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28
대지의 본원
같은 시각, 탑의 꼭대기에서부터 아홉 번째 층에는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모두 중년인으로 그중 한 명은 오색찬란한 도포를 입고 있었다. 덤덤한 표정에 기이한 눈빛을 드러낸 그는 고개를 들어 탑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로 만표였다.
한제와의 만남 이후 1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에게서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만표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당시 원영기 수련자에 불과했던 자가 1천 년 만에 벌써 저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다니, 이제 나도 저자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어.”
“나 역시 그렇지. 허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우리는 그들의 후손일 뿐이야. 이곳을 지키기만 하면 되지.”
맞은편에 앉은 보라색 옷의 준수한 중년 사내가 웃으며 만표의 말을 받았다.
“만에 하나 정말 저자가 들어온다 해도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네. 위층의 선조 중 한 분만 깨어나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한제가 정말로 오행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허나 구전은 힘들 거야. 아마 세 번째 전이 한계겠지. 저 진은 당시 아홉 선조께서 함께 설치하신 것 아닌가. 내 짐작으로 이한제는 공령기 중기 수준일세.”
만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되겠군.”
중년 사내 역시 미소를 지으며 탑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편, 한제는 오행성 밖 다섯 갈래의 빛 고리 안에서 침착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의 빛 고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지만 한제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강력한 도고의 육신을 가진 그에게는 애초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가 나아가는 동안 오행의 힘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서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으로 성난 바다에서 날카로운 금속과 낮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나무로…
그러나 한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행성에 이르렀을 때부터 그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들어가야만 했다. 첫 번째 변수였던 천운자에 이은 두 번째 변수가 숨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변수에 대체 얼마만큼의 힘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이런 상태라면 세 번째 주혼을 찾는 것은 상당히 불리해졌다.
한제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면사를 걷어내고 그 변수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숨겨온 힘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 힘을 다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다는 자신감은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마저 없었더라면 절대 혼자서 이곳에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오행의 신통술이 콰쾅 소리와 함께 한제의 사방에서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열네 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는 오행성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갈래 빛 고리 내부 깊은 곳까지 들어선 상태였다. 이곳의 빛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사방을 에워싸던 오행의 힘은 돌연 흙이 된 상태였다. 이전까지의 모든 것은 그저 초입에서의 위력에 불과했던 듯했다. 지금부터 한제가 마주해야 할 것이 바로 진정한 오행진의 첫 번째 관문인 대지토진(大地土陣)이었다.
대지토진이 활성화된 순간, 한제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치 또 다른 세계에 이른 것만 같았다.
이 세계에는 오직 대지뿐, 하늘은 없었다. 응당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도 거꾸로 매달린 대지가 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위의 대지에서 진흙 알갱이들이 마치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 위아래의 대지를 연결하는 듯한 폭풍이 무려 아홉 개나 몰아치고 있었다. 각 폭풍은 사방을 맴돌았고 그것들에서 울린 쉭 소리가 공간을 진동시키면서 끝없이 메아리쳤다.
그 순간, 몰아치는 폭풍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로부터 1만 척 떨어진 곳에 이른 폭풍들은 각각 거대한 얼굴이 됐다. 진흙과 모래로 이루어진 아홉 개의 얼굴은 포효를 내지르며 한제에게로 달려들었다.
발아래의 대지 역시 진동하면서 뒤로 나가떨어졌고 파도치는 바다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마치 그 안에 기이한 흉수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데도 한제는 덤덤하면서도 싸늘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겨우 오행진의 령 따위는 내게 대적할 수 없다!”
앞으로 훌쩍 몸을 날린 한제는 순식간에 그중 한 얼굴 앞에 이르더니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쾅!
짧지만 웅장한 소리와 함께 얼굴은 모래 알갱이로 무너져 내리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곧장 돌아 서더니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아홉 번의 주먹질에 아홉 개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한데 바로 그때, 이 기이한 세상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던 대지가 급속도로 꿈틀거리며 아래로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밑의 대지 역시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두 대지가 맞물리면서 쾅 소리와 함께 한제의 인영을 가둬버렸다.
★ ★ ★
오행성의 탑 안. 중앙의 거대한 거울에 집중하고 있던 네 사람 중 검은 도포의 노인은 한제가 두 대지에 갇히자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해도 대지토진을 쉽게 파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한제 저자도 어쩔 수 없군.”
