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27
그의 체내 칠채의 혼은 노인의 육신을 통제해 한제를 향해 돌진하게 했지만 한제를 향한 두 눈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만약 이곳이 동부계가 아니었다면 그가 천도를 겁낼 필요는 없을 것이나, 동부계 안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이곳의 모든 것은 천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천도를 장악했다는 것은 곧 이 안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천도의 흡수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연도비의 자폭에 분열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전가 노인은 자신에게 천도에 저항할 수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때 또 다른 문제가 생각났다.
“네가 세 번째 주혼을 찾았구나!”
전가 노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라 칠채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
한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태운 지하마수는 남은 다섯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내 눈을 감고는 저 먼 곳으로 향했다.
4대 장군은 분분히 물러나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더 이상 그들은 한제의 앞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한제와 지하마수의 뒷모습이 저 먼 곳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묵묵히 우주를 가르던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도가 아직 완전해진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이 녀석, 4대 장군은 그렇다 쳐도 전가 노인은 삼키기 힘들겠다고 했어.’
오행성
곤허성역, 우주 어딘가에 돌연 일곱 색채의 빛이 번득이며 나타나더니 칠채도인이 손에 피로 이루어진 주먹만 한 공 아홉 개를 쥔 채 걸어 나왔다.
“마침내 구현(九玄) 혈맥을 모두 모았다. 이제 윤회로 돌아가 세 번째 주혼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어! 그는 분명 이곳 곤허에 있을 터!”
★ ★ ★
같은 시각 선강 대륙, 선족이 점거한 구역. 험준한 산맥이 가득했고 산들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이 산맥에는 칠도종이라는 선인 종파가 있었다.
깊은 밤, 별빛이 반짝이는 시각이었으나 울창한 숲 곳곳에서 흉수들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리고 그때, 하늘 높이 걸린 밝은 달에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에 왜곡되는 듯하던 달에서는 이내 쓸쓸해 보이는 흑발의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아래쪽의 대지를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짙은 기대가 어린 미소였다.
“우리 도고 일맥의 아이야. 내 너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는 길이 험할 수도 있겠지만 난 네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산맥을 향해 나아갔다.
곤허성역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는자는 어쩌면 동부계의 주인이었던 칠채선존뿐일지도 모른다.
곤허성역의 주작성에서 한제가 태어난 지도 벌써 2천 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두 번의 큰 전쟁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천성역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며 한바탕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는 두 번째 전쟁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계내와 계외의 전쟁으로 곤허성역은 거의 폐허가 됐고 수련자만이 아니라 일반인과 모든 생명이 절망에 빠졌었다. 생기가 흘러넘쳤던 수련성들은 무너져 내려 우주의 먼지로 흩어졌고 반짝이던 별들은 빛을 잃었으며, 곳곳이 뿌연 먼지로 채워져 있었다.
그 와중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도 비껴갔고 침략도 받지 않은 수련성들도 소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수련성 중 하나가 광활한 우주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마치 초록이 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녹색 빛을 띤 것이 울창한 숲이 자라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영기도 충만해 당시의 천운성보다도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주위에 부속 수련성은 없었고 그저 서로 다른 색깔의 빛 고리 다섯 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 알록달록한 다섯 개의 빛 고리는 만개한 꽃처럼 매혹적이고 몽환적이라 무척 아름다웠다.
이 수련성에는 일반인도 매우 많았다. 적어도 십억 명은 훌쩍 넘을 터였다. 그들은 전란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갔다. 이는 곤허성역만이 아니라 계내를 통틀어 매우 드문 경우였다.
수련성에 충만한 영기 때문인지 이곳의 일반인 중에는 병을 앓는 이도 적었다. 대부분 건강하고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수련자가 되기에 적합한 자질을 타고났다.
이 수련성의 이름은 오행성이었다.
오행성에는 오직 하나의 종파만이 있었다. 바로 귀일종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오행을 하나로 합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파다.
오행성은 매우 기이한 곳이었다. 분명 성역 안에 있음에도 이곳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 수련자 연맹이라 해도 그 구체적인 좌표와 방위를 알지 못하면 찾아내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마치 지하마수처럼 신식에도 걸리지 않았다.
이 수련성이 두 차례 전쟁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계내와 계외의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수백 명의 계외 수련자 무리가 어쩌다가 이곳으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허나 한제는 오행성의 좌표를 알고 있었다. 당시 만표가 그를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옥패를 준 덕이었다.
지하마수에 올라탄 한제는 옥패를 쥔 채 오행성의 방향을 자세히 살폈다.
“만표의 초대를 받은 것도 벌써 1천 년 전의 일이야.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옥패로부터 신식을 거둔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지하마수에 신식을 주입했다. 흉수는 앞쪽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만표에게는 오채(五彩) 극의 경지가 있다.”
한제는 중얼거리며 지하마수의 등에 올라탄 채 낯선 성역을 향해 다가갔다.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해도 밖에서는 신식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이곳은 곤허성역과 분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제는 전방에 만개한 꽃처럼 떠 있는 오행성을 보았다.
그 순간, 한제는 감탄했다. 오행성을 둘러싼 빛 고리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여태 봐온 수많은 수련성 중 단연 으뜸으로 아름다웠다.
“동부계에 속한 수련성은 아니군.”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천도의 주인이 된 그는 지하마수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눈앞의 수련성이 신식에 걸리지 않는 것은 이곳이 동부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수련자들은 이곳에 들어와 미지의 신통술로 선강 대륙에서 이 수련성을 가지고 온 거로군.”
