펴봐야겠네.”
청림은 오른손을 들어 천운자 분신의 혼을 쥐더니 자세히 살펴보았다.
청림은 한참 뒤에야 미간을 찌푸린 채 신식을 거두고는 천운자의 분신을 한제에게 건넸다.
“아무런 흔적이나 단서도 없군. 이 혼은 보통 분신의 혼과 다를 바 없어. 게다가 매우 허약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야.”
“선배님도 아무것도 찾아내시지 못한 겁니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청림을 바라보던 한제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혼과 융합한 상태의 저를 살펴봐 주십시오. 제 본원에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청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운자 분신의 혼에 완전히 융합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신식이 진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상대가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제는 청림을 믿었다. 그들은 몇 번 만나지 않은 사이였지만 여러 사건을 통해 서로 충분한 신뢰를 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신뢰에 청림은 감격했다.
한제는 다른 말은 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앞에는 천운자 분신의 혼이 앉아 있었다. 이내 눈을 감은 한제는 신식을 펼쳐 그 모든 신식을 천운자 분신의 혼에 녹여 넣어 천천히 융합을 진행했다.
옆에 앉은 청림은 모든 잡념을 집어치우고 진중한 눈빛으로 집중했다. 그리고 신식을 펼쳐 한제의 몸에 주입해 체내를 살핀 순간, 그는 거의 경악했다.
‘일곱 개의 본원! 여섯 개라는 말은 들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건만 무려 일곱 개라니! 이한제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청림은 찬 숨을 헉 들이켜며 새삼스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그 신식이 한제의 체내에 들어선 순간 본원 외에도 심신을 떨리게 할 만한 기운도 느껴졌다는 것이다. 혈맥의 힘이었다. 세상 무엇이라도 그 기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외심에 떨게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세상 모든 생명을 지우고 뿌리까지 제거해버릴 듯 포악하기도 했다.
휘청거리며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청림의 눈빛에는 이제 충격만이 아니라 두려움까지 담겼다.
‘이 혈맥의 기운은 고신의 것이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기운이기에 이렇게도 무시무시하단 말인가!’
잠시 후에야 애써 충격을 억누른 그는 집중해서 천운자의 혼과 융합한 한제의 변화를 관찰했다. 이미 융합은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 있었다.
한데 이 과정을 지켜보던 청림의 표정에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한제 체내의 일곱 갈래 본원이, 특히 금제의 본원이 은근슬쩍 한 갈래 갈라져 나와 체내에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기이한 일종의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한제는 이 모든 것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다.
한제와 천운자의 혼이 충분히 융합되자 갈라져 나온 금제의 본원은 더욱 빠르게 한제의 체내를 맴돌았다.
“뭔가 이상하군!”
청림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곧장 손을 들어 한제의 미간을 두드렸다.
“정신술(定神術)!”
그의 손짓에 한제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고 그의 몸은 우뚝 멈추었다. 모든 운행과 융합 역시 찰나의 순간 중단됐다.
그 찰나의 순간, 청림은 한제의 미간을 두드렸던 손가락으로 이번에는 가슴팍을 가리키더니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한제의 가슴팍에서 나타난 어렴풋한 한 줄기 빛이 청림의 손가락 끝을 에워쌌다.
청림은 제멋대로 돌아가던 금제의 본원 일부인 그 빛을 응시하며 신식을 가동했다. 그 빛에 신식이 전부 응집된 순간, 청림의 머릿속에서는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잠시 후 다시 또렷해진 그의 시야에는 익숙한 우주가 담겨 있었다.
소하성역이었다.
‘한제의 금제 본원에서 스스로 갈라져 나온 한 줄기가 이곳으로 가려 했구나!’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우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보며 신식으로 존재하는 청림은 그 빛을 따라갔다.
‘이따위 장난을 치는 것이 천운자의 본체인지 아니면 다른 자인지 확인해봐야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에서 일곱 색채의 빛이 번득이며 나타났고 어느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썩 꺼져라!”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일곱 색채의 빛은 격렬하게 번득이다가 거대한 칼을 형성하더니 청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 우주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칼의 기세에 사방의 허공은 일제히 진동했고 청림 역시 두 눈을 번득이며 결인을 그린 두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성(星), 월(月), 일(日)의 빛으로 몸을 보호하고 세 자루 검으로 강을 가른다!”
