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32
현라 대천존은 여유로운 얼굴로 오행성의 탑을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손짓 한 번으로도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연기처럼 소멸시킬 수 있는 수련성을.
서리처럼 냉랭한 눈으로 회오리를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그 안으로 손을 뻗더니 콱 움켜쥐었다.
그 순간, 회오리 안에서는 줄기줄기의 금빛이 발산됐다. 눈부신 금빛은 칼날처럼 한제의 오른손과 충돌했다.
콰쾅! 쾅!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고 무너진 수진에서는 메아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제는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나면서 오른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냉랭했다.
회오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으로 깨져버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구전 심륜(心輪)
오행성, 탑 꼭대기에서부터 아홉 번째 층. 금빛으로 가득한 이곳에는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금색 장삼을 입은 노인의 가슴팍에는 생동감 넘치는 오행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쿨럭!”
노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검게 피멍이 들고 기이하게 뒤틀린 오른팔은 부러진 것이 확실해 보였고 적잖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자의 체내에서 흘러나온 힘은 도고 일맥의 힘이었어! 엽막이 뿌린 3천 방울의 피로 이루어진 후손과는 다르다. 엽막의 후손이 어찌 당시 엽막보다 강할 수도 있겠어! 그자는 동부계 출신 수련자가 아니라 선강 대륙 출신일 가능성이 커. 젠장, 우리 귀일종 이외의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니!”
바짝 졸아든 노인의 눈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려운 힘이었다. 만약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 오른팔은 완전히 뭉개져 버렸을 거야. 어쩌면 전신이 터져버렸을지도⋯⋯.”
노인은 무거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쳐들더니 크게 소리쳤다.
“만표, 이리 오너라!”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탑 밖에 있던 귀일종 수련자들은 심신이 진동했다. 충격에 빠져 있던 이들은 일제히 탑을 향해 꿇어앉았다.
만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장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포권을 한 만표가 입을 열려는 순간, 곁에서 돌연 거대한 손의 허상이 나타나 그를 잡아채더니 끌고갔다.
만표는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거대한 손에 끌려간 곳에서 곧장 무릎을 꿇더니 보기 드문 공손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만표, 아홉 번째 선조를 뵙습니다.”
“저자는 누구냐? 어찌 저런 자의 화를 산 게야!”
금색 장삼을 입은 노인은 만표에게 호통을 쳤다.
그때 지면에 뿌려진 노인의 피를 본 만표는 바르르 떨려왔고 뒤이어 엉망이 된 노인의 오른팔을 보고는 심신에 거친 파도가 일렁이기까지 했다.
선조가 먼저 한제를 공격하고도 오히려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덜덜 떨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제에 대한 모든 것을 소상히 고했다.
한편, 그 무렵 한제는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오행의 빛이 눈부시게 번득이더니 잠시 후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맑은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그 바람에 실린 향기에 마음이 트이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었다. 커다란 나무들은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은 채 녹음을 드리웠다.
목진(木陣)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한제의 입가에 점차 미소가 어렸다. 이 수련성을 찾아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오행진에 진입한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기회가 됐다. 그러니 목진도 건너뛸 수는 없었다.
한제는 앞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한데 그가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목진 안의 모든 나무가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그 나무에 달려 있던 수많은 나뭇잎이 전부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하늘을 뒤흔들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휙!
달려드는 나뭇잎이 어찌나 많은지 거의 하늘과 땅을 다 가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한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뒤로 세 걸음 물러나더니 오른손으로 허공을 홱 찢었다.
시천!
그 손짓에 바람이 몰아쳐 구름을 흩어버렸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방의 허공에는 세로로 거대한 한 줄기 균열이 벌어졌다.
세상은 이 균열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다. 균열 안쪽은 칠흑처럼 검게 텅 비어 있었는데 균열은 끊임없이 벌어지면서 급속도로 확장됐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천술의 위력은 세상을 반으로 갈라버렸을 뿐만 아니라 한제를 향해 달려들던 나뭇잎들까지도 갈라버렸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고 목진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돌진해오던 나뭇잎들은 남김없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한제의 양옆으로 스쳐갔고 맞은편에서 날아오던 조각난 나뭇잎과 충돌하기도 했다.