눈을 감은 한제는 천도와 융합하다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지하마수의 등에서 일어선 한제는 허공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홀로 오행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접근해오자 오행성을 둘러싼 다섯 갈래의 빛 고리가 눈부시게 반짝이면서 확장됐다. 쉭, 쉭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다섯 개의 빛 고리는 한제의 접근을 저지하려는 듯했다.
우뚝 멈춰선 한제는 교차하며 회전하고 있는 다섯 갈래의 빛 고리를 잠시 말없이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만표, 그때의 약속을 지키러 왔다!”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교차된 빛 고리 안으로 들어가 마치 천둥처럼 우렁차게 울리며 그 안의 모든 생명체의 귀에 닿았다.
그 순간, 오행성의 모든 생명은 일반인, 수련자 할 것 없이 하던 일을 멈추었다. 심지어 숲속의 흉수들마저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한제는 조용히 빛 고리 밖에서 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거친 목소리가 수련성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놀란 기색이 어린 목소리였다.
“만표 장로님께서는 1천 년 전 폐관수련을 시작하신 이래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저희에게는 그분을 깨울 방도가 없지요. 무슨 일로 장로님을 찾으십니까?”
“넌 누구냐?”
한제는 짧게 되물었다.
“저는 귀일종 부종주 윤동신입니다. 종주와 다른 장로들이 폐관수련을 진행 중일 때 귀일종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지요. 귀하가 누구인지 압니다. 허나 만표 장로님께서는 나오실 수 없으니 우선은 그냥 돌아가시지요!”
그 목소리는 갈수록 신중해졌고 생각을 철저히 정리한 뒤에야 입을 여는 듯 답변 사이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한제는 다섯 개의 빛 고리 너머를 들여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내가 온 것을 알고 있다.”
말을 마친 그는 차분하게 다섯 개의 빛 고리를 향해 다가왔다.
윤동신이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고귀하신 분인 줄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오행성에 멋대로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시겠다면 오행귀일진(五行歸一陣)을 발동하겠습니다. 이 진은 무정하여⋯⋯.”
윤동신이 말을 맺기도 전에 돌연 오행성 안에서 포악한 한 줄기 신식이 발산됐다. 이 신식은 휙 소리와 함께 사방을 휩쓸며 단숨에 윤동신의 목소리를 제압하더니 기세등등하게 울렸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오행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다면 오행성에 발을 들여도 좋다. 그러지 못한다면 곧장 꺼져라!”
허나 그 와중에도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몸이 교차된 빛 고리와 닿은 순간, 한제의 체내에서 펑, 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신통술이 동시에 공격하듯 부딪쳐오는 소리였다.
다섯 개의 빛 고리로부터 발휘된 이 신통술에는 오행의 힘이 깃들어 있어 때로는 화염이 됐다가 때로는 서늘한 물이 됐고 다시 금속이나 흙, 나무의 기운이 되기도 했다.
오행성 동쪽에는 원을 그리듯 배열된 아홉 개의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귀일종의 터였다.
하늘을 가리키는 아홉 자루의 검 같은 이 산에서 발산된 서늘한 살기는 반경 1백만 리를 뒤덮은 상태로 그 범위 안에는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면마저 시커먼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아홉 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땅에는 산봉우리보다 더 높은 99층짜리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 탑이 바로 귀일종으로 귀일종의 모든 것은 이 탑 안에 있었다. 계내의 여타 종파와는 확연히 달랐다.
탑의 30층 이하의 층에서 줄기줄기 빛들이 튀어나와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쌌다. 각 빛에는 각기 다른 수준의 수련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탑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모두 불쾌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탑의 31층부터 60층까지의 서른 개의 층에서도 백여 명의 수련자가 튀어나왔다. 대부분은 노인이자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상태인 이들은 덤덤한 얼굴로 아홉 개 산봉우리로 흩어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들의 눈에도 불쾌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귀일종이 오행성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진을 누군가가 쉽게 뚫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이때 탑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열 번째 층에는 네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중 검은 도포를 입은, 눈 아래 점이 있는 사내가 차게 코웃음을 쳤다.
“이한제? 흥!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 동부계에서 칠채의 혼을 제외한 누구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아! 나 역시 오행진에서는 1각도 버티지 못하고 불의 관문 앞에서 막히고 마는 바. 저자의 수준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절대 모든 관문을 통과할 수는 없어!”
“나는 오히려 저자가 다섯 관문을 모두 통과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진은 구전(九轉)을 가동할 것 아닌가? 저자가 과연 구전(九轉) 중 몇 번째 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검은 도포의 노인 옆에 앉은 중년 여인이 냉혹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한데 만표 장로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네 사람 중 다른 노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포를 입은 그의 얼굴에는 갈색 반점이 여러 개 있었다. 바로 윤동신이었다.
“나도 만표 장로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은 이상 공연히 이한제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다고 보네. 보통 수련자가 아니라 이한제야. 그저 만표 장로를 만나러 온 것뿐이라면⋯⋯?”
그때, 마지막 한 명인 중년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귀일종이 언제부터 두려움에 벌벌 떨었는가! 저자가 이한제가 아니라 더한 자라 해도 우리 오행성 앞에서는 납죽 엎드려야 할 터!”
그러자 중년 여자가 날카롭에 외쳤다.
“입씨름할 것 없어. 이미 난 결단을 내렸어. 게다가 만표 장로가 이 일에 대해 알 필요는 없지. 그분도 우리의 이런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있잖아?”
그때, 오른쪽 눈 아래에 검은 점이 난 노인이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가부좌를 튼 네 사람 중앙의 허공이 왜곡되더니 거울이 생겨났다. 그 안에는 다섯 갈래의 빛 고리와 대치하고 있는 한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