그와 동시에 청림의 근처에서 별빛과 달빛, 햇빛이 맴돌며 나타나 일곱 색채의 빛으로 이루어진 칼과 충돌했다.
콰쾅!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칼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청림의 몸도 바르르 진동하면서 흩어져 사라졌다.
격돌
선계의 설산 위.
청림의 오른손 손가락 끝에서 맴돌던 가느다란 빛이 무너져 내렸다.
“우웩!”
청림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얼굴은 더없이 창백한 상태였다.
정신술의 위력이 흩어지면서 천운자 분신의 혼과 분리된 한제 역시 바르르 떨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천운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일곱 색채의 빛은 보았다! 네가 천운자 분신의 혼과 융합을 했을 때 체내 금제의 본원이 한 갈래 갈라져 나오더니 소하성역으로 이끌려가더구나. 난 그 빛을 따라갔지만 일곱 색채의 빛으로 만들어진 칼의 공격을 받고 연계가 끊어져 버렸다.”
“소하성역이라⋯⋯.”
한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만약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네가 가진 그 분신의 혼은 너와 그자를 연계해주고 있다. 천운자는 그 혼을 통해 네 본원을 훔쳐가고 있는 것이지.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대단한 자다. 한데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분신으로 본원을 훔쳐 간단 말이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다. 그가 네 본원을 훔쳐간 거라면 어째서 네 본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 게다가 그가 발휘한 신통술은 간단해 보이지만 온 우주를 움직인 힘이었다.”
청림은 진중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한제의 눈에 짙은 살기가 들어찼다. 허나 고민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일종의 탁본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다.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설산 위에 울려 퍼졌다.
“난 일찍이 윤회일체(輪回一體)라는 술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목소리와 함께 남색 빛 한 줄기가 허공에서부터 설산을 비추었다. 그 빛 안에서 허상의 남몽도존이 걸어 나와 한제와 청림 곁에 이르렀다.
“남몽도존 선배님을 뵙습니다.”
청림이 공손한 자세로 포권을 했다.
남몽도존은 청림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자애로운 눈으로 한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장존으로부터 들었지. 칠채선존의 신통술 중 하나라더구나. 다만 칠채선존 역시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 술법의 중점은 수차례 윤회를 거듭할 때마다 분신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분신들은 기이한 방법을 통해 서로를 삼키지.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있다고는 하나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잘 알지는 못한다.”
한제는 집중해 남몽도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술법으로 만들어진 분신이 남의 손에 들어가면 짧은 시간 내에 그 분신을 얻은 사람과 융합해 하나로 합쳐지지. 그렇게 되면 그간 더 많은 분신을 삼켜왔던 분신은 그 사람의 기운과 수준을 포함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네가 얻은 본원도 그자의 것이 되는 것이지. 매우 익히기 힘들지만 일단 성공한다면 무시무시한 신통술이다. 네 상태와 청림의 이야기, 그리고 네 손에 들린 그 혼을 보니 아무래도 네가 누군가의 윤회일체술에걸린 것 같구나.”
한제는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난 이 술법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신통술이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것만은 안다. 윤회일체술도 마찬가지야. 만약 네가 상대를 삼킬 수 있다면 네 수준은 더욱 높아질 게다.”
말을 잇는 남몽도존의 눈이 밝게 번득였다.
“칠채선존도 완벽하게 깨우치지 못한 이 신통술을 과연 누가 발휘한 것인지 궁금하군. 네게 이 신통술을 발휘한 자를 찾도록 도와주마. 허나 그를 죽이는 것만큼은 네 스스로 해야 한다. 너와 이 분신의 혼은 이미 하나로 합쳐졌어. 어쩌면 이것은 네게 큰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남몽도존이 손을 들자 그 위에서 번득이던 짙은 남색 빛이 고리를 이루었다. 이어서 남몽도존이 그 손으로 한제의 미간을 누르자 한제의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렸고 시야는 남색 빛으로 뒤덮였다.
그 빛 안에서 한제는 우주를 보았다. 이 우주는 순식간에 뒤로 흘러갔고 잠시 후에는 시야에 소하성역 내 어느 운석이 들어왔다.
그 운석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천운자의 눈빛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 그의 눈빛은 한제의 눈빛과 겹쳐졌다.
“천운자!”
눈앞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 한제의 몸을 뒤덮었던 남색 빛도 흩어져 사라졌다.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하늘로 날아올랐고 순식간에 선계에서 사라져 은하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