잠시 후, 한제가 백발을 휘날리며 나뭇잎들 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그 뒤의 균열은 끊임없이 확장되면서 거대한 입처럼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
그 순간, 목진의 대지에 서 있던, 나뭇잎을 잃은 모든 나무가 돌연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길게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나무들은 서로 복잡하게 뒤얽히며 연결되었고 상공에는 나무로 이루어진 거대한 얼굴이 하나 생겨났다.
한제의 백의백발이 세차게 나부꼈다.
“굴복하겠느냐, 소멸되겠느냐!”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무로 이루어진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무 얼굴은 한참이나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오랜 세월이 담긴 듯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미간에서는 흘러넘치는 듯한 생기를 담은 녹색 빛이 나타나 응결되더니 녹색 결정이 되어 한제에게로 다가갔다.
한제가 자신의 앞에 둥둥 떠 있는 그 결정을 거두자 아래쪽의 나무들은 다시 꿈틀거리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걸음 나섰다. 목진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순식간에 왜곡되다가 무너져 내렸고 와해된 목진 너머로 줄기줄기 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사방을 뒤덮은 금빛은 목진이 붕괴해 사라지자마자 오행진의 마지막 진인 금진(金陣)을 형성했다.
금진의 세상에는 하늘과 땅의 개념이 없었고 금속의 힘으로 가득해 매우 거칠게 느껴졌다. 땅이 있어야 할 곳은 금빛을 번득이는 검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는데 각 검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발산됐다.
구름도 태양도 없는 하늘 또한 무궁무진한 검으로 가득했다. 한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이 검들은 웅웅 우는 소리를 냈다. 이 공간의 모든 검이 공명하는 듯했다.
금속은 나무와 달랐다. 나무는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웠기에 한제는 지능을 가진 목령에게 선택하게 할 수 있었지만 금속은 아니었다. 금속은 융통성 없이 단단하여 굽힐 줄을 몰랐다.
이때 웅 소리를 내며 공명하던 검들이 일제히 한제를 향해 돌진해왔다.
콰쾅!
격렬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 ★
오행성, 탑 꼭대기로부터 아홉 번째 층. 만표로부터 한제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노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진 상태였다. 여전히 한제가 선강 대륙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막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어딘가를 내다보았다. 노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금진을 통과했다! 구전에 들어갈 참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노인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선조님, 오행성의 가장 강력한 구전 심륜(心輪)으로도 저자를 저지할 수 없는 겁니까?”
만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구전 심륜은 아홉을 셀 시간이면 다음 전으로 넘어가지. 조급해질수록 회전은 빨라진다. 허나 저자가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군. 선강 대륙의 귀일종을 지키는 데 사용되는 이 진은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다면 쉬운 진이지. 선강 대륙에 설치된 진에 비하면 그 위력이 4할에 불과하지만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심륜이 조금이라도 돌아가기만 한다면 절대 뚫고 나오지는 못할 거야! 모든 것은 저자의 마음이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노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나치게 오묘하고 현묘한 그 말을 만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는 물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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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금진을 무너뜨린 한제의 전방은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멀지 않은 곳에 떠 있는 오행성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오행성에 진입할 터였다.
한데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허공을 내딛던 그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오행성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탑 꼭대기로부터 여덟 번째 층. 금색 장삼을 입은 노인의 얼굴에서 어두운 빛은 사라지고 점차 음산한 웃음이 드러났다.
“구전 심륜. 선강 대륙에서도 이 진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본래도 교활하고 꾀가 많은 자였다고?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고난을 겪었을 테니 지금은 더 교활하고 간사해졌을 터! 총명한 자일수록 구전 심륜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더욱이 뒤로 갈수록 더욱 통과하기 어려워져 아홉 번째 전에 이르면 저자는 결국 모든 힘을 다 소진한 채 숨을 거두고 말 거야!”
“선조님이 계시는 이상 저자가 도망칠 수는 없을 겁니다.”
만표는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금색 장삼의 노인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한이 어려 있었다. 오른팔의 극심한 고통은 선력을 동원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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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성 바깥에서 안쪽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현라 대천존의 두 눈은 가늘어졌다.
“구전 심륜이라… 그리 위력적인 진은 아니나 그 구조를 알지 못하는 수련자에게는 통과하기 매우 어렵다. 어쩌면 저 녀석은 벗어나지 못할지도⋯⋯. 좋아, 일단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지. 곤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때 도와줘도 되겠지.”
현라 대천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한제가 선강 대륙 귀일종의 이름난 이 진을 통과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작은 기대였으나, 자신이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현임 도고 황존이라 해도 이 진을 처음 접한다면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