“대지토진의 두 번째 변화에 저리 힘들어 해서야 앞으로 남은 일곱 번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흙의 진을 통과한다 해도 중상을 면하기는 힘들겠어.”
중년 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울 속 한제의 모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는 증오와 동시에 통쾌함이 어려 있었다.
“이한제, 사도환과 가까운 존재라지? 오늘 너는 그자를 대신해 벌을 받게 될 게다!”
한데 그 둘과 달리 나머지 두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워 오히려 불안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돌연 거울 속 광경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격렬한 변화에 검은 도포의 노인과 중년 여인의 웃음이 뚝 그쳤고 표정 역시 급변했다.
맞물린 대지는 여전히 한제를 단단히 압박하고 있는 듯 희미한 균열조차 생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쿵, 쿵 하고 울리는 소리였다.
잠시 후, 맞물린 대지에 줄기줄기 균열이 나타났다. 균열은 순식간에 대지를 뒤덮더니 결국 콰쾅 하고 무너져 내려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제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착한 모습으로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허나 그들이 진정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한제의 오른손을 봤을 때였다. 무슨 신통술을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발로 인해 낱낱의 진흙이 되어버린 대지가 한제의 주위를 맴돌다가 기이하게 수축해 그 오른손 위에 응집한 것이다.
이제 한제의 손에는 한 줌의 진흙이 들려 있었다. 짙은 영성을 띤, 오행성 대지토진의 진령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네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울 속 한제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어 그 안에 쥔 진흙을 흩어 없애더니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 검은 도포의 노인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에 헉 하고 찬 숨을 들이켜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세 사람 역시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물러섰다.
“저자가 우리를 발견했을 리가 없어! 우리는 진 밖에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저자는 대지토진의 진령을 거두었어!”
★ ★ ★
탑의 꼭대기로부터 아홉 번째 층. 탑 밖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만표의 미간이 점차 구겨졌다.
“진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령까지 거두다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맞은편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 아직 네 개의 관문이 더 남아 있고 그 후로는 구전을 거쳐야 하니까. 저자가 어떻게 그 관문들을 넘어설 것인지 궁금하군.”
만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와 한제는 애초에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짧은 만남조차 1천 년도 더 전의 일이 아니던가.
★ ★ ★
같은 시각, 곤허성역에는 붉은 빛 한 줄기가 나타났으나 동부계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빛에서는 곧 흑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장삼을 입은 청년은 사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저기 있군. 좋아, 아직 녀석의 천성을 파악하지는 못했으니 어디 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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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성 밖, 교차된 다섯 개의 빛 고리 안은 흐릿해 밖에서는 그 안을 또렷하게 살필 수가 없었다. 그저 왜곡된 채 바깥으로 확산되는 파문만 보일 뿐이었다.
빛 고리 안 깊은 곳,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 위에서는 한 줌의 진흙이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한제의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려 들기도 했지만 한제가 꽉 움켜쥐자 그대로 무너져 내려 다시는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져 사라졌다.
오행 중 흙 속성으로 이루어진 대지의 모래는 약간의 본원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에 천운자로부터 받은 한 줌의 진흙을 가지고 있던 한제의 저물공간에는 이제 두 줌의 진흙이 들어 있었다.
“과연 선강 대륙에서 온 자들답군. 대지의 령을 응고시켜 진에 녹여 넣다니. 수만 년 후라면 이 진령은 세 번째 단계의 오행토령체(五行土靈體)가 될 수 있을 터!”
오행진을 보는 한제의 눈빛은 흥미로 번득였다.
“오행의 본원 중 화염의 본원은 이미 가지고 있다. 나머지 네 개의 본원까지 갖춘다면 내 수준은 증폭하겠지. 게다가 오행을 하나로 합친다면… 새로운 본원을 탄생시킬 수 있을 지도 몰라!”
한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다섯 갈래의 빛 고리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악의를 품은 적, 특히 동부계 출신이 아닌 자와는 대화를 나눌 마음도 없었다. 그들과는 오직 힘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한제 입장에서 그들은 자신의 집에 침입한 강도와 다름없었다. 강도와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겠는가?
대지토령을 거둔 한제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눈앞에는 불바다가 나타났다.
온 하늘과 땅을 채운 불바다에 시야가 시뻘겋게 변하며 크게 일렁였다.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에는 생명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오직 화염뿐.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제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층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